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교, 그리움 가득 품고 폐허 되다

올 추석엔 아이 손잡고 정답던 초등학교를 찾아가 보세요

등록 2003.08.25 13:02수정 2003.08.27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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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문 닫자 밝는 사람이 없어 맨땅이었던 운동장이 풀밭이 되었습니다. 1년에 몇 사람이나 찾아 올까요?
학교를 문 닫자 밝는 사람이 없어 맨땅이었던 운동장이 풀밭이 되었습니다. 1년에 몇 사람이나 찾아 올까요?김규환
까막눈 떠주게 한다니, 땅 기부하고 울력을 하여 학교를 짓던 1960년대 초반


점방을 돌아 좌측으로 돌면 측백나무 향기가 난다. 삼나무가 곳곳에 있고 은행나무 큰 게 하나 있다. 나무 생울타리가 있어 담장이 따로 없는 밭둑이나 다름 없다. 아침마다 침엽수의 진한 향을 맡으며 등교를 한다. 그곳에 내가 학교에 첫발을 디딘 모교가 있다.

1975년 아홉 살 때 15회로 학교 문턱을 밟았으니 1960년이나 다음해에 이 벽지 학교가 세워졌다.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방리 385번지. 몇 명이나 6년이라는 긴 기간 몸을 맡겼는지는 정확하지는 않다.

마을 곳곳에 전흔이 남아 있고 집안 간 상흔이 채 아물지 않아 서로간 앙금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다. 순사가 골목길을 제집 드나들 듯 하였으니 감시의 눈초리도 상당했다. 미국산 밀가루 포대가 마을로 실려 올 때 수제비 띄워 허기를 채우던 험난한 세상살이가 지속되고 있었다.

그 무렵 다섯 마을 중 우리 마을 사람들은 같은 동네에 학교가 생긴다고 하니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이제는 더 이상 낮에는 '국민', 밤에는 '인민'으로 살지 않아도 되는 준 평화기가 지속되었다.

모든 것 다 잊고 자녀들을 배움의 터로 보낼 수 있다는 말에 궁한 땅을 마다 않고 내놓았다. 땅을 국가에서 받아도 시원찮을 판에 그 지역 사람들은 신이 났다. 그렇게 열심이었던 것은 자신이 국문자(國文字) 하나 깨우치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공교육, 신식교육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무척 클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니 너도나도 무상으로 땅을 기부하였던 것이다.

마을도 없는 외딴 곳 작은 벌판 중앙부에 자리 잡은 학교 부지는 총 2200여평 가량 된다. 땅을 내 놓기 힘든 사람들은 노력 봉사를 했다. 마을마다 돌아가며 울력을 나가 교실 두 개를 짓고 관사 하나를 지었다. 학생들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코흘리개들이 벽돌 나르고 모래를 퍼날랐다.


1회는 20여리에 가까운 7km가 넘는 거리에 있는 학교를 걸어서 다니고 있었다. 십 리쯤 아래에 큰 마을 원리(原里)가 있었는데 동기생과 선배들에게 갖은 고초를 당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법하다.

현재 면사무소가 있는 '아산초등학교'로 1년을 다니다 학교가 지어지자 집에서 한달음에 갈 수 있었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는 글자만 선명합니다. 책 읽지 말자는 가을같이 을씨년스럽습니다. 나무 동산에 갇혀 있는 기분이 들더군요.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는 글자만 선명합니다. 책 읽지 말자는 가을같이 을씨년스럽습니다. 나무 동산에 갇혀 있는 기분이 들더군요.김규환
<풍경1> 교문 입구 작은 동산에 소녀 독서상

같은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징검다리를 건너 들판 사이로 난 굽이굽이 신작로를 따라 가면 학교가 있다. 논물 넘친 1km 가는 동안 돌과 논두렁에 올라 물을 피해 가야하는 옹색한 길이다. 그나마 고무신을 신었으니 다행이다.

