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서 만난 미국 쑥부쟁이

이 나라의 앞날처럼 정령치를 내려가는 길도 어둡기만 합니다

등록 2003.09.26 01:11수정 2003.09.26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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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다가 늦은 길을 나섭니다. 원추리 필 무렵 노고단에 올랐다가 노고단 정상 탐방문제로 관리공단 직원과 언짢은 일이 있은 뒤로 지리산에 정이 떨어져 한동안 지리산을 잊고 있었지요. 그러나 아침저녁으로 가을 기운이 느껴지면서 정령치에 별처럼 피어나는 구절초 꽃빛들이 눈에 환하여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오후 세시, 아무리 차로 넘는다고 해도 지리산을 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가는 길을 좀 서두르고 정령치만 둘러본다면 가능하겠다 싶어 순천에서 곧장 남원 육모정쪽으로 길을 잡습니다.

육모정까지 네시, 정령치까지 다섯시, 한 시간쯤 둘러보고 여섯시에 떠나면 중간에 어두워지겠지만 차로 오는 길이니까 상관 없겠다 싶었지요. 육모정을 지나 본격적인 지리산 일주도로로 접어들자 길 옆에는 물봉선, 쑥부쟁이, 까실쑥부쟁이, 싸리꽃 같은 가을꽃들 천지입니다. 휴일이 아니어서인지 올라가는 차는 거의 없고 내려오는 차들도 드문드문 합니다.

꽃들을 만나면 길 가에 차를 세우고 쉬엄쉬엄 쉬어가며 오릅니다. 천천히 올라도 정령치까지 다섯시까지는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내리를 지나면서 길 가에 노랑물봉선으로 보이는 꽃빛이 언뜻 스쳐가는데 그냥 지나칩니다. 중부지방이나 지리산 북부지역만 해도 비교적 흔한 노랑물봉선이 지리산 남부와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왜 그렇게 흔적도 찾을 수 없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꽃을 찾아 꽃의 자생지를 찾아가 여러가지 다양한 들꽃들을 사진으로 담고 만나보고 싶지만 일하는 틈틈이 시간을 낼 수밖에 없고 경제적인 여유도 없는 지라, 사는 곳을 중심으로 어떤 꽃들이 피고 지는지 살펴보고자 처음 시작했습니다. 즉, 이 지역의 우리꽃 생태계를 나름대로 정리해보기로 한 것인데 노랑물봉선은 내가 설정한 지역에서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꽃이기 때문입니다.

계속 오르막으로 이어지던 길의 가파름이 심해집니다. 정령치휴게소가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길가 언덕에 구절초가 고운자태를 드러내보입니다. 산구절초, 가는잎 구절초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분홍구절초, 겹구절초도 있습니다. 분홍구절초나 겹구절초는 꽃빛깔이나 모양을 보고 내가 그냥 붙여 부르는 이름입니다. 꽃들에게도 며칠 전 지나간 큰바람에 시달린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a 2003년 9월 17일 지리산의 가는잎구절초

2003년 9월 17일 지리산의 가는잎구절초 ⓒ 김해화

a 2003년 9월 17일 지리산의 분홍구절초

2003년 9월 17일 지리산의 분홍구절초 ⓒ 김해화

a 2003년 9월 17일 지리산의 구절초

2003년 9월 17일 지리산의 구절초 ⓒ 김해화

정령치 휴게소 주차장에 차를 세웁니다.

"이렇게 늦게 나서서 뭘 찍으려고 해요?"


주차장 관리인이 사진기를 들고 나서는 내게 묻습니다.

"플래시를 써야지요."

