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 시대 문명에 대한 소고

이문열의 <들소>를 읽고

등록 2003.09.09 17:43수정 2003.09.09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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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소>는 1979년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발표된 이문열의 단편소설이다. 난 이문열의 작품을 좋아한다. 어쩌다 한번 TV에 비친 그의 얼굴을 보면 고집스러운 틈 사이에 배어있는 고뇌를 본다. 고민은 잡다한 것을 뜻하지만 고뇌는 인간의 깊이를 생각할 때 어울리는 단어다.

인간은 어떤 과정을 통하여 제도에 안착했는가. 제도나 사유재산이 생기기 전, 너나없이 평등한 조건일 때 性도 평등했었는가. 도덕이나 정신세계는 원시인들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는가 '들소'는 그러한 것들에 대한 의문에 하나의 가설을 만들어 준다.


작품을 설정한 시기는 신석기 시대지만 작품의 등장인물이나 배경은 구석기시대에서 빌려왔다. 아주 오래 전, 청동기문화가 도래하기 훨씬 전 돌과 화살로 수렵도구를 만들어 혈족의 식량을 구하던 시기, 소설의 무대가 되는 지역은 스페인 북부의 '알타미라 동굴'과 그 주변이다.

알타미라동굴 천장에는 길이 2미터가 넘는 '들소'그림이 살아 숨쉬고 있다. 알타미라 동굴은 미켈란젤로의 벽화로 유명한 바티칸 궁전의 시스티나 예배당에 견주어 '선사시대의 미켈란젤로 예배당' 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알타미라동굴은 1879년에 '사우투'라는 고고학자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후 에스파냐와 프랑스 등지에서 동굴벽화가 차례로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었지만 알타미라 벽화를 따라갈 그림은 없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유는 벽화의 들소는 만사천년 동안 수정을 가한 흔적이 없다는 것도 있지만, 그 거대한 그림을 단 한사람의 손으로 그려진 것으로 추측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대기술로도 보존이 불가능한 그림을, 온도와 습도의 장벽을 뛰어넘어 인류역사만큼이나 긴 세월을 바래지 않게 보존한다는 게 이론으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한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만사천년 전은 구석기말인 마들레느 문화(사만년- 일만년)가 성행하던 시기다. 마들렌느 문화는 주술문화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동물의 뼈나 이빨, 발톱 등으로 조각을 하거나 벽화를 그려서 부적으로 삼는 원시신앙이 융성하던 시기다. 정치나 종교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정교분리는 상상도 못하던 시대지만, 신앙은 기원으로부터 출발한다는 학설을 뒤받침 하던 시기이며 진화론자가 주장하는 네안데르탈인이나 크로마뇽인이 지배하던 세상을 말한다.

작자는 틀림없이 존재하였지만 기록이 없는 문명의 터에 서서 역사를 잇고 싶었을 것이다. 들소는 벽화를 그린 조상과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될 이유를 찾기 위해 과거로 떠나는 시간여행이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만수천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흐르도록 채색이나 선이 화려하고 선명한 상태로 남을 수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소설 들소를 통하여 이문열의 풍부한 추리력을 엿보고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보며 들소에서 파생되는 또다른 문화를 엿보기로 한다.


소설은 '그'라고 불리는 한 청년이 성인식을 앞두고 들소사냥에 나서는 것부터 시작된다. 원시시대, 들소는 생존과 직결되는 일용할 양식이기도 하지만, 신이 인간에게 베푸는 관심이며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다.

조직이나 사유재산에 대한 개념이 없던 원시사회는 공평했다. 지배하는 자도 없었고 지배당하는 자도 없었다. 가족도 없었고 아내도 없었고 자식도 없었다. 용사들이 사냥에서 돌아오면 포획물은 적당히 분배가 됐다. 늙고 병든 자는 어른으로 대우를 받고, 심약한 자는 그림이나 깃털장식을 만드는데 종사했다. 결혼제도도 없었으며 아녀자는 돌아가며 남자들을 선택했다. 남자는 여자의 선택에 따라서만 하루 밤을 같이하는 자격이 주어졌다. 다만 사냥에서 용맹을 떨쳐 먹을 양식을 비축하는데 공을 세운 용사에 한해서 원하는 여자와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감정은 있지만 사랑은 없는 성도 공동으로 관리하며 분배하는 사회였다.


