▲베트남 소녀 응완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권윤영
사실 그에겐 이 일이 더욱 남다른 의미가 있다. 지체장애 3급인 그 역시 30여년 전 초등학교 시절 당시 양친회였던 플랜코리아의 도움을 받아 어려운 시기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
"당시 현금으로 4200원을 후원받았어요. 600원이면 밀가루 한 포대를, 10원이면 크림빵 하나를 살 수 있었죠. 특별활동을 할 수 있도록 어린이회관에도 등록됐고요. 그 도움이 정말 컸던 것 같아요. 장애 몸을 가지고 살면서 그걸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됐습니다."
그는 두 살 때 소아마비를 앓고 난 후 지체장애인이 됐다. 아버지는 그가 10살이던 해에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시장에서 생선을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등록금이 없어 힘겹게 중학교를 졸업한 후 구로공단에 취직한 그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천대를 받으며 공장을 전전했다. '그 당시 사는 건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는 유씨에게 구호단체 양친회의 기억은 보이지 않는 끈과 같았다.
그래서일까. 플랜코리아를 알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그는 어느 정도 성장 후 양친회를 찾았지만 옛 단체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에 지금은 플랜코리아로 바뀐 양친회 기사가 실린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바로 신청을 했다. 그리고 지금, 미국인 양부 윌리엄 테일러씨에게 받은 사랑을 고스란히 응완에게 되돌려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 53년부터 79년까지 매년 2만 5천명의 어린이가 도움을 받았어요. OECD 가입 후 우리도 후원국이 되었는데 현재 우리나라 후원자 숫자는 3000여명에 불과하답니다. 도움 받은 사람의 10분의 1만이라도 동참해주면 좋을 텐데 말이죠. 응완은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랍니다. 응완이 성장해서 또 다른 나라의 어린이를 도와주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난 89년 열쇠가게를 차리고 대전에 정착한 유영수씨는 그동안은 삶의 의미가 없었지만 이제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예전에 눈이 많이 오는 날 버스도 안 다니는 길을 30여분을 걸어가고 있었어요. 근데 차들이 그냥 지나쳐 가버리더라고요. 그때 생각했죠. '기동력이 생기면 나 같은 사람에게 차량봉사를 해야지'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