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PI 총회 한국관련 결의안은 사기극"

[심층취재] 한국대표단 몰래 안건 상정, 결의문 채택

등록 2003.09.25 17:17수정 2003.09.30 20:05
0
원고료로 응원
'만장일치', 진실 혹은 거짓

▲ 전국언론노조가 IPI결의문에 대한 신문협회의 조처를 촉구하고 있다.

일부에서 '한국관련 결의문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고 표현하는 것은 이사회와 총회 결정에 대한 혼선에서 생긴 오류다.

'노무현 대통령의 언론정책에 우려를 표시하고 한국언론이 탄압받고 있다'는 요지의 결의문은 15일 총회에서 채택됐고, '한국을 언론자유 탄압 감시대상국으로 유지하기로 한다'는 결정은 13일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물론 15일 총회 결의문도 이견이 없었다고 주장하므로 내용상 '만장일치'인 셈이나, IPI한국위원회가 결의문에 이같은 표현을 쓰지는 않았다.

15일 자정 무렵 이를 처음 타전한 연합뉴스나 뒤이어 보도한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기사에도 '결의문 만장일치 통과'라는 문구는 없다. 그러나 이후 '만장일치'가 회자되고 총회 결의문과 이사회 결정이 섞여 인용되면서 '만장일치=허위'론이 대두됐다. / 신미희 기자
최근 공정성 시비가 일고 있는 국제언론인협회(IPI)의 한국관련 결의문 채택에 대해 종신회원인 현소환 전 연합뉴스 사장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사전에 몰랐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IPI 총회에 참석한 한국대표단 대부분은 결의안에 대한 사전 설명은커녕 안건 상정 자체를 알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나 IPI가 결국 회원들을 상대로 사기극을 벌였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

특히 한국 관련 결의안임에도 IPI 한국위원회(위원장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사무국조차 결의안 상정 여부를 알지 못했다고 주장해 이번 결의안 작성을 둘러싸고 갈수록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한국위원회 규약은 주요한 사안인 경우 이사들에게 사전 면담을 갖도록 하고 있다.

회원 200여 명 중 53명이 참여해 가장 저조한 출석율을 보인 이번 IPI 총회에는 김정국 문화일보 사장과 채수삼 대한매일 사장, 김재호 동아일보 전무, 구본홍 MBC 보도본부장, 현소환 전 연합뉴스 사장, 김성윤 IPI 한국위원회 사무국장 등 6명이 한국대표단으로 참가했다.

김성윤 사무국장은 IPI 한국위원회에 파견된 조선일보 기자다. 이밖에 MBC 국제교류팀과 보도국 기자 1명 등이 업무차 동행했다. 이중 채수삼 사장과 김정국 사장, 구본홍 본부장, 김성윤 사무국장 등은 결의안 채택과 관련해 사전에 전혀 몰랐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대표단 "한국관련 안건 없다고 해서 참가했다"

대한매일 경영기획실 조세용 팀장은 지난 24일 <오마이뉴스> 기자에게 "채 사장은 결의안 자체에 대해 몰랐으며 총회에서도 결의안을 쭉 나눠주면서 '채택하겠다'고 끝내버려 읽어볼 시간도 없었다고 말했다"고 답했다. 조 팀장은 누가 결의안을 작성했는지, 어디에서 총회를 상정했는지, 채 사장을 비롯한 참석자 대부분이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조 팀장은 "신문협회 이사회와 우리 지면을 통해 공식으로 입장을 밝힐 것이므로 외부 매체와 인터뷰는 적절치 않다는 게 채 사장의 생각"이라고 전했다. 대한매일 지면에 실리는 채 사장의 해명 시기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관련
기사
- 현소환씨가 IPI 한국 결의안 작성 주도

김정국 문화일보 사장은 거듭된 취재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문화일보 비서실 직원은 "사장에게 오마이뉴스 기자의 메모를 전달했으나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고 말했다. 언론노조 문화일보 지부의 관계자는 "김 사장이 '모르고 갔다'고 말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구본홍 본부장 역시 한국관련 결의안 상정을 모르는 상태에서 참석했고, 본인 의지와 관계없이 채택됐다고 성토했다. 구 본부장은 "한국관련 안건 여부에 대해 문의했을 때 '없다'는 한국위원회 사무국 말을 믿고 갔는데 이럴 수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IPI가 한국관련 안건을 다룬다면 아예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결의안 내용에 동의할 수 없다는 그는 "일부 신문-방송끼리 싸우는 것은 사실이나 전반적으로 한국언론 상황이 심각한 탄압국면은 아니다, 한국언론이 제3세계 수준으로 취급당하는 것 자체가 웃기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한국언론 관련해서는 한국위원회 의견을 수렴, 반영하는 게 상식적인 절차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기억했다.