'그'로 불리는 청년도 사냥터에서 공을 세워 "초원의 꽃"이라는 여자를 차지하고 싶어했다. 차지하고 싶어한다는 것은 사유의 개념을 몰랐다는 것뿐이지 소유의 욕망은 있었다는 뜻이다. 소유하고픈 욕망이 있는 한, 언젠가는 내 것을 표시하기 위한 제도를 만들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도 포함될 것이다.

원시사회에는 이름이 없다. 태어난 시간이 아침이었으면 이름은 '해뜰 때'가 되고 꽃처럼 예쁘면 '초원의 꽃'으로 불리는 것이다. '그' 또한 '그'라는 객관적 형상으로 존재할 뿐, '그' 자체는 없다. 그 것은 '그'라는 개체가 배제된 사회를 반영하는 이름이다. 사람은 자연의 한 부분에 섞여 존재할 뿐이지 생각하는 주관은 원시사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초월적 이단이기 때문이다,

감정을 허락하지 않는 시대에서 '그'는 '초원의 꽃'과 두어 번 잠자리를 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본능과 상관없이 공유(公有)가 가져다 준 순번에 따라 배분순서가 돌아왔을 때다.

섹스는 본능이다. 그러나 원시사회의 섹스는 본능 또한 공유의 한 축에 지나지 않았다. 스스로도 모르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이면 배설을 하고 성은 배설을 충족시켜주는 도구에 불과 했다. 종족번식이라는 거창한 명제는 후세의 사가들이 지어 낸 명분일 뿐, 가족의 개념이 없던 사회에선 섹스는 본능해소 이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초원의 꽃' 마음에 들기 위해 날랜 용사가 되기를 원했다. '초원의 꽃'이 자신을 잠자리의 대상으로 지정해 주기를 원하지만 그녀는 들소의 맛있는 부위를 안겨줄 강한 남자들만 지정했다. 사유가 없던 원시사회에서, 가치를 먹는 것에 둔 '초원의 꽃' 은 어쩌면 역사를 끌어가는 선각자의 눈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그'의 본능을 해소할 길은 달려드는, '들소'의 정수리에 창을 깊이 박아 쓰러트리는 용맹한자가 되는 것이다, 찌른 창 사이로 쏟아지는 붉은 선혈을 맨 손으로 받아내며 환호하는 용사가 되어야만 '초원의 꽃"에다 배설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심약한 청년이다.

첫 번째 사냥에서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들소를 보고 등을 보인 이후, '그에겐 '비겁한 자'라는 이름이 붙는다. 그 날 이후 그의 역할은 사냥이 아니라 돌을 뾰족하게 갈아 화살이나 창을 만드는 만드는 작업장에 배치된다. 예술적 기질이 있는 그에게는 사냥보다 작업장이 적성에 맞지만, 용사가 되고 싶어하는 열정을 죽이지 못한다.

그는 동굴에서 두 해 여름을 보낸 후, 비겁한 자로 불리기 싫어 한 번 더 용사가 되기를 자청하고, 다시 들소사냥을 나가지만, 들소에게 받혀 무릎이 펴지질 않는 큰 부상을 입는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용사가 될 꿈을 접어야 하는 것을 알고 난 뒤 혈족의 사회에서 일정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신비의 동굴" 에 들어간다. 이 신비의 동굴이 알타미라벽화를 창조해 내는 공간으로 등장한다.

