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타작하는 마당에 아이를 들이지 말라

[시골마을 가을걷이 풍경 5] 1976년 늦가을 콩 타작

등록 2003.11.01 09:30수정 2003.11.01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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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붉게 익어갈 무렵
감 붉게 익어갈 무렵김규환
밭 콩보다 논두렁 콩이 더 많아


잡곡(雜穀)을 섞어 먹는 혼식(混食)이 몸에 좋듯 섞어짓기 혼작(混作)이 농사에 좋다는 건 사람들이 다 안다. 그 뿐이 아니다. 농작물도 먼저 알아서 병해충으로부터 강인한 생명력을 갖게 한다. 특히 콩을 심으면 없던 질소비료도 공중에서 끌어와 여러 이웃 작물에게 나눠준다.

제일 위에 감나무, 그 아래에 옥수수 말라 비틀어져 있다. 다음으로 수수와 조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맨 아래에 콩이 있었는데 그 사이에 늦여름에는 가녀린 열무와 얼가리 배추가 쑥쑥 자랐다. 반 마지기밖에 안 되는 좁은 땅에서 자란 밭 콩은 얼마 안 된다.

이런 밭 콩보다 더 많은 수확은 논두렁에서 난다. 장구, 미꾸라지, 뱀 닮은 좁고 긴 논 다랑지 논두렁은 콩에게는 생명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적지(適地)다. 따로 거름을 주지 않아도 논물에 함유된 양분을 다 빨아먹고 줄기도 굵고 튼튼히, 키도 훤칠하게 자랐다가 막판에 논물을 빼주면 콩잎이 먼저 누렇게 변해 한 잎 두 잎 떨어진다. 그마저 소에게 먹였던 시절이 있었다.

잘 익은 콩
잘 익은 콩김규환
콩 거둬 집채만한 짐 지고 오시는 아버지

콩 수확은 따로 시간을 내서 할 여유가 없다. 나락(벼) 베러 가서 돌아오는 길에 잠깐 베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느새 해가 저물어 간다. 굳이 이렇게 하는데는 따가운 볕과 건조한 바람에 언제 톡톡 벌어져 콩알이 바닥에 떨어질 나뒹굴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린 우리라고 그 작업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어른들은 손아귀 힘이 세고 콩깍지 잡는 방법과 낫질 솜씨도 좋아 아무 문제가 안 되었지만 나에겐 사실 잘든 낫도 콩 대를 자르는 건 쉽지 않았다. 아이들은 어른들과 함께 몇 번 베어보고는 뿌리 채 뽑아 흙을 털어 가지런히 모아뒀다.

이삼일 바짝 말렸다가 수수깡에 옥수숫대 중간 중간에 찔러 두고 소나무가지 둘러 칡넝쿨을 떠서 세 갈래로 묶으면 집채만하다. 지게와 사람이 보이지 않게 가득 한 짐 지고 산길을 내려오는 아버지는 오랜만에 무거운 짐을 지니 될(힘에 겨워 벅차다는 뜻의 표준말. 으뜸꼴은 '되다') 수밖에 없다.


콩이 깔린 마당 얇게 깔리면 노인과 아이는 접근 금지 구역이 됩니다.
콩이 깔린 마당 얇게 깔리면 노인과 아이는 접근 금지 구역이 됩니다.김규환
도리깨질, 몽둥이로 두들기고 챙이로 까불고…

추석 무렵 새로 들인 마당 황토 흙은 몽글게(낟알이나 흙이 까끄라기나 허접 쓰레기가 붙지 아니하고 깨끗하다.) 잘 다져져 따로 덕석(일반적으로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멍석'이라 하지 않고 '덕석'이라 했다.)이나 포장을 깔 필요가 없다.

식구가 여럿이라 밟는 사람이 많아 단단해진 마당을 두 번만 싸리 빗자루로 깨끗이 쓸어주면 모래 하나 독자갈(돌과 자갈)도 염려되지 않았다. 마당에 콩 대를 부리고 짬을 내서 아버지는 휘휘 돌려가며 도리깨질을 한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어머니는 기다란 작대기로 팍팍 두들겨서 알이 빠진 콩 대를 염소에게 가져다 던져 주신다.

콩이 바닥에 쫘악 깔리자 움직일 때마다 발바닥이 맨발인 듯 콩콩 박히듯 지압을 하는 느낌이다. 두꺼운 나일론 양말을 신었지만 고무신을 신었기 때문에 그 감촉은 대단했다. 평평한 바닥에 언제 미끄러질지 몰라 열 두 살이었던 나는 조심조심 걸어다녀도 몇 번을 넘어졌는지 모른다.

