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어머니, 40대가 부르는 사모곡(思母曲)

[우리동네 사람들] 진뫼마을 '주말 명예이장' 김도수씨

등록 2003.09.10 22:23수정 2004.07.22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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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고향 가는 길에 핀 코스모스.

고향 가는 길에 핀 코스모스. ⓒ 김도수

김도수(45·회사원·순천시 연향동)씨의 고향은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뫼마을. 카페 '섬진강편지'의 방장 노릇을 하며 구수한 입담으로 주변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은 섬진강 때문이다. 쉴새없이 구시렁거리며 흐르는 섬진강이 그를 재담가로 키운 것이다.

그의 고향별곡(故鄕別曲)은 유별나다 못해 구성지다.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 막내아들인 그는 스물이 훌쩍 넘도록 어머니의 젖을 만지며 잠 들었다. 군대 제대후 고향에 머물며 논밭 일과 막걸리와 어머니의 구수한 정담에 흠뻑 취해 살았다.


스물 일곱 되던 해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졌다. 의사로부터 "뇌출혈로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청천벽력의 통첩을 받고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왔다. 그는 돌아가시기 이틀 동안 어머니의 젖을 만지고 볼에 볼을 비비면서 식어가는 몸을 끌어안고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a 저 호박처럼 고향사랑도 풍성해지길...

저 호박처럼 고향사랑도 풍성해지길... ⓒ 김도수

어머니는 세상 고생한 댓가로 예쁜 꽃상여 타고 떠나는 게 꿈이라고 했다. 그 꿈대로 꽃상여 타고 떠나가던 날, 그는 꽃상여를 가로 막은 채 "어매 가지마, 어매 가지마"라고 몸부림쳐 울부짖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야속하게도 마을 사람들이 불러주는 상여 소리를 들으며 북망산천으로 떠났다.

어머니 세상 떠난 지 18년, 동네 이장이었던 아버지도 당숙도 어머니 가신 북망 길로 떠났다. 젖을 만지던 막내아들은 40대 중반으로 늙수그레해졌지만 어머니를 향한 사무친 그리움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는 3년 전, 고향으로 돌아왔다. 직장 때문에 아주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주말이면 어김없이 아내와 딸과 아들을 데리고 고향을 찾는다.

다른 사람이 살던 고향집을 매입해 어머니의 별칭인 '월곡댁'을 따 '월곡산방(月谷山房)'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에게 토요일은 신명나는 귀향일이었다. 아내와 딸아들을 대동한 채 2시간 거리를 달려온 그는 고무신으로 갈아 신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남새밭에 고추와 배추를 심었다. 그리고 사모곡 한 편을 월곡산방에 걸었다.

a 가난한 시절, 옥수수는 귀한 식량이었습니다.

가난한 시절, 옥수수는 귀한 식량이었습니다. ⓒ 김도수

달은 높이 솟아
앞산에 뜨고
그리움은 산을 넘어
달 속에 있네



그가 고향에 돌아오자 동네 어른들은 "도수 자네가 돌아와서 우린 얼매나 좋은가 몰러"라며 "도수네 아그들 소리가 난께 사람 사는 마을 같구만"라고 반겼다. 그런데 동네 어른들이 하나 둘 북망산천으로 떠나면서 30가구가 넘던 마을은 그새 20가구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대로 어른들이 세상을 뜨면 지도에도 없는 고향이 끝내 사라지는 것 아닌가? 조바심이 나던 그는 "내가 돌아오자 깨복쟁이 친구들이 언젠가 고향에 돌아오겠다고들 그래요"라며 "친구들이 고향에 돌아와 불 꺼진 집에 다시 불이 켜고 막걸리 잔을 나누는 꿈을 꿉니다"라고 간절하게 말한다.


a 쓸쓸해지는 고향...

쓸쓸해지는 고향... ⓒ 김도수

빈집이 늘어나면서 불빛이 꺼져 가는 쓸쓸한 마을…. 그가 마을을 지키기 위해 나선 첫 번째 사업은 사라진 '허락바위'를 되찾는 일이었다. 어머니들의 빨래 바위이자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던 이 바위는 단순한 돌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추억의 상징물이었다.

'허락바위'는 자신이 고향이 떠나던 12년 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수소문 끝에 어느 기관의 신축건물 준공기념 표지석으로 서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그는 동네 어른과 출향 인사들의 날인을 받아 '허락바위 이전 촉구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나도(허락바위) 진뫼마을 강가로 돌아가고 싶어요'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써서 '허락바위 이전 촉구서'와 함께 해당 기관에 부쳤다.

a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 김도수

"내가 놓여져 있던 그 자리에 서서, 마을 사람들의 삶의 애환을 지켜보면서, 섬진강의 거센 물살을 이겨내면서, 저는 그렇게 진뫼마을 앞강의 수호신으로 서 있고 싶습니다. 어서 저를 내 고향 진뫼마을 강가로 보내주세요."

