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죽음, 대를 이어서라도 진실을..."

[동행취재] 고 박춘희씨 사망사건 3주기, 가족들 성묘길

등록 2003.08.11 17:49수정 2003.08.14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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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아! 지금 어디 가는지 알아?"
"모~올라."(웃음)
"지금 엄마 만나러 가잖아. 알면서…."


a 고 박춘희씨 사망사건 3주기를 맞아 박씨의 유족들과 찾은 고인의 묘지

고 박춘희씨 사망사건 3주기를 맞아 박씨의 유족들과 찾은 고인의 묘지 ⓒ 오마이뉴스 이승욱


7살짜리 딸은 훌쩍 커 있었다. 아내가 죽은지 3년이란 시간이 지났으니 남학호(45. 화가)씨의 딸 현정이는 초등학교 3학년이 됐다. 현정이의 입에서는 '돌아가신' 엄마를 만나러 간다는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현정이의 엄마는 지난 2000년 8월 5일(미국 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출장 도중 의문의 죽음을 당했던 고 박춘희(당시 36세)씨다. 박씨는 대구에 있는 주한미군 20지원단 소속 군무원으로 사건 당시 미 국방성 초청으로 워싱턴을 방문했었다.

하지만 미국에 도착한지 1시간 여 만에 공항에서 숙소로 이동하던 택시에서 떨어져 현장에서 숨졌다. 박씨의 죽음은 미국 현지 교포들 사이에는 '토요일의 미스터리'로 불리고 있으며, 그의 죽음과 관련한 의문점은 아직도 꼬리를 물고 있다.

지난 5일 오전 남씨와 남씨의 아들 범송(13)이, 딸 현정(10)이가 길을 나섰다. 3주기를 맞아 엄마가 잠들어 있는 산소로 성묘를 가기위해 서였다. 전날 밤엔 이미 남씨가 직접 제사상을 마련하고 조촐한 의식을 치르기도 했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길은 3년째 거르지 않고 있다. 아내의 산소가 있는 경북 영덕으로 가는 동안 남씨에게 근황에 대해 물었다.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엄마에게 소홀하지 않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아내가 죽은 날이면 직접 음식을 마련하고 제사도 지내고…. 이제는 팔자라고 생각하죠. 운명을 받아들이고 내가 짊어져야지 누구에게 건네줄 순 없잖아요. 남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죠."

아내를 잃은 지 3년. 남씨는 요즘 생계를 꾸려 가랴, 아이들을 챙기랴, '홀아비'로 지내는 시간들이 무척이나 바쁘다고 한다. 그럴수록 아내의 빈자리가 더 커지기 마련이다.


한동안 남씨도 아내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 했다. 아내의 비보를 전해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아내의 죽음은 풀리지 않는 의문부호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a 고 박춘희씨의 남편과 자녀들이 절을 하고 있다.

고 박춘희씨의 남편과 자녀들이 절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아내의 죽음이 알려지자마자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경찰의 말을 빌어 박씨의 사인을 '자살'로 규정지었다. 남편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자 사건이 발생한 지 9개월만에 미국 현지 경찰이 '사고사'라는 결론을 내리기는 했지만, 죽음을 둘러싼 숱한 의혹은 하나도 해소되지 않았다.


남씨는 아내의 죽음이 미궁으로 빠진 이유를 첫째는 미국 현지 경찰의 무성의한 수사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한국 정부의 무책임한 사건 대응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외교통상부와 현지 공관은 당시 남씨에게 "미국 경찰이 수사를 한 이상 현지 경찰의 수사를 믿어야 한다"는 대답만을 할 뿐이었다. 그럴수록 남씨의 마음만 답답했다. 법적인 대응을 위해 미국을 여러차례 찾으며 변호사를 선임하기위해 뛰어다녔지만 남씨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지금까지 저의 결론은 정부는 더이상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당하면 당한 사람만 억울한 거예요. 정부에 의지하다가는 배반감만 더 커질 뿐이죠. 국민의 생명은 각자가 알아서 스스로 지켜야 된다는 게 지금의 저의 마음입니다."

