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건 눈꺼풀이죠"

[새벽을 여는 사람들 45] 새마을 열차 홍익회 사원 신미숙씨

등록 2003.10.30 14:19수정 2003.10.31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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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가입시더!"


경쾌한 부산 사투리가 밤의 정적을 가른다. 홍익회 사원 신미숙(27)씨는 밤 11시 부산행 새마을호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며 일과를 시작한다. 부산과 서울을 오가는 왕복 기차에 몸을 싣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가 버린다.

"중심 잡는 건 선수에요! 아무리 과속으로 달리는 버스라도 자신 있어요.(웃음)"

신씨는 덜컹거리는 열차에서 오래 근무하다보니 오히려 움직이지 않는 땅을 밟고 있는 것이 어색하다며 너스레를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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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홍익회 물품 보관소에는 각종 신문과 잡지에서부터 북어국밥까지 가지런히 포장된 물품이 신씨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건만이 아니다. '서울'이라는 장소가 무색할 만큼 전국에서 모여든 홍익회 영업사원들이라서 곳곳에서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마치 싸우는 것 같은 음성으로 다정한(?) 대화를 나누는가 하면 서로의 안부를 묻는 한없이 느린 인사말이 귓가를 스쳐 자꾸만 주위를 둘러보게 만들었다.

전국 도처의 사투리 만큼이나 다양한 물품들이 가득한 물품 보관소는 마치 있을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는 보물 창고 같았다. 서울역으로 먼저 물품을 실어 보내고 제복을 가다듬고 있는 신씨는 벌써 5년차 홍익회 영업 사원이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무직에서 2년을 근무한 후 뒤늦게 대학에 진학했다. 관광학을 전공한 신씨는 1997년 IMF 한파에도 불구하고 졸업하던 해인 99년 홍익회에 입사했다.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일찍이 사회를 배우기 시작한 신씨는 독립을 꿈꾸며 장사 수완을 쌓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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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춥다!"
신씨가 느낀 서울의 첫 인상이었다. 따뜻한 남쪽 나라 부산이 고향인 그녀는 서울의 추위에 대해 "살을 애빈다" 고 표현했다. 그 후 일에 쫓겨 좀처럼 서울을 둘러 볼 틈 없던 신씨가 유일하게 방문한 서울의 명소는 동대문이다.


그녀에게 서울은 그저 사람과 차가 많은 지역이자 부산에 비해 음식이 조금 싱거운 도시에 지나지 않는다. 남들 쉴 때 사람과 부대끼며 더 바쁘게 일해야 하는 일상을 보내느라 신씨에게 사람 붐비는 서울 나들이는 그리 매력 있는 여가 선용이 아니다.

주로 새마을호 스낵바에서 일하는 그녀는 각 지역의 특산품 판매와 서비스 카 운행을 겸한다.

"처음엔 부끄러웠죠. 사람등을 보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일단 문이 열리는 순간 저에게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잖아요. 얼굴이 빨개지는 건 기본이고 도대체 손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너무 떨려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어요."

'모' 아니면 '도'라고 자신을 소개한 신씨에게도 영업 초짜의 수줍음은 있었지만 불과 일주일만에 벗어던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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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한 겨울엔 입김까지 나온다는 열차 스낵바. 가장 춥고 가장 더운 스낵바는 진동이 심한 만큼 그 소음 또한 만만치 않은 공간이다. 쪽잠을 청할 수 있는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와 썰렁한 진열장이 그녀를 맞이한다. 한기 서린 스낵바는 그녀의 손길을 거쳐 곧 훈김이 감도는 따뜻한 공간으로 돌변한다.

햇밥, 닭죽, 시골떡국, 우동에서부터 맥주와 간단한 안주류까지 보기만 해도 침넘어가는 야식들이 즐비하다. 그 중 승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음식은 '호~' 하고 입으로 식혀먹는 쫄깃한 우동이다.

기차가 출발하는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가 신씨에겐 가장 분주한 시간이다. 새벽 1시를 넘어 기차가 천안을 지날 즈음엔 곤히 잠든 승객들과 함께 스낵바도 잠시 한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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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좀처럼 쉬지 못하는 그녀의 다리는 365일 부어 있다. 항상 서서 승객을 맞이해야 하는 통에 도무지 다리의 부기가 빠질 틈이 없다. 또 매번 무거운 물건을 싣고 나르느라 젊은 나이에도 어깨결림과 허리통증을 달고 산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힘든 게 일이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금껏 잘 해내고 있잖아요. 남들도 다 하는데 저라고 못 하라는 법 있나요."

