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지 않다, 하지만 거부하면 안 된다?

장관해임안에 대한 <조선일보>의 비합리적 태도를 비판하며

등록 2003.09.09 18:26수정 2003.09.1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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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하버마스
위르겐 하버마스J.Habermas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언론의 상품화가 민주주의에 끼치는 해악에 대해 경고한다.

그에 따르면, 소상품 교환에 기초를 두고 있던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는 정치권력과 사적 이익 추구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공론장(public sphere)이 존재했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공적 토론의 장에서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자유로이 의견을 교환할 수 있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언론이었다. 비록 당시 언론은 특정 정치인이나 정책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정파지였지만, '사상의 공개시장'에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언론재벌'이나 '재벌언론'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로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수가 시장의 독점적 지위를 점하게 되는 자본집중 현상이 일어나고, 미디어가 '이익 극대화'를 좇는 상품의 하나로 전락하면서, 공론장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언론이 상업화 되는 과정에서 시민은 여론의 주체에서 단순한 뉴스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로 전락해 버렸다. 이제 언론은 합리적 토론의 매개자가 아니라, 팔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럴 듯하게 만들어 파는 비합리성의 강매자가 되었다. 전제정치 시대에 민주주의의 꿈을 열어가던 언론이 오히려 현대에 와서는 민주주의의 가장 큰 위협으로 전락한 것이다.

한국 상업언론의 여론호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난 9월 3일과 4일자 <조선일보> 사설은 한국 상업언론의 비합리성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조선일보>의 8월 18일 사설부터 보기로 하자. 당시 이 신문은 한나라당의 행정자치부 장관 해임안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 바 있다.

"국회가 국무위원에 대한 해임을 건의하려면 특정 장관이 져야 할 구체적이고 명백한 책임을 국민 앞에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한총련 대학생들의 미군 장갑차 점거 시위 책임을 물어 행정자치부 장관을 해임하라는 것은 책임의 범위가 지나치게 포괄적이다. 행자부장관이 경찰청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다고 하지만 기습적으로 벌어진 시위에 일일이 책임을 져야 한다면 어떤 장관도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한총련의 불법시위는 엄중하게 처리되어야 하고 책임져야 할 중대사안이지만, 포괄적인 문제를 놓고 한 장관을 시범 케이스로 처리하려는 것은 온당치 않다.


야당이 정부의 사전 사후 조처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나라당이 정부의 한총련에 대한 유화적인 태도를 문제삼을 수는 있다. 그러나 현저한 책임이 드러났을 때 일벌백계로 해임안을 통과시켜야 권위가 설 수 있다. 이번처럼 다수당의 힘으로 밀어붙이려 한다면 권한 남용이란 비판을 면키 어렵다."

- <조선일보> 2003. 8. 18 "야당의 장관 해임안 신중 기해야"



이 사설에 따르면, 한나라당의 해임안은 장관의 책임추궁 범위를 벗어나는 권한남용이기에 국민들을 납득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9월 3일자 사설에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당시의 사설을 보기로 하자.

"한나라당은 경찰 경비와 관련된 사안을 놓고 행자부 장관이 물러나기까지 해야 하는지에 대해 국민을 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했다. 해임안 처리가 '정권 중간평가'라는 주장 역시 공감을 얻기 어려웠다. 한나라당은 국회에서 숫자로 밀어붙인 책임을 면치 어렵고 앞으로 그 부담을 져야 할 것이다."

- <조선일보> 2003. 9. 3, "여•야는 김 장관 파문 수습 서둘러야"


이제 위의 글에 어울리는 결론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기초적인 논리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 사설의 문제제기가 어떤 주장으로 이어져야 할지를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중 이 사설에 알맞는 결론은 무엇일까?