남씨는 "도대체 이 사건을 위해서 정부가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 해 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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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이승욱

남씨는 요즘 미국 현지 변호사를 구하는 일도 거의 포기한 상태이다. 한때 재미교포 변호사와 미국인 변호사를 구하기 위해 미국을 찾기도 했지만 이젠 아이들을 키우는 것만도 그에게 힘든 일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아내가 생각날 때면 외교통상부로 탄원서를 보내긴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 대한 정부의 답변은 전혀 없다고 한다.

아내의 죽음과 진실을 밝히기 위한 기간 동안, 평생 그림만 그리며 살아 왔던 남씨에게도 변화는 많았다. 특히 미국이라는 나라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관심과 고민이 더욱 깊어졌다.

"지난번 미군 장갑차에 여중생들이 죽었을 때 사건의 본질이 왜곡되는 것을 지켜봤잖아요. 잘못을 시인했으면 처벌을 해야 하는데, 그리고 그게 국민들의 호응을 받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부에서 '반미'를 주장한다고 몰아부쳤잖아요. 정말 우리의 국익이 무엇인지,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죠."

남씨와 가족은 대구를 출발한지 3시간 정도가 지나 아내와 엄마가 잠들어 있는 경북 영덕군 병곡면 한 야산에 도착했다. 맑은 날이면 멀리 동해바다까지 내다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박씨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엔 남씨의 지인이 선물했다는 아내 박씨의 두상(頭像)이 묘지를 지키고 있었다. 그 옆으로 '함양 박씨 춘희 지묘'라고 새겨진 묘비가 눈에 띄었다. 거기엔 남씨가 아내의 죽음을 애닳아 하는 '사모곡'의 글귀가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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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이승욱

불러도 불러도 대답이 없는 나의 아내여

2000년 8월 6일 먼 천국으로
당신을 보내야 하는 비보를 받고
하늘만큼 사랑했던 당신의 자식과 남편은
숨이 멎듯 웃음을 잃고 슬퍼했어요.
이젠 당신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내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럽다오.
그리운 아내여!
살아생전 옷 한벌 변변히 입히지 못하고,
고이 입힌 수의를 고르다가
설움에 북받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여! 고이 고이 잠드소서.
당신이 남긴 귀여운 아이들은 눈물로 세수를 시키며 보살피리라.
또 눈물이 나는구려.
부디부디 천국에 임하소서.

- 2000년 8월 13일 새벽. 당신의 남편이.


아내의 묘소 주변에 무성히 자란 잡초를 정리하며 남씨는 죽은 아내에게 다시 한 번 다짐한다고 한다.

"다짐이요? 아내와 나의 바람을 이제는 저 혼자서라도 지켜내는 거죠. 우리에겐 현정이랑 범송이를 잘 키우는 게 목표였으니깐 아내를 위해서라도 그 약속을 지켜야죠. 지금은 아내가 죽었지만 앞으로는 아내가 살아있는 것만큼 아이들을 잘 키울 겁니다."

하지만 아직 남씨는 아내가 죽은 진실을 밝히는 의무도 잊지 않았다. 요즘 그는 지난 3년간에 걸친 '싸움'의 모든 자료를 꼼꼼히 정리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잠시 멈추지만, 언젠가는 그 죽음의 진상을 밝히겠다는 다짐을 새기면서….

"언젠가 아이들에게 엄마의 죽음이 무엇 때문인지 알려주고 싶어요. 아버지의 힘이 부족해 모든 것을 밝혀내지 못했지만, 미국도 한국정부도 외면했던 엄마의 죽음이 무엇인지 아이들에게 전해줄 겁니다. 대를 물려서라도 그 진실은 꼭 밝혀 낼 겁니다."

먼 이국에서 벌어진 또 다른 의문의 죽음
[인터뷰] 고 이경운씨 사건... 진실을 밝히는 아버지

▲ 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고 이경운씨의 아버지 이영호씨
"경운이 사인 밝히고 관련자 책임 물을 겁니다. 하루 빨리 진실을 밝혀 아들의 장례를 치러주고 싶습니다."

고 박춘희씨 사망사건이 발생할 무렵 영국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지난 2000년 9월 29일 영국 유학생인 고 이경운(당시 17세)씨 사망사건이 그것이다.