오히려 정신없이 바쁜게 더 좋다는 신씨에게 유일한 어려움은 '여름 더위' 뿐이다. 모든 시원하게 거침없이 말하는 그녀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도 볼에 깊은 우물을 만드는 환한 미소이다.

제복을 입는 그 순간부터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신씨는 일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단 한번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신씨의 웃음을 뺏는 승객들도 있으니 다름 아닌 취객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구토는 기본이죠. 특히 야간 열차일수록 술을 드시고 타는 승객들이 많아요. 술취한 승객들은 다른 승객들에게 피해를 줄까 스낵바로 옮겨 놓곤 하는데 정말 천태만상이에요. 자기 집 안방인양 드러눕지를 않나 완전히 인사불성된 그 분들에겐 아무 말도 통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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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취객 외에도 그녀를 한숨짓게 하는 승객이 더러 있다.
"명색이 내가 새마을호를 타는데, 당연히 최고급의 서비스는 받아야지"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자부심을 갖는 것까지는 좋으나 이것이 자칫 왜곡된 선민 의식으로 번져 무시하려고 들면 신씨도 절로 힘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가시나야!"
"야, 이루 와바라!"

모진 소리를 들어도 제복을 입은 신씨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웃는 일 뿐이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반말은 기본이고 가끔 'ㅆ' 소리도 듣는다. 그녀는 영업을 하면서 점점 자신이 독해져가는 것 같다고 씁쓸해 한다.

신씨의 수난은 쉬이 끝나지 않는다. 직업엔 귀천이 없다지만 영업직을 은근히 무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같은 일을 해도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 사람도 있다.

"똑같은 말을 해도 제가하면 믿질 않아요. 반드시 승무원이 와서 말을 해줘야 그때서야 호응을 하죠.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무조건 승무원을 불러오라고 으름장을 놓는 분들이 있어요. 아주 가끔 승객들과 싸울 때도 있는데 막상 승무원이 오면 '내말은 그게 아니고….' 라며 갑자기 말을 바꿔요. 그럴 땐 정말 내가 이 일을 해야 되는지 회의가 들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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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새벽이 다가오자 사정없이 떨어진 기온 탓에 승객이 빠져나간 스낵바는 한기가 감돈다. 모처럼 짬이 난 신씨는 서늘하게 식어버린 발을 간이 난방기에 녹이며 호두 과자 영업을 준비한다.

"남의 돈 받아먹기 참 힘들죠."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사회 생활을 통해 신씨가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남의 돈 받아먹기' 힘들다는 것. 일은 힘들지만 그래도 보람을 느끼는 것은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모를 승객들이 먼저 인사를 건네올 때이다. 별것 아닌 작은 인사 한마디에 신씨는 '정말 똑바로 살아야 겠구나'라는 다짐과 함께 그간의 설움을 달랜다.

"조금만 눈높이를 낮추고 자존심을 버렸으면 좋겠어요. '내가 이만큼 공부를 했는데 당연히 그만큼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라는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이 더러 있는 것 같아요. 처음부터 너무 모든 걸 다 가지고 시작하려는 건 큰 욕심 아닐까요.

일단 모든 일이든 부딪쳐 보며 조금 낮은 곳에서라도 시작해 천천히 차근차근 쌓아갔으면 해요.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데, 방황하느라 괜히 소중한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지 말았으면 해요."

청년실업을 바라보는 신씨의 솔직한 평이다. 정치에 그리 깊은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 사회를 돌아보는 신씨의 시선엔 짙은 안타까움이 배어 있다. 그러나 아무리 무관심하려 해도 스낵바에 있다보면 신문에 보고된 경제 기사보다도 더 정확한 체험 경제를 느낄 수밖에 없다는 신씨. 결국, 우리의 작은 일상이 정치와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그녀는 몸소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아휴, 솔직히 정치 같은 건 잘은 모르지만, 서민들이 사는 게 모두 힘들다는 건 알아요. IMF가 잘 해결됐다지만 99년 제가 입사한 이래 매해 매출이 줄어들고 있어요. 소비자 심리가 감소돼 계란은 이제 거의 삶아서 다니고 어떤 경우엔 콜라 하나를 여섯 명이 나눠 먹기도 하더라구요. 정말 손을 떨며 물품을 구입한다는 게 피부로 느껴질 정도죠."