일주일 뒤 해당기관 담당직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진뫼마을 주민들과 마을 출향인사 분들께 죄송하며 즉시 제자리에 갔다 놓겠습니다"라고. 그렇게 해서 '허락바위'는 '자율(自律)'이라는 한문이 새겨진 상처난 몸으로 진뫼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400년이 지나도록 강물에 빠져 죽은 자식이 한 명도 없는 것은 '허락바위'를 비롯한 여러 바위들이 수신령(水神靈)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지켜주는 '허락바위'가 강가의 제자리에 놓이자 돼지를 잡아 마을 잔치를 벌였다.

a 고단한 삶을 두고 꽃상여 타고 떠난 어머니처럼 또 다른 어머니가 고단한 길을 가다 굽은 허리로 하늘을 보고 있습니다.

고단한 삶을 두고 꽃상여 타고 떠난 어머니처럼 또 다른 어머니가 고단한 길을 가다 굽은 허리로 하늘을 보고 있습니다. ⓒ 김도수

또한 농로용 시멘트다리가 놓이면서 사라진 징검다리를 복원하기 위해 팔을 걷어 부쳤다. 그는 지지난해 추석, 고향을 찾은 출향 인사들과 동네 사람들과 함께 징검다리를 놓으며 어릴 적 추억을 되살렸다. 극진한 애향(愛鄕)의 몸짓을 지켜본 출향 인사와 동네 어른들은 그에게 '주말명예이장'이라는 비공식 직함을 선사하면서 "어이 도수 자네가 우리 마을일은 다허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그 고향이 사라져 갈 위기에 처했다. 지난 2001년 7월 건설교통부가 적성댐 등 12곳의 댐 건설 계획을 발표하면서 그의 고향은 수몰 위기를 맞았다. 그해 추석은 명절이 아니었다. 뒷산에 뜬 달도, 앞강 섬진강도, 윷놀이에 흥겨워야 할 마을회관 앞도 수심에 잠겼다.

어머니의 강이요, 모두들 끝내 돌아올 생명의 땅을 댐 건설에 묻어야 한다는 선포에 애가 탔다. 열 일을 제쳐두고 댐 건설 반대에 나섰다. 김용택 시인의 문학적 고향이자 영화 '아름다운 시절' '춘향뎐' '남부군'과 드라마 '허준'을 촬영한 천연의 아름다운 절경과 생태계의 보고인 고향을 지켜달라고 경향각지에 호소했다.

a 윷을 던지며 고단한 객지생활의 고단함을 달래는 동네 사람들.

윷을 던지며 고단한 객지생활의 고단함을 달래는 동네 사람들. ⓒ 김도수

자신의 주머니 돈과 출향 인사들의 성의를 모아 섬진강 작은 음악회를 기획했다. 한치영, 김원중 등 뜻 있는 가수들이 거의 무료출연을 해주었고 섬진강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음악회가 몇 차례 이어지면서 언론의 보도도 잇따랐으며 섬진강을 지켜야 한다는 공감대도 커졌다.

현재 적성댐 건설 계획은 보류된 상태다. 고향이 수몰되면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도 함께 수장될 것이라는 상실감으로 잠 못 이루던 그의 병도 유보됐다. 그는 천지신명께, 건설교통부 관계자에게 "가난의 눈물과 온갖 추억이 실핏줄로 흐르는 어머니의 강을 이대로 흐르게 해달라"라고 호소한다.

추석을 맞은 그는 이웃집 마실가는 기분으로 고향을 찾았다. 아무리 밟고 밟아도 아프다고 하지 않고 살풋 안기는 땅, 깨복쟁이 친구와 형제자매와 동네 어른들이 모여 윷을 놀고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타관객지의 고단함을 달래는 어머니의 땅에 발걸음 가볍게 찾았다.

a 어머니, 올 추석에는 보름달을 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어머니, 올 추석에는 보름달을 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 김도수

'전라도닷컴'에서 고향 이야기를 담은 '진뫼마을 도수네'를 연재하는 그는 여전히 젖을 만지고 구수한 정담에 귀 기울이며 어머니 품에 안겨 잠을 잔다. 그리고 마을 이장이었던 아버지의 이야기, 어머니에게 낚시대로 호되게 맞았던 이야기, 놀이터이며 사랑방이며 국회의사당이던 정자나무에 얽힌 추억을 쓰며 사모곡(思母曲)을 부르고 있다.

다음 글은 17년 전, 고향집에 찾아와 안방에 군불을 때며 홀로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쓴 글이다.