"예·결산 심의 등을 거친 뒤 다른 안건 관련해 투표를 진행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회원들이 투표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국관련 결의안 얘기가 나왔다. 결의안심의위원장이 결의안을 쭉 읽어 내리기 시작하더니 '채택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끝나버렸다.

내용에 문제가 많았다. 도대체 '이럴 수 있나' 싶어서 밖으로 나와버렸다. 물론 그 자리에서 이견을 제기한 사람은 없었다. 내가 영어가 됐으면 그 자리에서 따질 수 있었을 텐데 듣다가 너무 황당해서 나왔다.

밖에는 오스트리아 한국대사관 공보관이 혹시나 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도 한국 관련 내용이 없는 줄 알고 '별 거 없죠'라고 묻길래 '무슨 소리냐? 지금 한국 결의안을 낭독했다'고 알려줬다."


한국위 사무국장, 연합뉴스·조선·동아에만 보도자료 전송

회의장 밖으로 나온 한국대표단이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현 전 사장은 결의안 작성에 참여했느냐는 질문에 "안했다, 자문을 구해와서 결의안을 보고 언론인으로서 'NO라고 말할 수 없었다'고만 대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위원회 이사이자 IPI 종신회원인 현 전 사장은 IPI 이사회에 '펠로우(특별회원)'로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게 한국위 사무국 설명이다.

a IPI의 한국 결의안 채택이 '사기극'이라는 비판이 일면서 한국내 회원들의 탈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IPI의 한국 결의안 채택이 '사기극'이라는 비판이 일면서 한국내 회원들의 탈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성윤(조선일보 기자) 한국위원회 사무국장 역시 총회 현장에서 결의안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의안 채택 절차에 대한 해석은 다른 참석자와 차이를 보였다. 김 국장은 "한국대표단 중 이견을 내거나 항의한 사람은 없었다, 결의안 채택 이전에 나간 사람도 없다"며 절차상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당시 한 참석자의 목격에 따르면 김성윤 사무국장과 김재호 <동아일보> 전무는 로비 컴퓨터 앞에서 전화로 결의안 관련 기사를 어딘가에 알리고 있었다는 것.

김성윤 국장은 "당시 시간이 한국 시간으로 밤 10시 정도였다"면서 "그때쯤이면 한국에서는 시내판 제작이 한창일 때라 우선 연합뉴스에 보도자료를 보냈다, 그러나 행사장에 컴퓨터가 없어서 호텔로 돌아와 이메일로 송고했다"고 말했다.

김 국장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도 보도자료를 보냈다. 그는 김재호 전무가 '동아일보로 빨리 보내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덧붙였다.

누가 어떻게 결의안을 만들었나

이번 결의안은 IPI 본부에서 구성한 '한국조사단'이 만든 보고서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으로 파악됐다. 결의안 채택 뒤 요한 프리츠 IPI 사무총장을 면담한 한 인사에 따르면, 한국조사단은 한국의 외신기자(한국계)와 언론인, 교수 등 20명으로 이뤄졌고 이들이 올린 보고서에 근거해 한국언론 상황이 평가됐다는 것.

그 외 한국위원회가 제공하는 영자판 한국신문과 주요 회의 토론내용, 한국 언론단체의 정부에 대한 항의서 등을 참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요한 프리츠 사무총장은 조사단 명단 공개를 거절했고, '조사단의 보고에 큰 결함이 없는 한 활동이 유지되며 국제적인 조사단을 직접 파견하지 않는다'면서 '현지방문을 하면 해당국이 정치적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고 전해졌다.

따라서 한국대표단을 비롯 언론계 안팎에서는 한국언론의 실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이번 결의안은 '허위'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한국언론을 편파적으로 평가하거나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IPI의 불공정한 발표가 해마다 반복되고 있는데도 이를 방치해온 한국위원회의 무책임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다.

일부 회원들은 총회 참석을 주관하면서 비민주적인 의견수렴과 불투명한 운영 등을 방기한 한국위원회 사무국의 적절한 해명이 없을 경우 탈퇴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구본홍 보도본부장은 한국위원회 사무국 앞으로 해명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으며 MBC 역시 한국위원회에 엄중 항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송원근 MBC 국제협력부장은 "그간 IPI가 한국언론과 관련해 여러번 물의을 일으켰기 때문에 사무국에 한국 안건 상정을 거듭 확인했는데 '없다'고 답했다"며 "그런데도 이런 결과가 나왔다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그는 "사무국장이 회의장에서 (결의안 채택을) 알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며 "고의든 업무태만이든 알고서도 정보 제공을 안 했다면 앞으로 어떻게 한국위원회를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되물었다. 총회 참석을 주관하는 사무국이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는 회원들을, 그것도 가이드 없이 앉혀놓고 결의안을 채택하면 함정에 빠뜨린 것과 다를 바 없다는 해석이다.

