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집을 지어 빗물이 스며들지 않게 했습니다. 처음엔 두레박 줄이 늘어서 있었는데 김치통도 같이 따라 올라왔지요.도르래를 달고 나중엔 덮개를 덮고 모터로 끌어올려 수도꼭지를 달았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의 꿈이 닫혔던 거죠.김규환
<풍경5> 교실
교무실까지 합친 교실 수는 8개다. 동편에 제일 큰 교실이 하나 단독으로 서 있을 뿐 나머지는 1자로 2개 혹은 3개가 연결돼 있다.
학생 수가 제일 많았을 때는 2년 후배들이 한꺼번에 들어왔을 때다. 우리 때는 아홉 살, 열 살 짜리가 1/3 정도 되고 간혹 여섯, 일곱 먹은 아이들이 일찍 학교에 들어왔지만 두어 달 버티다 적응을 못하고 학년을 꿇어 다음해 또는 두 해 뒤에 다시 들어오곤 했다.
하지만 보릿고개가 끝나갈 무렵인 77년에는 '학교가 없어질지 모른다'는 선생님들의 성화와 설득에 집집마다 여섯, 일곱 살에 학교를 보냈다. 그네들은 한 학년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2개 학급이 되었다.
학생수가 워낙 적다보니 교육청에서 직접 내려와 학력 평가시험을 치르면 5학년 때 두 번, 6학년 때 한 번 등 세 번을 공부 좀 한다던 아이들은 후배들 사이에 끼어 시험을 대신 치르기도 했다.
1학년 때 48명이었던 우리 동기생들은 6학년 졸업을 32명이 했다. 부모 따라 해마다 서울로 떠난 아이들이 늘어만 갔다. 한때 우리 집도 그런 대열에 합류할 뻔하다가 아버지께서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그냥 눌러 앉고만 경우에 해당한다.
30명 조금 넘는 아이들이 6년 동안 한 교실에서 수업했다. 급장과 당번이 학년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교실. 급장은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행사했다. 아이들이 가져온 만화책을 빼앗고 여자아이들 고무줄을 수도 없이 끊어댔다.
아이들 매로 두들겨 패는 건 예삿일이고 칠판에 이름을 적어 놓으면 말 한마디 못하고 선생님께 흠씬 두들겨 맞았다. 급장이 공부 잘하고 덩치도 크니 반대할 수도 없었다.
한번 급장은 영원한 급장일 줄 알았던 5학년 어느 날 조회시간에 선생님께서는 한 달씩 돌아가며 반장을 뽑는다고 했다. 아이들은 그 억압에서 해방되었다.
하지만 끝까지 집에 일찍 가는 걸 방해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남녀 둘 중 한 명이 공부를 못하면 짝꿍도 2시간 가량을 학교에 남아 그 아이가 잘 한다는 걸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집으로 가야 했다. 그러니 짝꿍 잘 만나는 것도 행운이었다. 선생님은 이 점에서는 선택권한을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함께 보낸 기나긴 시간이 말해주듯 모든 아이들의 숨소리, 체취, 혼식 정도, 반찬의 종류, 숟가락 생김새, 집안 살림살이의 규모를 속속들이 알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에 가서 '똑똑' 두들겨 노크를 하면 '헴헴' 또는 '흠!' 하는 소리만 듣고도 누가 일을 보는 줄을 알 정도였다. 우린 또 다시 같은 통학버스를 타고 중학교 3년을 내리 함께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