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을 읽으면서 사막을 걷는다

르 클레지오의 장편소설 <사막>

등록 2003.09.05 07:12수정 2003.09.05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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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클레지오의 <사막>을 다시 읽는다. 책 속표지를 확인해보니 '1995. 8. 22. 종로서적에서'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내가 <사막>을 처음 만난 것은 서른한 살이 되던 해의 여름인 셈이다.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한창 바빴을 그 시절, 나는 사막을 꿈꾸었던가? 그러나 지금 내게는 이 책을 샀던 기억도,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느낌도 선명하게 남아 있지 않다.

그 당시 내가 읽었던 많은 프랑스 소설들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그의 남다른 문체와 주제의식에도 불구하고 르 클레지오의 <사막>은 나를 매혹시키지 못했던 것 같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 달랐기에 나의 눈길을 사로잡지 못한 게 아닐까?


마흔이 다 되어 다시 펼친 <사막>은 여전히 낯설다. 짧게 짧게 끊어지는 단문의 건조한 문장은 모래알처럼 머리 속에서 겉돌고,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진행되는 이야기의 접점은 모래바람에 가린 시야처럼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마치 진짜 사막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아, 그렇구나, 나는 지금 <사막>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사막을 걷고 있는 것이구나! 어느 순간 불현듯 나는 <사막>의 비밀을 눈치챈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낯설고 불편했던 이 느낌, 이것이야말로 르 클레지오가 <사막> 속에 숨겨 놓은 오아시스라는 사실을.

독자로 하여금 정말 사막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이 놀라운 힘, 이것이 바로 <사막>의 새로움이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이 소설에 그랑프리를 헌정한 것도 이제까지의 프랑스 소설이 보여준 전통과는 너무나도 다른 이러한 새로움을 높이 산 것이리라.

르 클레지오의 <사막>이 품고 있는 이 오아시스 또는 새로움은 <사막>이 그 내용뿐만 아니라 소설의 구조와 문체까지도 철저하게 사막을 닮아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사막>을 횡단하는 우리의 눈과 머리는 익숙하지 않은 갈증과 현기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소설의 내용은 극히 간단하다. <사막>의 주인공 소녀 랄라는 사하라 사막을 주름잡던 푸른 옷의 투사 또는 '청색인간'이라고 불리는 부족의 후예로서, 사막 근처에서 살다가 대도시로 옮기게 된다. 삭막한 대도시에서의 삶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영혼 속에 깃든 청색인간의 후예로서의 자유로움과 야성을 잃지 않는다.


어느 날 한 사진사가 그녀의 이러한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그녀를 모델로 해서 사진을 찍는다. 그 사진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그녀는 일약 유명한 사진모델이 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돈도 명예도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어서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어릴 적 자기가 살던 곳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그리고 그 바닷가 사구에서 아기를 낳는다.

마치 사막의 풍경처럼 단순하고 명징한 이러한 랄라의 현재 이야기는, 푸른 옷의 투사들과 그 청색인간들의 족장 마 엘 아이닌의 고난에 찬 엑소더스를 누르라는 소년의 눈으로 그리고 있는 과거의 이야기와 겹쳐지는 순간 의혹의 모래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전통적인 소설의 구조와는 달리 <사막>에서는 이러한 두 겹의 이야기가 마지막 지점에 도달하기 전까지 결코 만나거나 엮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모래바람을 끝까지 견디면서 걷지 않으면 안 된다. 랄라는 랄라의 사막을, 누르는 누르의 사막을, 그리고 그들을 눈과 머리로 쫒아가는 우리는 우리의 사막을 각각 횡단해서 도달하게 되는 마지막 지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모래바람은 멈춘다.

그 지점은 랄라가 부른 배를 안고 찾아든 유년의 사막이며, 누르가 마 엘 아이닌 족장의 죽음을 보듬고 다시 찾아 나선 자유의 사막이며, 또한 우리의 오랜 갈증과 의문을 풀어줄 오아시스가 있는 사막이다. 그 사막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것은 랄라에게서 태어난 새로운 청색인간의 울음소리다.

르 클레지오의 <사막>을 읽어나가면서 우리가 견디어야 하는 것은 비단 이러한 모래바람뿐만이 아니다. 이른바 '카메라-펜' 기법이라고 불리는 그의 문체가 던져주는 메마름과 눈부심도 우리는 견뎌내야 한다.

