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성칠 교수창작과비평사
<역사 앞에서>는 김성칠 교수가 1945년과 46년 그리고 6·25가 일어났던 1950년에서부터 전쟁의 와중이었던 51년까지의 일기를 모아놓은 책이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저자의 미망인 이남덕 전 이대 국문과 교수는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동족상잔> 이라는 끔찍한 전쟁을 경험하게 했던 6·25 동란을 당시 치열하게 대립했던 좌 우 어느 편에서도 서지 않았고, 또 어디로 피난도 못 가고 앉은 자리 서울 근교에서 전쟁을 겪었던 한 <역사가의 눈>을 통하여 그 전쟁의 의미를 살피는 것"이 <역사 앞에서>를 출판하는 목적이라고 책의 후기에서 밝혔다.
역사를 전공한 저자는 이데올로기보다 민족이 우선이었던 사람이었다. 남한과 북한의 전쟁이 결국 당시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임을 직시하면서 이데올로기의 망령에 놀아나는 민족의 비극에 대해서 안타깝고 비통한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그는 전쟁이 일어난 3일 후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을 보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제 본 국군과 이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다르다면 그들의 복장이 약간 이색질 뿐, 왜 그 하나만이 우리편이고 그 하나는 적으로 돌려야 한다는 말이냐…서로 얼싸안고 형이야 아우야 해야 할 처지에 있는 그들이 오늘날 누굴 위하여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 것이냐. 나는 길바닥에 털퍽 주저앉아서 땅을 치고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울래야 울 수 없는 인민공화국 백성이 되어 있는 게 아니냐." 50.6.28
책을 읽으면서 단편적으로나마 알았던 한국전쟁 당시의 서울의 모습이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그동안의 반공교육으로 한쪽의 시선으로밖에 볼 수 없었던 한국전쟁의 객관적 모습이기도 했다. 인민군은 우리가 교육받았던 것처럼 극악무도하지만은 않았고 당시 남한의 정치인들도 북벌을 주장하며 전쟁을 선동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사실이었다.
"함께 대피한 사람들 중엔 인민군들도 있고 여자 군인도 있다. 말로만 듣던 여자 군인을 처음으로 가까이서 보았다. 여기서 본 인민군들도 모두 행동거지가 단아하고 정중하여, 이즈음 늘 갖는 느낌이지만 인민군은 질이 좋고 훈련이 잘 되어 있다. 맨 처음에 학교에서 받은 인민군에 대한 불쾌한 인상은 갈수록 씻겨진다.“ 50.7.25
"인민공화국에 있어서의 끊임없는 남침의 기획과 선전은 이미 천하가 다 아는 뚜렷한 사실이고, 또 이미 실천을 통하여 분명히 되고 말았으니 더 말할 필요조차 없으려니와, 대한민국의 요로에 있는 분들이 항상 북벌을 주장하고, 또 더러는 우리의 손목을 붙들고 말리는 사람만 없다면, 우리는 1주일 안으로 평양을 석권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되풀이하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50.9.1
그러나 인공치하에서 겪은 공산주의 사회는 체질적으로 리버럴리스트였던 저자에게 있어 결코 민족을 위한 대안사회는 아니었다. 남한내의 혼란과 정치인들의 부패에 개탄하며 남한사회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그는 자신이 한국전쟁을 통해 겪어보는 사회주의 체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하여튼 무어라 표현해서 좋을지 모를 정도의 철저한 언론 통제다. 대한민국 시절에 지저분한 신문을 자꾸 내어서 귀한 종이만 없애고 간상과 정상배의 협잡할 무대를 제공하는 것 같아서 몹시도 언짢게 여기었더니, 이렇게 되고 보니 무능지의 난립이던 그 시절이 되레 그립다." 50.8.29
그는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은근한 호기심과 기대가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겪어본 공산주의 체제 역시 이데올로기를 위해 인간을 도구화하는 사회였을 뿐 그가 생각했던 민족의 자존을 위하는 체제가 아니었음에 실망한다. 그는 스탈린에게 종속되어 그의 개인우상화에 치중하는 인공치하를 보면서 다음과 같이 개탄하였다.
