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재미

순천청소년축제 '2003동천 벽화 함께 그리기'

등록 2003.08.14 02:50수정 2003.08.14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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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003동천 벽화 그리기

2003동천 벽화 그리기 ⓒ 안준철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자기 만족과 자기 행복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과 남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 삶을 계획할 줄 아는 사람. 물론 이 두 가지 유형의 삶 사이에는 무수한 조합이 가능하겠지요.

이 중에서 어떤 유형의 삶이 더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습니다. 성서의 가르침이나 교과서적인 지식으로만 보자면 말입니다. 문제는 현실이지요. 보통의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체감하는 현실의 삶 속에서도 남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재미가 쏠쏠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한 채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일 것입니다. 성적만능의 획일적인 입시위주 교육 체제에서는 개인의 행복에 대한 실험은 금물이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바로 교육의 실패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지금 순천 동천에는 섭씨 30도가 웃도는 무더위도 아랑곳없이 작년에 이어 벽화 그리기 작업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이나 명예심이 아닌, 얼굴 모르는 누군가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 무더운 여름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루 평균 50여 명의 학생과 교사, 그리고 시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2003순천 동천 벽화 함께 그리기 행사'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동천을 지나는 얼굴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흘린 땀의 결실이 결국에는 부메랑이 되어 자신의 기쁨과 행복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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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동천 벽화 그리기 ⓒ 안준철

이런 역설적인 생의 이치를 고된 작업 속에서 체득하게 된 사람과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은 행복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서 공공의 이익을 위한 존재로서의 자기 가치를 발견하거나 남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재미를 터득한 학생이라면 장차 자신의 출세와 안일만을 위한 재미없는 인생을 계획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난 8월 2일부터 시작한 동천 벽화 그리기 행사는 올해로 5회를 맞이한 순천청소년축제 기획행사 중 하나입니다. 순천시내 10개 중·고등학교 학생 3천여 명이 미술시간에 제작한 얼굴 테라코타 부조로 강변로 벽면에 길이 130m, 높이 2m 규모의 대형 벽화를 제작하여 삭막한 도시의 음습한 콘크리트 벽면을 아름다운 예술공간으로 바꿔놓고 있는 것입니다.


순천청소년축제 홈페이지(www.teenfestival.com)에는 동천 벽화 그리기에 대한 구체적인 일정과 그날 그날의 작업 상황들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홈페이지에 올린 글들을 보면 이런 작업들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일요일입니다.
주말이어서인지 다른 날보다 동천 조깅로를 지나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벽화 그리기'는 오늘도 계속되었습니다. 벽화를 시작한 지 오늘로 아흐레 째, 모두들 지치고 힘들 텐데요.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오후 1시 30분쯤 되면 기획단이랑 자원봉사 학생들이 한 명 두 명씩 모이는 것이 놀랍더군요.


일반계 고등학교가 대부분 내일(11일)부터 보충·자율학습을 다시 시작합니다. 오후 6시경에 자율학습이 끝나니, 학교에 사정 얘기를 하지 않으면 벽화작업에 참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 큰비도 오지 않았고 모두들 열심히 일하여 작업 진척은 빠른 편이지만
마무리 작업이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잠시 우울했던 것은 '자율학습'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자율'인데도 학교에 사정 얘기를 해야하고, 그렇게 하고서도 벽화작업에 참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마음이 쓸쓸했습니다. 진리를 배우고 가르치는 학교에서 언제까지 이런 언어의 모순을 허용해야 하는지.

그런가 하면 이런 글도 있었습니다.

무슨 일을 이렇게 여러 날 동안 최선을 다해 본 것이 얼마나 오랜만인가요. 뒷정리까지 마치고 나면 등줄기는 땀으로 흠뻑 적셔지지만 기분은 최고입니다. 오늘로 열 하루 째. 처음 삭막한 콘크리트 벽면을 대할 땐 아득하기만 하더니 많은 이의 땀과 정성으로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입니다.

a 2003동천 벽화그리기

2003동천 벽화그리기 ⓒ 안준철

순천 청소년축제위원회(상임대표 강경순)에 따르면 벽화가 완성되는 18일 오후 6시에 교사, 학생, 시민들과 함께 벽화 완성을 자축하는 축하행사를 가질 예정이며, 벽화제작 기획단계에서 제작과정, 에피소드, 작품완성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담은 동영상 다큐멘타리를 상영한다고 합니다.

저도 이날 축하행사에 참석할 생각이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벽화 그리기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벽화 완성의 기쁨과 보람을 같은 질감으로 함께 나누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해산의 고통을 지불하고 어린 생명을 품에 안은 산모와 그것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의 기쁨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큰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a 2003동천 벽화그리기

2003동천 벽화그리기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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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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