마치 카메라를 대고 찍은 듯이 짧게 짧게 끊어지는 단문으로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그의 문장에는 행위의 움직임은 있을지언정 감정의 움직임은 없다. 감정의 물기가 조금도 묻어 있지 않는 그의 문장들은 쏟아지는 햇빛 아래 드러난 사막의 모래나 자갈돌처럼 광물성이다. 어쩌다가 조금 드러나는 물기조차도 금세 증발하고 만다.

그래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소설을 읽으면서 기대하는,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는 묵직한 감동이나 정서적 충격 또는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 사유의 단초를 <사막>은 조금도 우리에게 던져주지 않는다. 정밀하게 조준된 카메라의 렌즈가 포착한 인물들의 움직임과 그들이 보고 느끼는 대상들을 쫒아가기에 바쁜 우리의 눈과 머리는 이내 지치고 만다.

한 곳에 쌓이지 않고 끝없이 흩어지면서 반짝거리는 그의 문장은 햇빛 아래 온통 벌거벗은 모습으로 드러난 사막의 모래알이나 자갈돌처럼 눈부셔서 우리는 그저 한번 쳐다보고 지나칠 뿐 더 이상 유심히 살피지 않는다. 손안의 모래알들처럼 그의 짧은 문장들은 우리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버린다.

그런데 놀라워라, 우리는 어느 순간 그 모래알들과 자갈돌들이 노래하는 것을 듣는다. 랄라가 사막의 암석고원에서 푸른 투사의 시선을 느끼고 그녀의 어머니가 부르던 노래 소리를 듣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그의 문체가 사막을 닮아 있기 때문에 우리 귀에 들리는 환청이다. 우리가 그 환청을 듣는 순간 이 소설은 새롭게 다가서고 짧은 단문의 문장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르 클레지오는 누구인가

‘프랑스 문학의 살아 있는 신화’라고도 불리는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J. M. G. Le Clézio)는 1940년 프랑스의 니스에서 태어났다.

23세의 나이에 첫 작품 <조서(調書)>(1963)로 르노도(Renaudot) 상을 수상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한 그는 <열병>(1965), <홍수>(1966), <물질적 법열>(1967), <사랑의 대지>(1967), <도피의 서>(1969), <전쟁>(1970), <거인들>(1973) 등 화제작을 잇달아 발표하며 천재적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들 작품들에서 그는 현대문명의 집합체인 대도시의 어두움과 두려움, 공포와 폭력을 넘쳐흐르는 이미지와 분방한 어조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1967년 멕시코 체류와 1969~73년 파나마에서 남미 인디언들과 함께 한 생활을 통하여 자연의 비의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 그는 이후 서구적 사유틀을 버리고 자연과 합일되는 새로운 존재의 모델을 추구한다. <저편으로의 여행>(1975), <지상의 미지의 인간>(1978), <몽도,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들>(1978), <사막>(1980) 등의 작품들은 이러한 그의 변모를 잘 보여준다.

인간, 언어, 사물, 자연, 세계가 함께 어우러지는 신화적 유년시절로 회귀하는 그의 긴 여정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황금을 찾는 사람>(1985), <떠도는 별들>(1992), <검역>(1995) 등의 작품으로 이어졌고, 본격문학으로는 보기 드물게 장기 베스트셀러가 된 <황금 물고기>(1997)에 가장 순도 높게 나타나 있다.

지금도 장편소설, 단편소설, 에세이 등을 발표하며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1980년 <사막>을 위시한 그의 전 작품으로 폴 모랑 상의 첫 수상자가 되었으며, 1994년에는 잡지 에서 행한 설문조사에서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르 클레지오의 소설 <사막>은 첫눈에는 낯설고 불편하고 또한 불친절한 소설처럼 보이지만 그가 숨겨놓은 오아시스를 발견하는 순간 그 어느 소설보다도 아름답고 매혹적인 소설로 탈바꿈한다. 그 순간을 맛보기 위해서는 책을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갈증과 현기증을 우리는 견뎌내야 한다.

그 견딤의 한 방법은 르 클레지오의 <사막>을 읽지 말고 걷는 것이다. 진짜 사막을 걸어가듯이 그저 눈앞에 펼쳐지는 모래언덕과 암석고원에 새겨져 있는 희미한 발자취에 의지해서 그냥 따라가 보는 것이다.

목적지가 어딘지 묻지 말고 모래알과 자갈돌 하나하나에 마음 쓰지 않고 그 전 풍경을 눈에 담으면서 걷다 보면, 햇빛에 진동하는 모래알들과 자갈돌들의 노랫소리가 들리고 저 멀리 야자수 우거진 오아시스가 마침내 보이게 될 것이다.

사막

J.M.G. 르 클레지오 지음, 홍상희 옮김,
문학동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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