"해가 뉘엿뉘엿 거리면 대문 없는 집 돌담 아래로 아장아장 걸어 들어와 '오메' 하고 부르면 '오야, 내 새끼야 어 데 갔다 왔는가?' 자식 목소리에 반가워 어쩔 줄 모르며 부엌에서 밥짓다 달려 나와 눈물 콧물 닦아주시던 어머니.

그 부엌에 웅크리고 앉아 엄마가 해 놓으신 나무로 텅 빈방에 군불을 지피며 지금쯤, 평 밭 돌아오는 길에 오고 계시는지, 징검다리 건너 집 앞 무밭쯤 오셨는지, 부엌문을 열었다 닫았다 밖을 내다보며 벌겋게 타 들어가는 불꽃 속에 내 얼굴을 묻고, 기다림에 마음 졸여 불꽃 열기 속으로 내 마음 빨려 들어갑니다.

a 맛난 곶감을 먹이시던 어머니, 어머니는 가슴에 있습니다.

맛난 곶감을 먹이시던 어머니, 어머니는 가슴에 있습니다. ⓒ 김도수

하얀 눈이 내리던 어느 추운 겨울 날, 마을 앞 뱃마당 강줄기가 모두 꽁꽁 얼어붙었다며 따뜻한 아랫목에 파고 들어와 나와 단둘이 나누던 이야기들이 지금 아궁이 속에서 토닥토닥 타 들어가는 나무 일그러진 소리와 같았습니다. 엄마와 내가 만난 지 이십 칠 년, 그리고 헤어진 지 일년, 엄마와의 헤어짐은 날로 더해 만가고 엄마 꿈 나의 꿈은 자꾸만 멀어져 갑니다.

흙먼지 부옇게 날려있는 마루에 올라, 이십 칠 년간 잡아 당겼던 문고리를 잡고 어디에선가 불러줄 어머니 목소리에 어느새 문은 열리고 엄마 없는 텅 빈 방에서 엄마 시집 올 때 해 가지고 오셨다던 빛 바랜 솜이불을 둘러쓰고 작은 강변 마을에서 피어났던 엄마와의 사랑을 하나하나 확인해 봅니다.

밤은 깊어만 가고 희미해져 가는 기억들은 밤새도록 베갯잇을 적시며 엄마 한잔 나 한잔 나누던 톱톱한 막걸리가 이 밤, 왜 이리 먹고 싶은지 입맛을 쩝쩝 다셔봅니다. 막걸리 한잔을 놓고서 엄마와 한 모금씩 나누어 마실 때, 자식 한 모금 더 먹일 생각에 막걸리 잔 속을 계속 들어다 보시며 한 모금 한 모금 마시던 엄마의 잔이 곧 나에게로 돌아올 것만 같습니다.

우리 식솔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웃음 짓던 그 때를 생각하며 방안을 빙 둘러보다 천정 구석진 곳에서 형광등 불빛사이로 뻔득 뻔득 빛이 나는 누에 고치실 자국과 그 옆, 빛 바랜 누에 물 자국은 엄마의 얼굴이 내 얼굴로 다가오며 엄마의 졸음이 내 졸음으로 줄달음쳐 옵니다.

a 고향 집을 찾은 김도수씨 가족.

고향 집을 찾은 김도수씨 가족. ⓒ 모철홍

자취방에서 반찬 떨어져 고향집에 왔을 때, 엄마 오른쪽 이마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상처를 어루만지는 저에게 “모내기 할려고 품앗이 꾼 얻으러 밤길 다니다 골목에서 넘어졌다”고 숨겼지만 누에농사와 모내기가 겹치면서 마루에서 밤새도록 누에똥 가리시다 졸음 속에 뜰 아래로 넘어진 상처임을 저는 알고있습니다. 그 상처가 작은 강변마을로 시집와 사십 오 년간 피어났던 자식사랑의 마지막 표시였던가 봅니다.

밤새 몸을 뒤척거리는 아랫목에서, 작년 가을 솜이불 동여매어 놓았던 청국장이 이제야 숙성이 되어 뜨는 냄새가 온 방에 퍼지며 이렇게 맛있게 나는 걸 보니 엄마의 손길은 아직도 이방에 살아 숨쉬는가 봅니다.

뒷산 고목나무 아래서 초저녁부터 구슬피 울어대던 소쩍새 소리가 멈췄습니다. 다 떠나버린 내 피붙이 영혼들이 오늘 밤 어머님을 찾아 부르다 아마도 지친 듯 합니다.

또다시 텅 빈집에 어둠은 찾아오고 돌아오셔야 할 어머님은 길게길게 헤어짐만 더해가고 빛 바랜 솜이불 속에 홀로 누워, 어릴 적 새벽녘에 눈뜨자마자 엄마 젖 만지던 그때를 생각하며 이 밤을 또 지새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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