점방을 지나 학교 앞길이 펼쳐져 있다. 그 길을 따라 농수로가 있다. 60여 미터 가면 교문이다. 3학년까지는 학교로 차 들어갈 일이 없었다. 다섯 계단을 오르면 곧바로 운동장이다. 교문 앞에 무궁화와 향나무 몇 그루에 자연석을 쌓아 만든 동산이 하나 있다.

독서상이 반갑게 맞는다. 하얀 페인트를 해마다 한번은 뒤집어쓰고 청순하고 착하게 다시 태어나는 소녀 독서상. 그 여자아이는 언제나 한 자리에서 앉아 있다. 볕을 가릴 요량으로 예쁜 모자를 하나 눌러 쓰고 편하게 책을 읽는다. 나에겐 '타잔' 스물 두 권을 읽으라는 건지, 이솝우화를 읽어보자는 건지는 모른다.

'그래, 이번에는 꼭 일등을 하고 말 거야!'하는 다짐을 하며 들어섰지만 육남이라는 친구가 있어 졸업할 때까지 단 한번 1등 하는 걸로 족해야 했다.

아름답게 모양을 내서 가꾸신 고영석 교감선생님이 그립습니다. 전지와 모종삽을 한시도 놓지 않으셨거든요. 아랜 국화밭이었는데 그늘에 가려 다 죽고 말았습니다. 시골로 이사를 하면 저라도 해야되는 것 아닌가요?
아름답게 모양을 내서 가꾸신 고영석 교감선생님이 그립습니다. 전지와 모종삽을 한시도 놓지 않으셨거든요. 아랜 국화밭이었는데 그늘에 가려 다 죽고 말았습니다. 시골로 이사를 하면 저라도 해야되는 것 아닌가요?김규환
<풍경2> 나무와 화단의 꽃밭

5학년 때 담임을 맡았던 분이 교감으로 영전하여 가시고 새로운 교감 선생님이 오셨다. 담임 선생님도 더 젊은 분으로 바뀌었다. 내리 2년을 담임을 맡으셨던 정광명 선생님과는 정이 깊게 들었다.

깡마른 체구에 눈에 쏙 들어간 교감 선생님은 깔끔한 분이셨다. 부지런하기도 하셨다. 교실 앞 화단마다 가위를 들고 다니며 전지를 해주고 그 아래엔 어디서 구해 오셨는지 국화를 색깔 별로 한 가득 심어주셨다. 250여 평의 고추, 상추, 옥수수나 심던 밭은 꽃밭으로 바뀌어 두둑마다 작은 팻말이 세워졌다.

교감 선생님 손에는 언제나 모종삽이 들려 있었고 당시 아이들이 변소라 부르던 화장실도 '꽃밭'이라는 듣기 좋은 이름으로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다. 학교 들어가는 길에서부터 운동장 주변과 화단, 밭, 뒤뜰과 관사 근처 등 빈땅은 꽃밭이 되었다. 계절별로 꽃을 볼 수 있도록 가꾸셨다. 왜 나는 교감 선생님을 따라다니지 못했는지 아쉬움만 남는다.

전면의 이승복 양력과 이름판이 너덜너덜 떨어져 있습니다. 2학년 때 만들었는데 그 때 보니 시공을 엉망으로 해서 몇 번 손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한편으론 세월이 약이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전면의 이승복 양력과 이름판이 너덜너덜 떨어져 있습니다. 2학년 때 만들었는데 그 때 보니 시공을 엉망으로 해서 몇 번 손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한편으론 세월이 약이라는 생각도 들더군요.김규환
<풍경3> 반공소년 이승복과 웅변대회, 그리고 효자 정재수 동상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며 강원도 평창 산골에서 죽었다던 이승복 동상이 운동장 오른쪽에 들어와 자리잡았다. 그 뒤론 어김없이 웅변대회가 1년에 두 번 있었다.