신씨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보고 듣고 느끼게 되는 사회 현실에 "속으론 천불이 난다" 며 적어도 최소한 자신만이라도 "남에게 피해주지 말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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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오늘 매출이 그녀의 예상을 웃돌았다. 하지만 안심하긴 이르다. 다른 열차의 매출을 모르는 한 아직 영업 결과를 평가 할 수 없다. 그저 잠깐이나마 신씨는 평소보다 평균치를 웃도는 매출에 작은 안도감을 느낄 뿐이다.

환기가 잘 안 되는 스낵바에는 온갖 음식 냄새가 진동한다. 맛있게 먹는 사람이야 좋겠지만 이를 지켜보거나 음식 찌꺼기를 청소해야 하는 입장으로선 음식 냄새를 맡고 있는 게 그리 편하지 않다.

새벽 3시. 신씨는 모든 쓰레기의 분리 수거를 끝으로 일정을 마감한다. 처음 일을 준비할 때의 생기 발랄함이 피곤함에 묻혀버렸다. 곱게 빗은 단정한 머리에선 지친 듯 잔머리들이 빠져나오고 신씨의 목소리 또한 작게 줄어들었다.

"나이가 조금이라도 어릴 때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해 보았으면 해요. 제가 지금보다 더 어릴 때 어른들이 그런 말을 하면 잘 이해가 안 됐는데 이제서야 구구절절 느끼네요. 배우고 싶은 것들이 참 많았는데 아무리 잠을 줄이고 부지런을 떨어도 도무지 짬이 나질 않네요."

불규칙한 생활에 쉬는 날이면 몸이 지쳐 가끔 하루 종일 잠을 자게 된다는 신씨가 얼마 전 용기를 내어 수영 강습을 신청했지만 배운 날은 불과 보름도 채 되지 않았다. 잠자는 시간을 3∼4시간으로 줄이고 일부러 새벽 시간에 신청을 해도 대중없는 일과로 인해 그녀가 매번 참석하기란 무리이지 싶다.

욕심도 많아 운동 외에 '피아노'도 배워보고 싶다는 신씨는 직장 생활로 인해 하고 싶은 많은 걸 포기해야 하는 환경이 조금 안타깝다고 한다. 이어 그는 "나중으로 미루지 말로 조금이라도 어릴 때 하고 싶은 건 꼭 해봐야 후회하지 않는다"며 인생 선배로서 그보다 나이 어린 후배들에게 누차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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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건 눈꺼풀이죠."

편안한 여행에 몸을 맡긴 채 잠을 잔 승객들이 기지개를 피며 승강장을 빠져나간다. 이에 반해 무거운 눈꺼풀을 지탱하고 있는 그녀의 눈은 피곤함에 지쳐 빨간 토끼 눈이 돼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인 '어머니' 와 오리지널 경상도 사나이 '아버지'라는 신씨. 또 매번 싸우지만 돌아서면 잊어먹고 웃어버린다는 삼형제들 역시 그녀에겐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들이다.

"옆에서 아무리 말을 해도 '시끄럽다' 혹은 '됐다' 라는 아버지 말 한마디면 모든 게 다 평정이 돼죠.(웃음) 하루 종일 집에 있어도 서로 잠자는 시간이 다르기에 '들어 왔나?' 다음엔 '더 자라' 라는 말 정도만 나눠요."

사실 신씨는 내년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이다. 결혼 후 건강한 가정을 꾸리고,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 안할 만큼 재산을 모으고 싶다는 신씨에게 평범하지만 바램이 하나 있다. 자신을 위해 100% 헌신하는 어머니와 겉으론 무뚝뚝하지만 속 깊은 아버지의 건강이 그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두 분만 건강히 오래 오래 산다면 앞으로 더 바랄 게 있나요. 그 이상 바랜다면 욕심인 것 같기도 하고. 그저 그냥 남들 사는 것처럼 큰 욕심 없이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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