전라도 사투리도 챙이라 부르는 키. 요즘 키질하는 아는 아낙 보기 힘듭니다.
전라도 사투리도 챙이라 부르는 키. 요즘 키질하는 아는 아낙 보기 힘듭니다.김규환
낮잠 자다 깨어난 막내 동생 콩 위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여동생은 언제 깨어났던지 마루에 걸터앉아 식구들이 콩 타작하는 모습을 두리번거리며 지켜보다가 뚤방(마루 아래의 턱이 진 곳으로 마당보다 높은 땅)을 서서히 걸어 내려와 콩 위를 걷는다.

"엄마! 엄마! 엉엉엉."

어머니를 두 번 부르고는 울음부터 터트렸다.

"아가, 오지 말고 거기 있어라와~"
"엄마한테 갈 테야."

어머니가 손을 잡아주기 전에 아이는 마당 위를 뒤뚱뒤뚱 걸었다. 순간 미끄러지더니 땅 바닥에 나뒹굴었다. 다행히 머리는 다치지 않았지만 옆구리가 아픈지 연신 만지며 울고 있다.

"긍께 엄마가 오지 말라고 했지?"
"엄마 아퍼."
"침 한 번 뱉고 하늘 쳐다봐라."
"퉤~."

울음을 그쳤지만 아이를 보는 통에 나는 더 이상 일을 거들지 못했다. 몸빼 바지를 입고 연신 챙이질(키로 검불과 먼지를 골라내고 알곡만 모으는 전라도지역의 방언. 키질)을 해낸다. 얼마 되지 않을 것 같은 콩이 누렇게 가마니에 쌓인다.

그 무렵 까만 돼지가 우리를 곧 뛰쳐나올 듯 "꽥꽥"거리며 구정물을 달라한다. 아버지는 일에 방해가 되었던지 작대기로 한번 두들겨 패주었다. 잠시 뿐 울음을 멈추지 않자 어머니는 일을 멈추고 밥 태기 섞인 구정물을 한 바케스 퍼다가 밖으로 튀어나온 구유에 훅 부어주자 부글부글 콧바람을 불어가며 밥알과 채소 뿌리를 건져먹는다.

김한글, 김세종, 김해강이가 콩 바다에서 놀고 있습니다. 김솔강이는 아직 보이지 않는군요. 이렇게 두껍게 깔리면 문제가 없지만 얇게 널어 놓으면 꼭 일이터져 코 깨지는 일이 잦았답니다.
김한글, 김세종, 김해강이가 콩 바다에서 놀고 있습니다. 김솔강이는 아직 보이지 않는군요. 이렇게 두껍게 깔리면 문제가 없지만 얇게 널어 놓으면 꼭 일이터져 코 깨지는 일이 잦았답니다.김규환
콩을 갖고 놀다 콧속에 콩이 들어가기도...

그날 집에서 거둔 콩은 흰 메주콩 두 가마, 검정콩 두 말, 팥 한 말이었다. 온갖 먼지를 뒤집어 쓴 어머니는 머리에 두른 수건으로 대충 털어 내고는 저녁밥을 앉히러 정지 문을 열고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아버지는 쭉정이를 골라 쇠죽에 같이 삶으셨다.

저녁 무렵 넘어졌던 사실을 까맣게 잊었던 동생은 가마니에 넣어둔 콩을 조막 만한 손에 한 줌 쥐어 만지작거리며 놀았다. 아무 문제없겠거니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비린내 가득한 알갱이를 입에 몇 개 넣어 물고 있더니 어느새 다섯 살 짜리 아이는 콩을 입안에 넣는 것도 모자라 콧구멍에 넣다 뺐다를 반복했던 모양이다.

저녁밥을 먹을 무렵 집안엔 소동이 일었다. 코와 뒤섞인 콩이 탱탱 불어 빠져 나오지 않자 코가 막혀 숨쉬기가 거북하자 울어댄 것이다.

일단은 어머니가 달래서 안심시키고는 코를 쥐어짜듯 눌러 빼보았지만 허사였다. 아버지는 바늘을 찾았고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은 호롱불에 바짝 다가가 한 시간 여 씨름을 하고서야 간신히 빼냈다.

붉은 팥으로 동지 팥죽을 쒀 먹을까, 호박죽을 쒀 먹을까?
붉은 팥으로 동지 팥죽을 쒀 먹을까, 호박죽을 쒀 먹을까?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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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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