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종기 모여 앉아 달콤한 텔레비전의 마력에 빠졌던 어릴 적 추억김용철
그걸 지켜보던 아이들은 들떴다. 오늘부터는 저녁밥 먹고 날마다 TV를 보러 가면 될 것이라는 기대에 한껏 부풀어올랐다. 주인에게 여쭙지도 않고 친구들끼리 미리 약속을 잡았다.
“야, 이따가 밥 묵고 회관 앞으로 모여라.”
“보러 오게 할랑가 몰라.”
“글도 우리 할아버지댁인께 짹까는 보여줄 것이여.”
아니나 다를까 저녁밥을 먹고 있어야 할 또래 아이들이 회관 앞에 모여 있었다. 집안 할아버지 댁에 이르러 잠시 멈칫한다. TV가 켜진 방 앞이 밖에서 보기에 번갯불이 번쩍번쩍하다가 이내 컴컴하다. 번쩍번쩍, 어둠 컴컴한 장면이 연이은 듯 방안은 환했다 어두웠다를 반복한다. 전기세 아끼려고 전등을 다 꺼놓고 보기 때문이다.
“야, 얼렁 들어가야”
“니가 먼저 들어가!”
“아따, 그럼 가위 바위 보 하자.”
“됐어야. 내가 먼저 들어갈게.”
참다 못하고 내가 먼저 들어가기로 했다. 다가가서 헛기침 한번하고는 “계시오?”하니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린다.
“누구여?”
“예, 거시기 테레비 좀 볼라고 왔구만이라우.”
“그려?”
“진지는 잡수셨는그라우?”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주인의 허가도 떨어지기 전에 거무튀튀한 얼굴의 일단의 아이들이 마루에 턱 올라섰다. 씻지 않은 발을 걸레에 한 번씩 대충 서서 닦고는 방으로 쏘옥 기어 들어간다.
마침 나시찬 주연의 <전우(戰友)>를 하고 있었다. 주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TV보느라 여념이 없다. 초롱초롱한 아이들이 행감을 치고 꼿꼿이 앉아 있다. 주인이 먹던 옥수수는 바구니째 TV 위에 올려져 있다.
“소대장님~어억!”
“김일병~김일병! 엎드려!”
“아악~”
격전의 순간 국군 아저씨가 수류탄을 꺼내 안전핀을 뽑고 적진을 향해 휙 던진다. “펑!”하며 주위의 나무와 땅, 적병 대여섯 명이 하늘로 솟구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와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미 그 방은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 차지가 되어버렸다.
“와~.”
“짝! 짝! 짝!”
“대단하다. 저렁께 우리나라가 살아 있제.”
그렇게 처음 대한 <전우(戰友)>는 마약과 같았다. 밤에 잠자기 전에도 아른거렸다. 꼴 베다 전우 드라마 생각에 손을 베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렇게 우린 이틀을 눈치봐가며 무사히 전우를 지켜봤다. 사흘 째 되던 날은 상황이 달랐다. 주인집에서는 <전우>가 끝날 즈음 온갖 심술을 부렸다. 그냥 집으로 가라는 말은 씨알이 먹히지 않기 때문에 몇 가지 묘안을 벌써 짜 놓은 듯싶었다.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날던 파리와 모기도 후두둑 그 자리에 떨어뜨리고 마는 파리약 ‘인피리스’를 아무 데고 마구 뿌렸다. ‘모기가 많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그렇게 되고 만다.
병에든 살충제를 입으로 “후후” “피익~ 픽”. 아이들 머리 위로 수많은 수포가 떨어진다. 아이들은 속수무책 아무 말 못하고 도망치듯 방을 빠져 나온다. 그러니 가슴을 찡하게 했던 전우 노래를 2절까지도 듣지 못하고 쫓겨나고 말았던 것이다.
이튿날부터 조짐이 좋지 않았다. 멀쩡한 TV가 안 나온다고 턱턱 두들기다가 선을 하나 뽑아 버려 전혀 나오지 않게 하고는 아이들을 쫓아냈다.
잔잔한 전주(前奏)가 흐르고 파르르 서양 북이 떨리며 음악이 흘러나오며 연속극이 끝나고 있었다. 1절만을 듣고 나왔으니 내일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