'~이 연사 소리 높여 외칩니다'며 손을 하나씩 번쩍 펼쳐 보이거나 탁자를 힘껏 내리치는 아이들은 원고 작성에 보름 남짓 허비했다. 최우수상을 탔던 아이들은 학교 대표로 화순군까지 가서 자장면을 맛보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그 무렵 포스터 그리고 표어를 짓게 한다. 포스터는 대동소이하다. 적의 탱크를 격파하는 장면과 뿔 달린 인간을 그렸다. '무찌르자 김일성!' '타도하자 북괴도당!' '한순간의 방심이 금수강산 적화된다' 등 섬뜩한 구호가 대중을 이뤘다.

얼마 후 눈길 산 넘어 큰댁에 가다 죽은 정재수 동상이 세워졌다. 죽어서 효자가 된 정재수에 대해서도 아이들에게 웅변대회 한 번과 글짓기를 시켰으니 그때 글 솜씨가 늘었는지도 모른다. 초롱초롱 하고 귀엽기 짝이 없는 아이가 어쩌다 그런 사고를 당하였는지 모른다. 하여튼 학년을 진급하고도 빠짐 없이 찾아오는 연례 행사가 되어 학생들의 효심을 지독히도 자극했다.

효자 정재수상 까지가 마지막입니다. 거리가 멀어서인지 호랑이, 사자, 코끼리 동상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교문이 계단으로 되어 힘들어서 인지도 모르죠.
효자 정재수상 까지가 마지막입니다. 거리가 멀어서인지 호랑이, 사자, 코끼리 동상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교문이 계단으로 되어 힘들어서 인지도 모르죠.김규환
<풍경4> 도르래 달린 우물

여름엔 교실 바닥을 물걸레질을 하여 닦는다. 헤진 옷을 기워서 도톰하게 만든 나일론 걸레를 하나씩 들고 우물가로 간다. 주전자에 물을 담으러 당번은 하루 2번은 가야 했다. 물을 퍼올리다보면 낭떠러지 우물 안에 둥둥 떠 있는 김치 항아리가 철퍼덕거린다.

점심 때는 허기진 아이들의 집합소이기도 했다. 누런 콩이 박힌 미국 빵을 절반만 허겁지겁 떼어먹고 두레박을 건지러 쏜살같이 달려간다. 목이 탈 때 물을 한 바가지 벌컥벌컥 먹어주면 배가 더 부르기 때문이다.

'도르륵 또르륵~' 도르래 줄을 돌리면 우물 속에서 시원한 물 한 동이 가득 따라 올라온다. 통째 들고 들이마신다. 빵이 곧 푹 퍼지고 물 한 됫박을 먹었으니 2시간은 참을 수 있다. 나머지 반쪽은 동생이나 할머니를 갖다 드리는 아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조그만 집을 지어 빗물이 스며들지 않게 했습니다. 처음엔 두레박 줄이 늘어서 있었는데 김치통도 같이 따라 올라왔지요.도르래를 달고 나중엔 덮개를 덮고 모터로 끌어올려 수도꼭지를 달았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의 꿈이 닫혔던 거죠.
조그만 집을 지어 빗물이 스며들지 않게 했습니다. 처음엔 두레박 줄이 늘어서 있었는데 김치통도 같이 따라 올라왔지요.도르래를 달고 나중엔 덮개를 덮고 모터로 끌어올려 수도꼭지를 달았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의 꿈이 닫혔던 거죠.김규환
<풍경5> 교실

교무실까지 합친 교실 수는 8개다. 동편에 제일 큰 교실이 하나 단독으로 서 있을 뿐 나머지는 1자로 2개 혹은 3개가 연결돼 있다.

학생 수가 제일 많았을 때는 2년 후배들이 한꺼번에 들어왔을 때다. 우리 때는 아홉 살, 열 살 짜리가 1/3 정도 되고 간혹 여섯, 일곱 먹은 아이들이 일찍 학교에 들어왔지만 두어 달 버티다 적응을 못하고 학년을 꿇어 다음해 또는 두 해 뒤에 다시 들어오곤 했다.

하지만 보릿고개가 끝나갈 무렵인 77년에는 '학교가 없어질지 모른다'는 선생님들의 성화와 설득에 집집마다 여섯, 일곱 살에 학교를 보냈다. 그네들은 한 학년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2개 학급이 되었다.