(1) 따라서 대통령이 해임안을 거부해도 야당으로서는 할 말이 없게 되었다.
(2) 따라서 대통령은 한나라당의 해임안을 거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조선일보>의 주장대로, 야당의 해임안이 "경찰 경비와 관련된 사안을 놓고 행자부 장관이 물러나기까지 해야 하는지에 대해 국민을 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했"고, "해임안이 '정권중간평가'라는 주장 역시 공감을 얻기 어려웠"으며, "행자부장관이 기습적으로 벌어진 시위에 일일이 책임을 져야 한다면 어떤 장관도 버텨내지 못할 것"이기에, 한나라당의 행태는 "다수당의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권한 남용"이라면, 당연히 대통령은 반대표를 던져야 한다. 대통령의 의회안 거부권은 이와 같은 "다수의 권한남용"을 막기 위한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조선일보>는 두 번째 답을 택하고 있다. 9월 3일자 사설을 좀더 보기로 하자.

"청와대는 지금 김 장관 해임안 수용 여부를 논의 중이라고 한다. 김 장관 해임안은 정치적 무리가 있다고 해도 국회법 절차에 따라 하자 없이 통과된 것이다. 이에 대해 대통령이 거부한 전례가 없으며 이번에도 이 같은 관례는 지켜져야 한다.

어차피 국회 다수 의견으로 거부된 장관이 앞으로 정상적인 집무를 수행하기도 어렵고 또 대북송금 재특검법안을 거부한 대통령이 다시 이번 해임건의안까지 거부할 경우 여야관계가 어디로 갈지 예상하기조차 어렵다.

이번 해임건의안 파문으로 누가 정치적으로 득을 볼지는 모르나 그 결과가 무엇이든 여야는 국민 불안의 핵심을 비켜간 소동을 벌였다는 허물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여야는 하루빨리 정국을 정상화하고 초점을 시급한 국정 현안으로 모으기 바란다."

- <조선일보> 2003. 9. 3, "여•야는 김 장관 파문 수습 서둘러야"


<조선일보> 인터넷판에 실린 9월 4일 사설
<조선일보> 인터넷판에 실린 9월 4일 사설디지탈조선
비록 장관 해임안이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하자 없이 통과 되었다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게다가 의회에서 통과된 안에 대해서 대통령의 거부권이 행사된 적이 없기 때문에, 이번에도 거부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조선일보>의 주장이다. 옳든 그르든 "관례는 지켜져야 한다"는 이 사설의 결론인 것이다. <조선일보>는 다음 날 한술 더 떠, 한나라당의 해임안을 비판하는 김장관을 향해 "김두관 장관이 막말할 때 아니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냈다.

옳지 않지만, 통과된 이상 옳은 것이며, 앞으로도 통과된 것은 무조건 지켜져야 한다는 이 놀라운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조선일보>의 이 주장이 타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두 가지가 설명되어야 한다. 첫째, 의회에서 통과된 것이 언제나 받아들여져야 한다면 (특히 <조선일보>가 맹렬히 비난한 이 "권한남용"에 대해) 대통령의 거부권은 왜 존재하느냐는 것이다.

둘째, <조선일보>가 진정으로 "관례가 지켜져야 한다"고 믿는다면, 국민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해임안을 통과시킨 그 사상초유의 사태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국민이 납득할 만한 의회안만을 통과시키는 것이 민주주의의 관례라면, 이것이 "거부"되는 상황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조선일보>는 "이번 해임건의안까지 거부할 경우 여야관계가 어디로 갈지 모른다"고 말하며 대통령의 거부안 수용을 강요하고 있을 뿐이다. 이 신문에게는 옳고 그른 것의 여부보다는 "관례"가 더 중요하며, 국민들의 입장과는 상관 없이 여당과 야당이 정치적으로 타협하는 "여야관계"가 더 중요한 것이다. 국민들의 여론이야 "우리가 쓰면 여론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별로 아쉬울 것이 없을 터이다.

논술시험을 앞둔 입시생들이 논리력을 향상시킬 목적으로 신문사설을 읽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요즘에도 신문이 이런 용도로 사용되는지 모르겠으나, 합리적인 사고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신문을 잘 선택할 일이다. 어떤 신문은 논리 대신 탐욕만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신문을 잘 고르는 것은 논리력 향상 뿐 아니라, 상업언론이 우리로부터 앗아간 "여론"을 되찾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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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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