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된 건 민족이 아닌 친일파들"

[인터뷰] 8·29 국치일에 만난 '살아있는 독립운동가' 조문기

등록 2003.08.29 13:25수정 2003.08.30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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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다. 그러나 3년뒤인 1953년 7월 27일 그 지리했던 전쟁이 멎은 '정전협정일'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민족이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된 8.15 광복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1910년 8월 29일 '국치일'을 아는 이는 반대로 찾아보기 힘들다.

29일(금)은 조선이 역사에서 사라진 경술국치일이다. 지난 1910년 8월 16일 3대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 조약안을 넘기며 수락을 독촉했고, 엿새만인 22일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결국 조선은 사라졌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29일 공포, 이로써 조선의 모든 통치권이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일제에 넘어가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93년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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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945년 7월 24일 친일파들의 행사장에서 폭탄 의거가 있었다. 당시 행사장은 현 서울시의회 건물로 지금의 세종문화회관격인 부민관.

1945년 7월 24일 친일파들의 행사장에서 폭탄 의거가 있었다. 당시 행사장은 현 서울시의회 건물로 지금의 세종문화회관격인 부민관. ⓒ 권기봉

달력을 보자. '잊지 말자' 6·25는 있지만 정전협정일은 없는 것처럼 '영광의' 광복절은 있지만 국치일은 없다. 매년 광복절에는 정치인과 명망가들이 한데 모여 성대한 기념 행사를 열어 왔지만, 오히려 더 깊이 생각하고 되뇌일 필요가 있는 국치일은 지금껏 잊혀져온 것이 사실이다.

당시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도 마찬가지. 독립운동가들 역시 오랜 시간이 흐르며 대중의 관심 목록에서 사라진 지 오래고, 국사 교과서나 천안 독립기념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박제된 역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모두가 사라져간 것은 아니다. 서울시의회 근처에서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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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이사장은 일제가 패망하기 약 한 달 전인 지난 1945년 7월 24일 지금의 세종문화회관격인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건물)에 유만수와 강윤국 등과 함께 폭탄을 설치했던 독립운동가다. 이날 부민관에서는 친일파 거두 박춘금 등이 참석한 가운데 '아시아민족분격대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조 이사장 등이 미리 설치해둔 폭탄 두 개를 터뜨림으로써 대회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던 사건이 이른바 '부민관 폭탄의거'다. 당시 그의 나이 20세.

"광복절, 광복절 하지만 광복은 무슨 광복이야. 친일파를 위한 광복, 친일파를 위한 해방일 뿐이지."


국치일에 대한 소감을 물었지만 그는 대뜸 광복절을 떠올렸다. 심지어 '광복'이라는 말 자체도 듣기 싫어 일부러 광복절만 되면 다른 곳으로 피한다는 조 이사장은, 우리나라가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인물 중 하나다.

a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 권기봉

"우리가 당시 독립운동한 것은 이런 나라 만들자고 한 게 아니야. 친일파가 그대로 힘 있는 자리를 차지하면서 자자손손 호강하고. 결국 해방된 것은 우리 민족이 아니라 친일파야. 일제라는 상전이 떠나가고 친일파가 상전이 된 거지. 독립? 난 우리나라가 독립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조 이사장은 얼마 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회장 김희선)'을 중심으로 국회에 제출된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특별법)과 관련, 의미 있는 발걸음이라고 평한다.

"이 건 감정이나 보복 차원에서 하자는 게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위해 꼭 중요한 일이기에 나서는 것이거든."

하지만 이번 특별법 제출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이미 해방 직후 반민특위가 구성되었으나 친일파들의 조직적인 방해로 와해된 바 있고, 92년에도 김원웅 개혁정당 대표를 중심으로 특별법안이 제출되었지만 폐기되었던 전력이 있다.

"일단 특별법안이 제출된 것은 다행이야. 그런데 과반수 의원(주: 한나라당 49명, 민주당 96명, 비교섭단체 9명 등 모두 154명이 서명)이 도장 찍었다고 해서 다 된 게 아니야. 나중에 또 발목 잡을 것이 확실하니까 이번에는 정말 비장한 각오로 나서야 돼요. 지난 번처럼 계류시키다가 회기 말에 가서 자동 폐기될 수도 있으니까. 이번에는 더 야무지게 해야 돼."

"굴종과 굴욕…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난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분열되고 난맥을 보이는 것은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무슨 개혁을 하려고 해도 사사건건 은밀하게 방해를 하고. 우리나라가 해방 이후에도 굴종과 굴욕의 길을 걸어온 근본 원인은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난 오로지 한 생각밖에 없어. 친일파 청산. 우리 민족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민족 화해나 통일을 이야기할 수도 없고. 하더라도 그저 구호에만 그칠 수밖에 없을 거야."

77세의 조문기 이사장.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하겠노라고 말한다.

"나 같은 이는 이미 타락한 세대야. 이제 젊은이들이 나서야지. 현실적으로 한 순간에 손 들고 나가라고 할 수도 없고 난관도 많을 거야. 그렇다고 중단할 수는 없지."

a 친일파의 거두 박춘금.

친일파의 거두 박춘금. ⓒ 권기봉

한편 얼마 전 온 나라를 시끄럽게 했던 일본 집권 자민당 3역 중 한 명인 아소 다로 정조회장의 '창씨개명' 관련한 망언으로 화제가 옮아갔다.

아소 다로 정조회장은 노무현 대통령의 일본 국빈방문을 앞둔 지난 5월 31일 도쿄대학에서 열린 강연에서 일제 시대의 창씨개명에 대해 "조선인들이 '성씨를 달라'고 한 것이 시작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발언으로 국내 여론을 들끓기 시작했고, 노 대통령의 방일도 이 문제 때문에 매끄럽지 못한 출발을 보였다. 그런데 이것을 비단 감정적으로만 대응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 조 이사장의 생각이다.

"아소 다로가 한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 창씨개명은 박남규라는 친일파가 청원해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니까. 어디 그것뿐인가? 강제징용은 박춘금이 일본 국회에 청원해서 시작된 거고, 조선어 폐지도 현영섭이라는 친일파가 조선총독부에 청원 해서 이루어진 거야. 광복절은 좋아해도 국치일은 모르는 것처럼 부끄러운 역사도 역사잖아.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이 나서서 민족을 팔아먹은 것도 알고 있어야지."

"친일파 청산은 제2의 독립운동이야"

a “친일파 청산은 제2의 독립운동이야”

“친일파 청산은 제2의 독립운동이야” ⓒ 권기봉

조 이사장의 얼굴에서는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조두남이나 김창룡 등 친일을 했음에도 사회적으로 업적을 기리는 듯한 풍경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제대로 역사를 청산한 적이 없으니 이렇게 엽기적인 일이 벌어지는 거야. 어떻게 친일파들을… 이건 친일파 공화국이야. 사람들이 혼이 빠졌어."

그 혼을 찾도록 하자는 것이 그의 사명이라고 했다. 친일 경력을 가진 이들이 그대로 자손과 후학들을 양성해 맥을 이어오면서 오욕의 역사가 정착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하는 조 이사장은, 앞으로 친일파 청산 운동을 계속해서 벌여나갈 것이라 다짐했다.

"나는 이제 이 운동 자체가 제2의 독립운동이라 생각해. 일제로부터 벗어나는 게 제1의 독립운동이었다면 친일파로부터 벗어나는 게 오늘의 독립운동이라는 거지.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악착같이 할 거야. 내 소원? 첫째도 둘째도 친일파 청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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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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