학생수가 워낙 적다보니 교육청에서 직접 내려와 학력 평가시험을 치르면 5학년 때 두 번, 6학년 때 한 번 등 세 번을 공부 좀 한다던 아이들은 후배들 사이에 끼어 시험을 대신 치르기도 했다.

1학년 때 48명이었던 우리 동기생들은 6학년 졸업을 32명이 했다. 부모 따라 해마다 서울로 떠난 아이들이 늘어만 갔다. 한때 우리 집도 그런 대열에 합류할 뻔하다가 아버지께서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그냥 눌러 앉고만 경우에 해당한다.

30명 조금 넘는 아이들이 6년 동안 한 교실에서 수업했다. 급장과 당번이 학년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교실. 급장은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행사했다. 아이들이 가져온 만화책을 빼앗고 여자아이들 고무줄을 수도 없이 끊어댔다.

아이들 매로 두들겨 패는 건 예삿일이고 칠판에 이름을 적어 놓으면 말 한마디 못하고 선생님께 흠씬 두들겨 맞았다. 급장이 공부 잘하고 덩치도 크니 반대할 수도 없었다.

한번 급장은 영원한 급장일 줄 알았던 5학년 어느 날 조회시간에 선생님께서는 한 달씩 돌아가며 반장을 뽑는다고 했다. 아이들은 그 억압에서 해방되었다.

하지만 끝까지 집에 일찍 가는 걸 방해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남녀 둘 중 한 명이 공부를 못하면 짝꿍도 2시간 가량을 학교에 남아 그 아이가 잘 한다는 걸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집으로 가야 했다. 그러니 짝꿍 잘 만나는 것도 행운이었다. 선생님은 이 점에서는 선택권한을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함께 보낸 기나긴 시간이 말해주듯 모든 아이들의 숨소리, 체취, 혼식 정도, 반찬의 종류, 숟가락 생김새, 집안 살림살이의 규모를 속속들이 알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에 가서 '똑똑' 두들겨 노크를 하면 '헴헴' 또는 '흠!' 하는 소리만 듣고도 누가 일을 보는 줄을 알 정도였다. 우린 또 다시 같은 통학버스를 타고 중학교 3년을 내리 함께 다녔다.

빨간 녹이 슬어있는 미끄럼틀. 여름엔 엉덩이와 다리가 무척 뜨겁도록 올라가 탔습니다. 이젠 올라가면 무너질 지도 모르겠더군요.
빨간 녹이 슬어있는 미끄럼틀. 여름엔 엉덩이와 다리가 무척 뜨겁도록 올라가 탔습니다. 이젠 올라가면 무너질 지도 모르겠더군요.김규환
<풍경6> 운동장과 놀이기구

운동장은 긴 쪽이 직선 거리로 100m가 채 안 된다. 80m 정도 되었으니 100m 달리기를 할 때는 트랙을 한 바퀴 반을 돌면서 진행하기도 하고 대각선으로 그려서 하기도 했다.

모래를 듬뿍 부었지만 겨울엔 질퍽거리기 일쑤였고 여름엔 물이 잘 빠지지 않아 곤혹스럽게 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고무 축구공을 들고 나가 수업 시작종 울릴 때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놀았다. 수업이 시작된 지 꽤 오래지만 헉헉거리며 흐르는 땀을 식히느라 뿔 책받침을 마구 부치다가 선생님께 꾸중을 듣는 건 다반사다.

