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우리 아이들을 기억하며...

3일 대학로 자살학생 추모행사 열려

등록 2003.11.03 20:24수정 2003.11.04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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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오후 5시 30분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자살학생을 위한 추모행사가 열렸다.

이 날 추모행사는 입시제도에 시달려 자살을 하는 학생들을 추모하기 위해 '학벌없는 사회'와 전교조, 서울중고등학교학생연합 등의 단체에서 마련한 행사다.

추모행사는 '학벌없는 사회' 이성민(22)씨의 사회로 전교조 교사와 학생 그리고 대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됐다.

무대에서는 불합리한 입시제도로 인해 고통받는 학생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물이 방영됐다. 쌀쌀한 날씨에도 참석자들은 촛불과 국화꽃을 손에 들고 영상물을 지켜봤다.

이어서 "한 죽음을 추모하며"라는 제목의 추모시를 대학생 신직수(20)씨가 낭독하자 추모행사의 분위기는 점차 숙연해지기 시작했다.

추모시를 낭독한 신직수씨는 "입시지옥이란 말은 학벌위주의 사회 때문에 야기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학연은 사회적 소통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된다"고 지적했다.

입시지옥을 표현한 퍼포먼스도 펼쳐졌다. 한 학생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책상을 보자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학생 주위에는 '공교육 붕괴', '입시지옥' 등 학생들이 느끼고 있는 현실을 나타내는 쪽지가 붙어 있다. 학생은 끝내 자살을 하면서 퍼포먼스는 마무리됐다.


자유발언에서는 학생, 교사, 대학생들이 차례로 무대에 올라 교육문제와 자살학생에 대한 의견들을 내놨다.

김주익 열사 추모 리본을 달고 무대에 올라온 전교조 원영만 위원장은 "학생들, 노동자들, 농민들이 자신의 목숨을 끊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것은 그 분들만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들의 죽음"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원 위원장은 "이 사회의 무관심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고 하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영동고등학교 1학년 주영민(17)군은 많은 학생들이 자살을 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같은 청소년의 입장으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면서 "학벌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민주고등학교연합 박성기(20) 위원장은 자신도 "일주일전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고 밝히면서 "하지만 죽지 않고 살아서 싸우는 것만이 의미 있다"고 말했다.

끝으로 원위원장과 고등학생 박엄지(17)양이 함께 공동성명서를 낭독하고 행사는 마무리 됐다.

행사는 당초 예상보다 참석자가 적었다. 하지만,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행사 끝까지 자리를 뜨는 사람은 없었다.

"무조건 어른들의 탓만으로 돌리고 싶지 않아요."
[인터뷰] 행사참여자 박엄지양

행사에 참여한 학생중 한 고등학생을 만나봤다. 생물학자가 꿈이라는 박엄지(17)양은 추위에 떨면서도 행사 내내 자리를 지켰다.

- 학생들의 죽음을 접하며 느낀 감정은?
"말 그대로 감정의 열거였어요. 슬프고 착잡하고 우울하고 때로는 화도 났죠."

- 학생으로서 우리 사회를 보면서 느끼는 점은?
"제가 학교를 사랑하니까 학교의 변화 필요성을 느끼듯이 저는 세상을 사랑하니까 세상이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 어른들이 밉지는 않나요?
"미운 것도 있지만 무조건 어른들의 탓만으로 돌리고 싶지 않아요. 자신, 학부모, 사회의 인식이 다같이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제들을 방치한 어른들의 탓도 있지만, 일단은 학생 스스로 바꿔야 하고요. 그걸 어른들이 도와줘야 한다고 봐요."

- 사회문제에 학생들이 무관심하다는 말도 있는데….
"언론에서는 학생들이 썩었다고들 말하지만 실제적으로 그렇지만은 않다고 봐요. 아침에 매일 신문 읽으며 등교하는 친구들도 많아요. 친구들끼리의 대화에서도 '이런 건 잘못된 것 아니니?'하면서 토론도 해요."

- 생물학자가 꿈이라면 사회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먼 것 같은데….
"저는 정치와 생활을 따로 놓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사는 거죠."

청소년들은 결코 사회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들이 만들어낸 잘못된 틀 속에 갇혀 있을 뿐이다. 생활 속에서 정치성을 찾아가는 박보람양의 모습을 보며 힘든 교육의 틀안에서 우리 아이들이 꿋꿋이 버텨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전용

성명서
학생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학벌사회에 맞서서

한국사회는 과연 사람 살만한 곳인가? 나이 어린 학생들이 입시에 짓눌려 해마다 줄줄이 목숨을 끊는 나라. 거의 모든 학생들이 한 번쯤 자살 해보겠다고 생각하는 나라. 그런데 이런 죽음에도 무릅쓰고 해마다 입시경쟁은 아무렇지도 않게 되풀이되는 나라 - 언론은 수능이 몇 일 남았느니 이렇게 공부하라며 입시경쟁을 부추기고, 길거리에서는 합격을 바란다며 수험생들을 위한 여러 상품 팔기가 한창이고, 출판시장의 거의 절반을 입시 문제집이 차지하고 있다 이것이 제정신인 사회인가?

우리는 오늘 죽음의 입시판을 걷어치우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사람 죽이는 경쟁은 학벌사회 때문에 생긴다. 한국은 사회 권력을 서울대를 비롯한 몇 개 대학출신들이 차지 한 채 지배하는 나라다. 학생들은 그러한 지배집단에 들어가기 위해 죽기 살기로 경쟁한다. 학교 교육은 어떻게 하면 그러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지 시험문제 잘 푸는 법을 알려주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학생들은 별 쓸모 없는 지식을 오로지 입시경쟁에서 남을 누르고 일류 대학에 가기 위해 배우고 있다.

학생들이 나약해서 죽었다는 허튼 소리는 그만해라. 학생들은 이러한 학벌사회가 만든 희생자다. 희생자는 이미 죽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지금 살아 있지만 죽어 가는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학생들뿐만 아니라 얼마 전에는 농민도 죽고 노동자도 몇 명씩 죽었다. 학생들과 노동자 농민 모두 학벌사회가 죽인 희생자다. 못 가진 사람들은 짓눌리고 빼앗겨야만 하는 이 땅에서 학생들은 지배할 사람과 지배받을 사람을 가려내는 신분결정 경쟁에서 죽었고 노동자 농민은 이른바 일류대학을 나와 사회지배층이 된 자들이 하도 많이 빼앗고 짓눌러서 죽은 것이다.

여기 모인 우리는 죽은 학생들을 마음 속 깊이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죽어 가는 학생들이 살아날 수 있도록 학벌사회, 즉 몇몇 사람들이 대다수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지배하고 빼앗는 한국사회를 바꿔나갈 것을 다짐한다.

2003년 11월 3일
추모행사 참가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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