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앞 그 점방엔 잡초만 무성하더라

초등학교 앞 가게문이 닫힌 뒤 점방 앞을 지나는 이 아무도 없어

등록 2003.08.22 18:16수정 2003.08.24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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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점방. 점방에서 약도 팔았습니다. 배아픈 약 달라고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담배간판만 온전합니다. 시골을 가도 막걸리 한잔을 할 수 없습니다. 멀리서 사가야 하는 실정입니다.
그 때 그 점방. 점방에서 약도 팔았습니다. 배아픈 약 달라고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담배간판만 온전합니다. 시골을 가도 막걸리 한잔을 할 수 없습니다. 멀리서 사가야 하는 실정입니다.김규환
학교 앞 점방에서는 달짝지근한 추억을 팔았다. 등하교 때 아이들이 한꺼번에 몰려 줄을 서 있었다. 주인 어른 내외와 자녀들도 모두 나와 배급하듯 물건을 판다. 서로 먼저 사려고 새치기하는 건 이 때 배웠다. 대신 사달라고 부탁하면 이르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름표, 연필, 공책, 책받침, 콤파스, 지우개, 칼, 도화지, 색종이, 가위… 후딱 사서 달랑달랑 가방을 흔들며 학교로 집으로 사라지는 아이들. 집에 가면서 '뽀빠이' 한 가마니 사서 두 줌에 입에 가득 털어 넣고 야금야금 씹어대는 꼬마들.

길바닥에 주저앉아 질경이 줄기 뽑아 별사탕 따먹기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퍼질러 앉아 있던 아이들이 무척 많았다. 곰팡이 가득한 학교 빵보다 백 배나 맛있던 단팥빵과 반달빵은 형들이 명절 때 한 번 다녀가면 몇 개 사먹을 수 있었다. 무얼 그리 섞었는지 음료수 병에는 단맛 가득했다.

학생수도 꽤나 됐다. 250명 가량이나 되었으니 대여섯 평에 빼곡이 찬 물건은 큰 차가 하나 와서 가득 채워주고 가면 없는 게 없었다. 술과 음료수는 바깥에 나와 있는 경우와 뒷 창고에 쌓여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하드'를 팔았다.

72년 이후로 선거 때마다 벽보가 이자리에 붙었습니다. 박정희, 김대중, 정래혁, 문형태, 고재청, 구용상, 홍기훈 얼굴이 여기에 모두 붙었습니다. 정보센터 노릇을 톡톡히 해냈죠.
72년 이후로 선거 때마다 벽보가 이자리에 붙었습니다. 박정희, 김대중, 정래혁, 문형태, 고재청, 구용상, 홍기훈 얼굴이 여기에 모두 붙었습니다. 정보센터 노릇을 톡톡히 해냈죠.김규환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마을마다 구판장이라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처럼 전업(專業)으로 하지는 않았다. 구판장은 집집마다 한 달씩 돌아가며 지키므로 문을 걸어 잠그고 밭에 가는 수가 많았다. 가끔 그곳에는 막걸리와 라면, 음료수에 신학기 때만 이름표를 갖다 놓는 정도였다.

그러니 웬만한 물건은 다섯 마을 한가운데에 있던 학교 앞 점방을 이용했다. 담장을 끼고 물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던 새터 점방은 고루 구색을 갖췄다. 당시 필요했던 것은 거의 있었다. 가장 오래 전에 생기고 몇 년 전까지도 명맥을 유지하며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줬던 점방이다.


학교를 파할 때나 아침 정신없는 틈을 보아 우린 작전에 들어간다.

"야, 먼저 들어가라."
"니가 들어가 있어."
"말 들어 임마. 해섭아 너도 들어가서 아무 거나 달라고 해봐."


이렇게 실랑이를 벌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두 아이가 들어가서 엉뚱한 물건을 달라고 하면 주인은 어둠침침한 골방으로 들어가 물건을 꺼내온다.

그 사이 나머지 아이들이 살금살금 접근하여 슬며시 아무도 모르게 도둑질을 해서 집으로 튄다. 정말이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먼저 들어갔던 아이들은 그곳에 남아 쓸모 없는 물건을 하릴없이 사는 것이다. 주인은 이 두 아이 외에 다른 놈들이 왔다 갔다는 사실마저 눈치를 채지 못한다.

나머지가 다 합류하면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며 집으로 돌아오곤 하니 다 철 없는 아이들의 짓이었다.

멍석을 깔고 "모야, 윷이야!"를 외쳤던 점방의 마당
멍석을 깔고 "모야, 윷이야!"를 외쳤던 점방의 마당김규환
이름표를 훔친 사건은 더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어린 녀석들이 미리 한꺼번에 한 뭉텅이를 '꿈치고' 다섯 개씩 나눠주고 현금으로 바꿔 오게 하는 것이다.

"아짐, 이 이름표 필요 없으니까 다른 걸로 바꿔 주세요."
"그래. 뭘로 줄까?"
"아무 거나 주세요. 건빵을 주시든지…."
"뽀빠이로 줄까?"
"예."

이러기를 하루에 여섯 놈이 두 번 세 번을 들락거렸으니 점방 주인 처지에서 이상하고 수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 번 째 간 형근이가 그만 붙들리고 말았다. 전모가 들통나 우린 학교에 끌려가 선생님께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건전하기로 소문난 아이들이 이렇게 놀았으니 또래가 부잡(浮雜)하면 얼마나 못된 짓을 했을까?

