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癖)

[나의승의 음악이야기33]

등록 2003.10.22 10:12수정 2003.10.22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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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관이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했던 그 때부터 욕망과 속도에 눈이 멀어 보이는 것 없는 컴퓨터 시대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이유가 되어 얻어지고 잃어버린 많은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상습적으로 무감각하다.

초고속 전철을 타게 되는 한 철길 옆의 이름 알지 못할 야생화는 상처받고 사람들은 그들이 거기 있었는지 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초고속 인터넷에서는 사람이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할 폭력의 언어들이 사람들을 현기증 나게 하고, 그들은 그들의 네모진 바보상자 앞에서 상상력과 감성을 강탈 당해온 억울함을 하소연 할 곳 없어 방황하게 될지도 모른다.

정보화 사회는 구멍가게처럼 후미진 골목길 어귀에 있어서 간혹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는 작은 음반가게들을 사라져가게 하고 우리를 번화가의 대형 매장들과 인터넷 쇼핑몰들을 향해 토끼몰이를 한다.

지식인 사회라는 단어는 어쩌면 독서량에 문제 있는 우리에게 예술마저도 지식과 정보의 일부인 것으로 착각하게 까지 하는데….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이벌식 타자기'가 없이는 한 줄의 글도 남기지 못하는 시나리오 작가가 있고 아끼는 만년필 없이는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이 존재한다. PC가 필요치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옳다.

그들은 그들의 습관이 있어서 삶을 존재하게 하는 더 커다란 의미를 알고 사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안에는 보석들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박제가(1750-1805) 선생의 산문을 옮겨 '궁핍한 날의 벗'이라는 제목으로 안대회씨가 쓴 책에 짧고도 좋은 글이 있어 여기 옮겨 본다.

"벽이 없는 사람은 버림받은 자이다. '벽'이란 글자는 질병과 치우침으로 구성되어 편벽된 병을 앓는다는 의미가 된다. 벽이 편벽된 병을 의미하지만, 고독하게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전문적 기예를 익히는 자는 오직 벽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하다.


김군은 늘 화원으로 달려가서 꽃을 주시한 채 하루 종일 눈 한번 꿈쩍하지 않는다. 꽃 아래 자리를 마련하여 누운 채 꼼짝도 않고 손님이 와도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다. 그런 김군을 보고 미친 놈 아니면 멍청이라고 생각하여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자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그를 비웃는 웃음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 웃음소리는 공허한 메아리만 남긴 채 생기가 싹 가시게 되리라.

김군은 만물을 스승으로 삼고 있다. 김군의 기예는 천고의 누구와 비교해도 훌륭하다. '백화보'를 그린 그는 '꽃의 역사'에 공헌한 공신의 하나로 기록될 것이며, '향기의 나라'에서 제사를 올리는 위인의 하나가 될 것이다. 벽의 공훈이 참으로 거짓이 아니다.

아아! 벌벌 떨고 게으름이나 피우면서 천하의 대사를 그르치는 위인들은 편벽된 병이 없음을 뻐기고 있다. 그런 자들이 이 그림을 본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을사년(1785) 한여름에 초비당 주인이 글을 쓴다."


박제가 선생의 글을 읽고 필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어 쉰다. 나 역시 고약한 벽의 소유자로 부끄러운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제 여름도 물을 건너갔고, 가을이다. 박제가 선생의 글에 힘을 얻어 한 줄 더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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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너 빌스마'(Anner Bylsma)의 J.S.Bach 무반주 첼로 모음곡 중에 '스미스 소니언'재단의 '스트라디바리우스' '세르바이스' 첼로를 빌려서 연주한 CD가 있다. 그 음악을 들을 때 대개 필자는 '와인'을 마신다.

"사십년 가까이 공직 생활을 했지만 술 한 모금 하지 않았어도 사회생활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니까 너도 마시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신 아버지 말씀을 가끔 거역하는 불효자가 된 것이다.

할아버지 역시 아버지께 그렇게 말씀 하셨다는 데, 최소한 삼대 이상의 금기를 깨어 가면서 그렇게 하게된 까닭은, 와인과 좋은 음악과 좋은 사람, 세 가지가 함께 할 때처럼 즐거운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쨌든 빌스마의 바흐는 이 가을, 마음과 공진한다. 그것을 다 듣도록 모두 마시지 못하면, 한 곡쯤 더 듣는데 이브 몽땅(Montand)의 고엽(Les Feuilles)을 선곡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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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재즈적인 샹송으로 손꼽힐 이 음악은 '캐논볼 애덜리'와 '마일즈 데이비스'의 연주도 좋고, '이바 캐시디', 또는 '그라펠리'의 바이올린도 좋을 것이다. 그 외에도 '고엽'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연주자들이 그들 고유언어의 연주를 남겼다.

몇 잔의 와인으로 좋은 대화와 함께 밤을 지새울 수도 있을 가을에, 한가지 아쉬운 것은 한국의 와인 값은 너무도 비싸다는 사실이다.

'샤또 마고'(어떤 사람은 이 와인을 들어, '거의 섹스'라는 표현을 한적이 있다)라는 이름의 '특등급 보르도 와인'은 한국의 어느 와인 샵에서 65만원 정도 하는데, 몇 배쯤 물가가 비싼 일본에서는 오히려 21만원이었던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물론 수입 당시의 환률과 빈티지(수확연도)에 따라 가격은 변동한다. 그렇다고 해도 한국의 와인값은 대단히 비싼 편이다. 이 좋은 가을에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지만 언젠가는 바뀌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적은 가격에 훌륭한 맛과 향을 간직한 와인도 있어서 이 가을은 간혹 쓸쓸하지 않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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