당시 교통사고로 처리된 아들의 죽음에 의혹을 제기했던 이씨의 아버지 이영호씨는 아직도 영국에 체류한 채 죽음의 진실을 규명하려 애쓰고 있다. 오는 9월 3주기를 맞는 이경운 씨 사건의 진실을 되돌아보고, 아버지 이씨의 근황을 들어보기 위해 최근 그와 이메일 인터뷰를 가졌다.

다음은 이영호씨와 인터뷰 요지이다. (자세한 사건 내용은 고 이경운 추모사이트 www.leekyungwoon.com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 아드님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해오셨는데... 요즘 근황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진실 규명을 위해 이리저리 바쁘게 일하고 있습니다. 경운이 사건을 뒤에서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있는 인권단체 NCRM과 임란 칸 변호사와 막바지 싸움을 위해 분투하고 있어요. 생활이야 스페인에서 모든 것을 접은 상태이기 때문에 몇몇 고마운 유학생들의 도움으로 힙겹게 생활하고 있답니다."

- 지금까지 진실규명을 통해서도 풀리지 않는 아드님 사건의 의문점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의문 투성이지만 그 중 가장 풀리지 않는 의문은 경운이 시신을 10달 동안 아무런 이유도 없이 보여주지 않았던 겁니다. 또 경운이가 죽을 때 한국여권을 소지하고 있어 신원확인을 두 시간만에 했다면서도, 스페인에 있는 유가족에게는 3일 동안 아들의 사고를 알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또 교통사고가 난 지점이라고 주장하던 영국 경찰이 유가족이 도착한 후 2주만에 그것도 허위 장소로 데려갔던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비춰 경운이 사건은 단순 교통사고가 아닌 다른 사유가 있는 영국 공권력이 개입된 은폐조작이 있었다고 봅니다."

이씨는 이외에도 △사망일자가 경찰과 병원이 각기 다른 게 기재돼 있는 점 △부검 기록서 내용들이 사실과 다른 점 △교통사고 차량 조회 결과 존재하지 않는 차량이라는 점 △2차 부검 당시 유가족 입회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고집한 점 등 10여 개 이상의 의혹을 제기했다.

- 지난해부터 현지 칸 변호사 등과 함께 법적인 절차를 거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진척사항은 있는지요?
"이번 사건의 초동 수사를 맡았던 캔터베리 경찰서의 서장부터 말단 경찰 모두에게 직무유기, 제네바 국제협약 위반과 제도적인 인종차별이라는 범법행위로 형사 고발을 한 상태이고, 현재까지 1차 부검 하자의 결정적인 증거확보를 위해 법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 먼 타국에서 의문의 죽음을 풀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텐데….
"물론 생업을 3년전에 포기한 상태로 외국에서 버티는 것이 경제적으로 가장 힘든 상황입니다. 특히 경운이는 스페인에서 태어났지만 엄연히 한국국적을 가진 한국아이였는데 주영 대사관에서 나 몰라라 하는 식은 정말 참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몇몇 방송에서 경운이 사건을 취재하고 보도했는데 그 때마다 대사관의 철면피 같은 거짓말은 죽은 경운이를 한번 더 죽이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 정부측 관계자의 의견을 보니 사건초기부터 법적인 절차를 거치라고 충고했지만 유족들이 듣지 않아 진실규명이 더 어려워졌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만약에 대사관측에서 법적인 절차를 충고했다면 어떤 법적인 절차를 말했는지 되묻고 싶군요. 변호사 선임이나 소개조차 해주지 못하는 주영 대사관의 뻔뻔스러움에 그냥 쓴 웃음만 나옵니다."

- 앞으로 계획은 무엇 인지요?
"경운이의 사인을 밝히고 관련자들을 상대로 법적인 책임을 물어야지요.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사건 수습을 하고 경운이의 장례식을 치러 주는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이미 경운이 사건은 한 유학생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영국 내에서 소수민족의 인권유린 차원까지 갔습니다. 현재 경운이와 유가족이 처절하게 싸우는 이유는 다시는 이런 일이 대한민국 국민에게 발생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며, 이런 힘든 투쟁을 통하여 한국인의 자긍심과 자존심이 조금이나마 회복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 이승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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