"북조선에서 발간된 잡지를 보니 우리 인민공화국에서도 스딸린의 생일에 굉장한 선물을 보내었음은 물론이요, 이날을 경축하기 위하여 평양을 비롯한 북조선 방방곡곡에서 솔문을 해 세우고 기행렬을 하고 만세를 부르고 꽃불을 올렸다 한다. 청나라 건륭제의 70생일을 경축하기 위하여 주하사 박명원 일행이 북경으로 갔다가 다시 열하로 돌아들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연암의 <열하일기>에서 보았지만, 그때 서울에서 축하 행사를 하였단 말은 듣지 못하였다.(중략) 언제나 이 민족이 사대를 안 하여도 살 수 있을까." 50.8.3
결국 김성칠은 한국전쟁의 전황을 뒤집을 인천상륙작전이 이뤄지기 전 날밤. 석 달 동안 경험했던 인공치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심경을 밝히며 '인민공화국'에 대한 은근한 기대를 접는다.
"빨갱이라는 어감이 우리들의 귀에 그리 거슬리지 않고 들리던 때가 어제런 듯하건만, 적어도 날로 부패해 가는 대한민국을 바로잡고 우리 민족에 새로운 희망을 던져줄 수 있는 그러한 무엇이 아닐까 하고 은근한 기대조차 품었더니... 불과 두세 달 동안에 그 말에서 받는 인상이 이대도록 달라진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일까?“ 50.9.14
마침내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면서 인공치하의 경험은 종지부를 찍는다. 그는 미군에 의해 서울이 수복되는 현실을 목격하며 자신이 어쩔 수 없는 민족주의자임을 드러낸다. 자신의 동네에서 미군과 인민군의 격전이 있었는데 인민군이 미군에 비하여 화력의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에 "그들이 어느 편에 서 있는 군사임은 별문제로 하고 조선사람이 그처럼 용감하다는 말에 나는 허턱 좋았다"고 일기에 적어 놓았다. 그가 보기에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은 또 다른 외세의 침입이었던 것이다.
서울 수복이 되자 인공기를 걸었던 그의 집에는 태극기가 걸리게 된다. 10월 6일 일기에서 "아내가 간직하여 두었었던 태극기를 내걸었다. 석 달 동안 낯선 인공기가 펄럭이던 바로 그 깃대에 다시 태극기를 달아놓고 적이 마음이 후련해짐을 느끼었으나 해바라기인 양 이 깃발 저 깃발을 갈마 꽂는 내 몰골이 몹시 서글프기만 하다" 며 씁쓸한 소감을 밝힌다. 그것은 비단 저자의 소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평양까지 진격하겠다는 대한민국 정부의 방송만 믿고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가 인공치하를 겪어야 했던 모든 시민들의 소감이었을 것이다.
그는 서울 수복이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 인공치하에서 겪었던 느낌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괴뢰집단의 일이라도 좋은 점은 물론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조직과 훈련은 과연 우리보다 앞선 듯싶다. 그러나 인간을 기계나 다른 물질처럼 알고 이를 학사(虐使)하여 모든 힘을 전쟁 준비에로만 기울이는 정치는 그리 좋은 정치라 할 수 없을 것이며, 백성이 허턱 괴롭게만 구는 정치는 본받을 만한 것이 못될 것이다." 50.10.14
이 부분을 읽으면서 과연 저자가 요절하지 않고 반공이 국시였던 60년대 군사독재시절까지 살았더라면 어떠한 시선으로 시국을 판단했을지 궁금했다. "괴뢰집단의 일이라도 좋은 점은 물론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다." 이 말만 가지고도 그는 감옥에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