길 건너 나무계단을 오르면서 지난해 발견했던 노랑물봉선의 흔적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산비장이, 고려엉겅퀴, 물봉선들…. 그러나 지난해 노란 꽃잎흔적만 보여주었던 노랑물봉선의 흔적은 찾을 수 없습니다. 이제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용담 몇 송이를 사진에 담고 돌아서는데 건너편 등성이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사람들이 활강을 하고 있습니다.

a 2003년 9월 17일 지리산의 산비장이

2003년 9월 17일 지리산의 산비장이 ⓒ 김해화

a 2003년 9월 17일 지리산의 고려엉겅퀴

2003년 9월 17일 지리산의 고려엉겅퀴 ⓒ 김해화

걸어올라온 길을 천천히 걸어내려가 패러글라이더 활강장으로 오릅니다. 장승과 나무의자, 꽃이름표만 덩그러니 꽂혀있는 야생화 꽃밭에는 이름표와는 상관 없는 구절초만 드문드문 피어있어 애써 만들어놓은 정성이 무색합니다. 바람막이 하나 없는 등성이라 심어놓은 꽃들이 뿌리내리기 힘들었겠지요.

바람이 잔잔합니다. 바람 없는 것을 걱정하면서도 사람들이 활짝 날개를 펴고 잘도 날아오릅니다. 사람들이 날아오르는 틈틈이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떼들이 휘파람소리를 내며 귓전을 스치듯 날아댑니다. 먹이를 잡는 것인지 가까운 곳 어디 둥지가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날개를 단 사람들은 다 날아갔습니다. 활강장 윗쪽으로 걸어올라가는데 개망초인 것 같은 꽃무더기가 눈길을 잡아끕니다. 개망초인줄 알았습니다. 그냥 지나치려는데 꽃잎이 개망초와 다릅니다.

a 2003년 9월 17일 지리산의 미국쑥부쟁이

2003년 9월 17일 지리산의 미국쑥부쟁이 ⓒ 김해화

a 2003년 9월 17일 지리산의 미국쑥부쟁이

2003년 9월 17일 지리산의 미국쑥부쟁이 ⓒ 김해화

꽃크기는 개망초보다 조금 큰 정도지만 꽃잎이나 잎의 생김새가 미국 쑥부쟁이가 분명합니다. 처음에는 화원재배용으로 들여왔다고 하는데, 춘천지방에서 들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여 급속도로 번져가고 있는 귀화식물이 바로 이 꽃입니다. 게다가 평야지역도 아닌 해발 1172m가 넘는 고산지역에 미국 쑥부쟁이라니- . 패러글라이더 활강장 옆과 뒤에 띠처럼 무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엄청난 번식력으로 구절초들을 밀어내고 군락을 이루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 같습니다.

아마 어느 들판에서 패러글라이더에 묻어온 씨앗이 싹을 틔운 모양입니다. 날아오르려는 사람들의 욕망에 묻어 함께 날아올라 해발 1172m의 지리산 정령치에 또아리를 튼 미국 쑥부쟁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지리산 곳곳에서 자리를 넓혀가고 있겠지요.

걸어올라와 날아서 내려가버린 사람들, 날아오르는 사람들을 보고 탄성을 지르던 구경꾼들도 다 떠나고 어둠이 내리는 정령치를 뒤로 하고 내려오는 길이 어둑어둑 해집니다. 미국이라는 이름앞에 속수무책으로 점령당하는 이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앞날처럼 지리산을 내려가는 길도 어둡기만 합니다.

미국 쑥부쟁이

▲ 2003년 9월 17일 지리산의 미국쑥부쟁이
국화과의 여러해살이 풀로 근경은 굵고 짧으며 줄기는 곧추서고 가지가 많이 갈라집니다. 아랫부분은 목질화해서 까칠까칠합니다.

가지는 줄기와 직립으로 붙고 끈은 종종 처집니다. 잎은 어긋나고 선상피침형으로 종종 낫모양으로 휘는데, 가장자리는 밋밋하며 양면에 털이 거의 없으나 가장자리에 퍼진 털이 있습니다.

꽃은 8-10월에 백색으로 피고 가지와 줄기 끝에 달립니다.

북미 원산의 귀화식물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중부지방에 많이 펴져 있습니다. 털쑥부쟁이, 중도국화라고도 부릅니다. / 김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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