그는 한국위원회 사무국이 사무국장을 포함한 2인에 대한 총회 참가비 지원을 MBC에 요청한 사실도 언급했다. MBC는 '회원사를 위해 뛰는 게 없다'는 이유로 지원을 거절했다. 하지만 사무국은 결의안 채택이 끝난 뒤 MBC 관계자에게 비용부담을 재차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매일과 문화일보 사장은 왜 갔는가

한편, 정부가 대주주인 <대한매일>과 신문시장 개선을 위한 '공동배달제'에 참여 중인 <문화일보>의 두 사장이 한국언론을 국제적으로 망신시킨 IPI 결의문 채택에 들러리 역할을 한 게 아니냐는 논란도 불거지고 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위원장 신학림·언론노조)은 신문개혁·언론개혁에 역행하는 이번 IPI 결의안에 동의할 수 없다면서 두 사장의 참석 경위와 결의안 채택 과정 등에 대한 진상조사를 벌이고 있다.

언론노조 대한매일 지부(위원장 임병선)은 "재정경제부가 2대 주주인 신문사 대표인 채 사장이 정부의 언론정책을 반대하는 결의안 채택에 참여한 셈"이라며 "경영인 출신으로 언론계 상황에 무지했거나 IPI 비중을 크게 생각하지 못했을지라도 적절한 처신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대한매일 지부는 지난 25일 노보를 통해 채 사장의 행보에 깊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대한매일 지부는 'IPI를 탓하기 전에'라는 글에서 "족벌신문의 약탈적 시장잠식으로 인해 생존 기로에 서 있는 신문사 사장들까지 이처럼 해괴한 결의문을 채택하는데 들러리로 참석한 점에 유감"이라며 "정부 일각에서도 정부가 2대 주주로 있는 대한매일 사장이 '한국 정부의 모든 권력이 이들 특정신문 탄압에 전시동원체제로 운영되고 있다'는 결의안이 채택된 IPI총회에 참석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척 불쾌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이재국 언론노조 신문개혁특별위원장은 "공동배달제 참여사인 문화일보 김정국 사장이 공정위의 신문시장 조사에 대한 '조중동'의 비판논리가 그대로 담겨진 IPI 결의안 채택에 이견 없이 참여했다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언론계의 한 인사는 "여러 정황으로 봐서 이번 IPI의 한국 결의안 채택은 사기극"이라며 "IPI의 처사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과 함께 한국내 회원(사)들의 탈퇴를 강하게 요구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IPI(국제신문협회), 어떤 단체인가

1951년 5월 각국 언론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결성한 국제언론단체로 국제신문편집인협회 또는 국제신문협회라고도 한다. 현재 회원수는 2000여명.

한국은 1950년대 후반부터 협회 가입을 추진하였으나, 이승만 정권의 언론탄압으로 인해 '한국언론은 자유가 없다'며 거부당하다 4·19혁명 뒤인 1960년 12월 가입을 승인받았다.

지난 2000년 11월부터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이 한국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조선일보 최우석 기자는 IPI 결의문(상임)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 기자는 이번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본부는 매년 한번씩 연례총회를 겸한 대회를 열며 연말에는 전 세계 언론의 자유상황에 관한 연례보고서를 발표한다. IPI는 지난 2001년 언론사 세무조사 이후 한국을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로는 처음으로 언론탄압 감시대상국으로 선정, 특정 언론사에 편향된 결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또 유신시절 한국의 언론상황을 미국, 스위스와 같은 수준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IPI 한국위원회 임원진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방상훈 △이사=홍정욱(코리아헤럴드 사장), 장영섭(연합뉴스 사장), 김대성(제주일보 사장), 우제찬(경인일보 사장), 김상훈(부산일보 사장), 김서웅(서울경제 사장), 김성열(동아일보 전 고문), 김정국(문화일보 사장), 김종태(광주일보 회장), 이긍희(MBC 사장), 김학준(동아일보 사장), 정연주(KBS 사장), 서창훈(전북일보 사장), 설용수(세계일보 사장), 채수삼(대한매일 사장), 윤세영(SBS 회장), 장재구(한국일보 회장), 조용상(경향신문 사장), 정재완(매일신문 사장), 최승익(강원일보 사장), 고희범(한겨레신문 사장), 현소환(IPI 종신회원), 홍석현(중앙일보 회장) △감사= 장대환(매일경제신문 사장), 최준명(한국경제신문 사장) / 신미희 기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민주언론운동협의회(현 민언련) 사무차장, 미디어오늘 차장, 오마이뉴스 사회부장 역임. 참여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을 거쳐 현재 노무현재단 홍보출판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2. 2 "부영, 통 큰 기부로 이미지 마케팅... 뒤에선 서민 등쳐먹나" "부영, 통 큰 기부로 이미지 마케팅... 뒤에선 서민 등쳐먹나"
  3. 3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4. 4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5. 5 탐욕스러운 기업이 만든 비극... 괴물을 낳은 엄마 탐욕스러운 기업이 만든 비극... 괴물을 낳은 엄마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