등나무만 무성하고...
등나무만 무성하고...김규환
어른들께는 담배, 막걸리와 소주 대병을 팔았다. 점방에서는 당시 업계 1위를 달리던 삼학소주(三鶴燒酒)를 팔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삼학소주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대통령 선거와 연루돼 세무조사 때문에 일시에 무너졌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종이 딱지만 바뀌어 다른 소주를 사러 갔어도 그걸 공식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낮과 밤에는 어른들이 진을 치고 살았다. 소위 남편이라는 아버지들은 "또 점방 가느냐"는 아주머니들과 어머니의 걱정 반 역정 어린 소리를 뒤로 하고 주머니에 일 전(錢) 없이도 "물꼬 보러 간다"는 소리를 남기고 점방으로 직행을 한다. 그러기를 수십 날을 지속했다. 집 팔고 논 팔아 집안 살림 거덜내고 나 몰라라 했다.

김치 쪼가리에 막걸리 한 사발 마신다. 뚜껑 막아 나중에 다시 찾아 마저 먹고 간다. 대낮부터 이어진 윷판이 날이 어두워지고 날씨가 차가워지면 골방으로 들어가 화투짝과 씨름을 한다. 1년 중 조용한 날은 명절 이틀에 조상 제사 때 뿐이었다.

한참을 문 밖에서 서성이다 가까스로 다가가서는,

"아부지~."
"응, 누구냐?"
"아부지 규환이라우. 얼른 집으로 가십시다."
"니 어머니한테 밥 묵었다고 해라."
"그게 아니고라~."
"얼른 가잔께요~."
"아짐, 과자 하나 주싯쇼."
"아나. 이거 먹고 먼저 가있거라. 곧장 따라 갈 것이구만."
"엄니가 안된다고 했어라우~. 같이 안 올 거면 오지 말라고 했는디요."
"긍께 가고 있어. 아부지 금방 따라 간다. 어여~."

아버지를 이길 수는 없었다. 요지부동 나설 채비를 하지 않으시는 아버지를 비롯한 무수한 아저씨들.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은 이때 나에게 최고조에 이르렀다. 꾹 참고 집으로 가서 어머니께 지천들을 생각을 하면 집으로 갈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랜 동안 점방 앞에서 머뭇거리다 집으로 향한다. 귀뚜라미 소리, 개구리 소리마저 아름답지 않았다.

곧 쓰러질지도 모릅니다. 비단 여기 뿐이겠습니까? 마을마다 주막 하나 쯤 있어야 어울려 사는 재미도 있는데...시골 가면 어찌 먹고 살지 걱정이 됩니다.
곧 쓰러질지도 모릅니다. 비단 여기 뿐이겠습니까? 마을마다 주막 하나 쯤 있어야 어울려 사는 재미도 있는데...시골 가면 어찌 먹고 살지 걱정이 됩니다.김규환
누구든 그곳을 들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끌어당기는 힘을 지닌 그때 그 점방엔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밥도 점방 주인이 먹는 것에 숟가락 더 놓아 거기서 해결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학교가 생긴 뒤로 들어선 점방은 골짜기 사람들과 애환을 같이 했다. 결국 그 점방 주인 아저씨가 10여 년 전에 돌아가시고 그 뒤론 아주머니가 홀로 지키셨다. 기력이 많이 약해진 뒤론 아들이 부인과 가게를 이어갔다.

송단마을에 50여 가구, 강례에 40여 가구, 평지에 20여 가구, 방촌에 예닐곱 가구, 양지에 60여 가구가 살았던 70년대 중반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집집마다 3대 혹은 4대까지 이어져 내려와 가구 당 식구수가 일곱에서 열 명 정도가 있었으니 그때만큼 성황을 누린 때도 없을 것이다.

지금 그곳은 문을 닫았다. 3년 전쯤 되었다고 한다. 이젠 그 앞으로 사람이 다니질 않는다. 그 철부지 아이들은 다 서울로 광주로 떠나고 집안을 팽개친 어른들은 벌써 유명을 달리해 떠난 이가 더 많다. 주인마저 그들을 기다리기 힘겨웠을까?

나에겐 문화유적이요, 박물관이자, 백화점이었는데. 어른들의 놀이터요, 사랑방이 세월의 몹쓸 약을 먹고 이젠 지쳐 주인마저 보이지 않는다. 담배 판다는 간판만 성하게 남아 있고 모두 녹슬고 무너지기 직전이다. 마당엔 잡초만 무성하다. 마지막 남은 과자 몇 봉지를 먹고 한동안 버텼던 쥐들도 이제는 이곳을 찾지 않을 것이다.

"여보세요? 아무도 없소?"
"막걸리 받으러 왔는데요."

속으로 몇 번을 불러 봤지만 인기척이 없다. 뭔가 나올 것 같은 적막감에 나는 안쪽을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행정구역으로 전남 화순군 북면 방리에 위치한 예전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북면동국민학교'였다. 분교가 되더니 폐교가 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그 앞에 있던 점방 마저 문을 닫았으니 이제 두 집이나 살려나.

이제 나는 슈퍼마켓에 가서 더 많은 걸 사 올 수 있다. 하지만 그 맛은 나지 않는다. 반기지 않는 주인은 영 맘에 안 든다. 단지 팔고 사는 거래만 행해지는 것이다.

녹슬어 찌그러 지고 있는 지붕. 그 전에 누구라도 인수했으면 좋으련만. 누구 새 주인 없습니까?
녹슬어 찌그러 지고 있는 지붕. 그 전에 누구라도 인수했으면 좋으련만. 누구 새 주인 없습니까?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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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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