동굴로 들어가는 이유가 그의 절망을 알아 본 위대한 어머니의 뜻에 다른 것이지만 가족개념이 없는 사회에서 어머니는 신적 모녀상을 가진 상징으로 작용한다. 신비의 동굴에는 늙은 스승이 있고 그 스승의 사제자 역할을 하는 '큰 목소리'라는 이름의 동료가 있다. 큰 목소리는 이미 권력이 지배하는 농경사회를 경험해 본 전력의 소유자다. 그도 사제자의 대우를 받으며 사제의 수업을 받는다.

신비의 동굴에는 윤곽만 그리다 만 들소 그림이 있다. 늙은 스승이 죽고 '큰목소리'와 그가 사제가 되었을 때 그는 들소를 살아있는 것처럼 그리기 위해 매달린다. 두 번이나 사냥을 실패하게 만든 공포의 대상인 들소를 미세한 털 하나, 움직임 하나까지도 사실감 있게 그리기 위해 노력을 한다. 언어가 없던 사회에서 그림은 유일한 문서였고,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통로로서의 의미를 가졌다.

그는 색깔을 얻을 수 있는 주토(朱土)를 구하기 위해 산을 타기도 하고, 안료(顔料)를 만들 수 있는 신비의 물을 찾아 계곡을 건넌다. 창으로 잡지 못해 좌절하게 한 들소를 색과 선으로 잡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다.

소설이 들소를 그리고 있지만 그림은 과정에 불과하다. 들소사냥이나, 사제자나 초원의 꽃은 추리에 환상을 심어주는 역할을 한다. 모녀상이나 늙은 스승은 원형심리학에 나오는 철학용어다. 인간의 자아를 이루고 있는 원시적 상태의 의식 다섯 개가 저마다 자아임을 내세우며 충돌하는 것을 어떻게 조종하는가를 다루는 표현도구다.

들소는 제도라는 틀이 갖추어지지 않았던 시대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미래에 대한 전망의 결여이며, 결여는 신에게 향한 기복신앙을 잉태하고, 기복신앙은 주술로 나타나는 들소그림이다.

결국 그림은 완성되었지만 여전히 전망은 불투명하다. 전망(展望}은 목축지를 얻는 대가로 팔려가기 전에 '초원의 빛"이 "그"에게 한 말에 함축돼 있다. " 말로 화려하게 꾸며진 말을 모두 벗기면 모두 저마다의 소를 좇고 있을 뿐이에요. '뱀 눈'은 권력의 소를 좇고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권력이 나누어주는 부귀의 소를 좇지요. 난 당신의 그윽한 눈길에서 사랑을 받고 싶기도 하지만, 당신 또한 허상을 좇지요. 풍요와 안락한 소를 원해요. 그래서 떠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아요."

결국 그림으로 그려서라도 쓰러트리려 했던 들소는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라는 추상이었다. 사냥하지 않고 편하게 잘 살 수만 있다면 복종과 지배를 당할 것을 강제 받더라도 그 길을 택하는 것이 인간의 근원적 숙명이었을 것이다.

소감에서 다루지 않았지만 이 소설은 편하게 살고 싶은 욕망과, 그 욕망을 교묘히 이용하는 "뱀 눈"을 통하여 권력과 권력이 만들어내는 소유도 함께 그렸다. 역사는 이렇게 전개되었을 거다 라는 추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마지막, 들소를 잡기 위하여 떠나기 전, 그의 독백은 집착과 허상의 차이를 설명하기도 한다. "나도 너희들과 같이 일찍이 너희들과 같은 소를 좇아야 했다. 스러지고 말 아름다움에 그렇게 집착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의 소는 어느 것일까… 언제 싹틀지 모르는 사상의 씨앗을 뿌린 것만으로… 아비에겐 아비가 잡아야할 소가 있다."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를 통하여 선사시대의 생활상이나 제도를 유추해 보려한 이문열의 들소는, 가설에 가닥을 잡아 보려한 의도에 걸맞게 성공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한다.


들소

이문열 지음, 최일룡 그림, 박우현,
휴이넘,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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