4학년 때 수업을 절반 이상을 빼먹는 선생님을 만났다. 이름을 빗대 아이들은 '오백환짜리 2개'라고 불렸던 선생님께 우린 축구를 배웠다. 덩달아 수업 빼먹기를 즐기던 학생들이 어느날 '선생님, 축구차러 가요'하니 여느 때와는 달리 화를 벌컥 내시며 운동장으로 모이라 한다. 영문을 모르고 축구골대 앞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지휘봉을 휘두르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 이놈들아. 축구를 어떻게 차냐? 공을 차든지 볼을 차면 차지 어떻게 축구를 차느냐 말이다. 모두 엎드려 뻗쳣!" 다섯 대씩 맞고, 운동장 열 바퀴를 돌고, 엎드려 있었다. 종이 울리기만을 기다렸다. 그 뒤로 우린 '축구 차자'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교무실 바로 앞 운동장엔 선생님이 올라가서 훈화를 하시던 구령대가 놓여 있다. 가장자리엔 회전그네, 그네, 철봉, 사다리, 구름다리 등이 종류별로 갖춰져 있었다.

말이 학교지 공부는 다들 관심 없고 운동장에서 놀다 보면 선생님과 소사아저씨가 오셔서, "야 이놈들아~ 집에 가서 부모님 도와드려야지. 맨날 놀기만 할 것이냐? 공부도 좀 하고. 가서 때 좀 벗겨라"하면 그제서야 집으로 간다.

배구장은 있었지만 농구장은 고등학교에 가서야 처음 구경할 수 있었을 뿐이다.

관사입니다. 문종이가 너덜너덜합니다. 거미줄은 걷으면 되지만 을씨년스럽더군요.
관사입니다. 문종이가 너덜너덜합니다. 거미줄은 걷으면 되지만 을씨년스럽더군요.김규환
<풍경7> 관사

교사(校舍) 뒤로 관사가 3채 떨어져 있다. 교장 선생님 따로 교감, 호랑이 선생님 한 집, 연배가 제일 많은 선생님 내외가 한 채를 쓰며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선생님 한 분과 절친하셨다. 동생이 2년을 꿇어 1학년을 세 번 했는데 배 선생님이라는 분이 맡아주셨으니 답례차 점방에 가서 막걸리 한잔 나누다보니 동갑내기라는 사실을 서로 알아차리고 호형호제를 하게 된 것이다.

마침 학교 근처 문전옥답 590평을 산 지 두어 해 지났으므로 첫해는 논 둘러보는 재미로, 둘째 해에는 점방에 간다는 구실로 논에 잠시 들러 막걸리 한잔하는 낙으로 살았다. 술친구마저 사귀니 발길이 잦아 들 수밖에 없었다.

호랑이 선생님은 염소 한 마리, 닭 열 마리를 직접 기르셨는데 방학 때면 아이들에게 가축을 맡기고 댁으로 가신다. 건빵 한 가마를 미리 주면서 아이에게 시키니 그 학생은 친구들에게 인심을 넉넉히 쓰고 같이 가서 풀도 뜯기고 모이도 줬다.

나머지 선생님들은 학교 마을 인근에서 민가를 얻어 자취를 하시거나 살림집을 차렸다. 한달에 두 번이 기본이고 급할 때나 주말마다 광주 집에 들러 가족을 만나고 김치쪼가리를 담아 학교로 돌아오시곤 했다.

위 사진 마루 바로 아래에 있는 멍석. 썩어서 퇴비가 될 모양입니다. 사위질빵이라는 넝쿨이 나서 영역을 만들고 있습니다.
위 사진 마루 바로 아래에 있는 멍석. 썩어서 퇴비가 될 모양입니다. 사위질빵이라는 넝쿨이 나서 영역을 만들고 있습니다.김규환
<풍경8> 학교종

나중에서야 바이메탈 원리를 이용한 벨이 나오고, 더 지나 스피커에서 음악 소리가 울리기 전까지는 학교 종이 '땡땡땡' 울렸다.

소사 아저씨인 순기 아저씨는 착하시고 화 한 번 내지 않는 온화한 성품을 지녔다. 한동안 혼자서 학교 일을 도맡아 했다. 부지런히 일 하다 시간이 되면 6년 동안 두 번 빼고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을 정확히 치셨다. 시작할 땐 '땡땡땡'을 연달아 두 번, 끝날 때는 '땡땡땡' 한 번을 쳐줬다.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시골 적막강산에 종이 울리면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온다. 수업이 시작되었는데도 어기적어기적 기어들어갈 줄 모르는 아이도 있다.

그런데 이 종의 내력이 흥미롭다. 때는 학교가 생기고 2년이 지난 후란다. 백아산의 한 자락이며 헬기와 낙하산이 1953년까지 수도 없이 뜨고 내리던 화순군과 곡성군의 경계인 차일봉(해발 약 590여 미터) 정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화전을 일구러 가셨던 내 아버지.

산비탈에 불을 한번 지르고 괭이로 땅을 파는 순간. '쨍!'하는 쇳소리가 났다. 빨치산 토벌을 위해 국군이 떨어뜨렸던 포탄을 몇 년 지나 찍고 만 것이다. 불발탄이었기 망정이지 내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뻔했다.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겁 없이 15kg이 넘는 긴 포탄을 지게에 묶어 짊어지고 2km 산길을 서둘러 내려왔다. 동네 앞 개울가에서 화약을 낫으로 긁어 파내고 포신에 돌과 흙을 가득 올려 누르고 불을 붙였다.

건너편 논두렁에서 붙인 불이 '쏴~'하며 10m 가량 되는 마을 쪽 개울에 이르렀다. 흠짓 놀라 뒤로 나자빠지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불발탄이었는지라 내부가 말끔히 청소가 되었더란다.

길이가 45cm나 되는 포탄 껍질을 지고 학교에 '종으로 써달라'고 기증해서 생긴 종이다.

선생님들은 다 어디로 가셨을까요? 건강하신지 모르겠습니다. 김현수 선생님과 범병선 선생님이 제일 무서웠습니다. 잘 지내시죠?
선생님들은 다 어디로 가셨을까요? 건강하신지 모르겠습니다. 김현수 선생님과 범병선 선생님이 제일 무서웠습니다. 잘 지내시죠?김규환
<폐교를 거닐며>

5살 먹은 조카 세종이를 데리고 학교에 가봤다. 인근 다섯 마을 문화의 중심이었던 '화순북면동국민학교'가 '송방분교'로 바뀌더니 96년 폐지하기까지 36년을 버텼다. 한 면(面) 당 4개 혹은 5개까지 있었던 초등학교는 이제 한곳 밖에 남아 있지 않다.

형제자매와 친구들에게 글을 깨우쳐 주고 사고의 나래를 맘껏 펼치게 했고 뼈마디를 굵게 해줬던 곳이다.

"작은 아빠, 여기 왜 왔어?"
"그래, 여기가 아빠와 삼촌, 고모들이 다녔던 학교였단다."
"그런데 왜 애기들이 없어요?"
"응, 나도 잘 모르겠다."

운동장은 잡초 밭이다. 화단은 관리하지 않은지 오래다. 향나무는 교실보다 더 높이 웃자라 있을 뿐이다. 기어오르며 타고 놀았던 놀이기구는 아이들 손때가 묻지 않아서인지 녹만 탱탱 슬어 있다. 교실 유리창은 깨진 곳 투성이다. 우물은 폐쇄되었는가 보다. 관사는 굳게 닫히고 멍석만 퇴비로 바뀌고 있다. 학교 종은 누가 떼어갔는지도 모르겠다. 누가 가져 갔을까?

아무도 없는 황량함이 비단 이 터에만 한정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왜 이리 심란할까? 자꾸만 멀어져가는 아름다웠던 시절의 꿈이 그립기만 하다.

현재 이곳은 불미나리즙과 인진 쑥 가공을 하는 친환경농업단체에 임대되어 환경교육장으로 활용이 되고 있다. 하지만 방치상태에 있다. 관리되지 않은 이 곳을 지역문화센터나 작은 수목원으로 가꾸면 어떨까?

향우회가 2년 전 결성되었지만 답보 상태에 있어 모교 출신들의 분발이 요구된다. 학교는 사유물이 아니다. 지역민과 향우에게 돌려져야 마땅하다. 매년 700여만 원의 임대료가 문제가 아니라 누구더러 임대료를 부담하라는 건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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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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