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판 오마이뉴스 <잔잔>

온라인매체는 보수언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는가?

등록 2003.11.04 20:02수정 2003.11.05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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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규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이 표어는 이제 대안미디어의 국제 선언문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한국사회를 뒤흔들었던 이 새로운 인터넷 신문은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러시아, 이스라엘 등 전 세계 미디어와 학자들의 주목을 받아왔고, 또 세계 각국에서 <오마이뉴스>를 모델로 한 새로운 대안매체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가상현실>과 <참여군중>등의 저자인 하워드 라인골드는 "인터넷의 민주적 가능성이 실현된" 사례의 하나로 <오마이뉴스>를 들고 있고, 현재 온라인 토론실에서는 시민기자 모델을 각 사회에 성공적으로 도입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두고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지난 해와 올해 <일간베리타 日刊ベリタ>와 <잔잔 JanJan>이라는 제목의 인터넷 신문이 각각 창간되기도 했다.

<일간 베리타> 홈페이지
<일간 베리타> 홈페이지
지난 2월 온라인 종합일간지 <잔잔>을 창간한 前 카마쿠라시(市) 시장 켄 다케우치는 <잔잔>을 "한국의 <오마이뉴스>와 같은 대안매체로 발전시키는 게 꿈"이라고 밝혔다. 그는 정치적 무관심이 지배하고 있는 일본사회와 사회변혁을 포기한 보수언론을 변화시키기 위해 오래 전부터 <오마이뉴스>의 활동을 지켜보며 창간을 준비해 왔다.

<오마이뉴스>가 대안매체를 꿈꾸는 전 세계의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인터넷을 통한 해방과 참된 민주주주의의 가능성을 역설했던 '미래학자'들은 <오마이뉴스>의 성공을 자신들의 예언이 적중했다는 증거로 제시하며 환호하고 있으나, 인터넷을 대안매체로 훌륭히 키워낸 한국사회의 성공적 사례가 다른 사회에도 변함없이 재연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예컨대 올 해 2월에 창간된 <잔잔>은 서서히 시민기자와 독자들이 늘고 있기는 하지만, 사회적 영향력면에서 지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하루에 수백 건의 기사가 올라오는 <오마이뉴스>와는 달리 하루에 고작 수십 개의 기사가 편집부로 송고되고 있으며, 조회수(페이지뷰)는 <오마이뉴스>의 2백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남한의 3 배에 가까운 일본의 인구를 고려하면 <잔잔>의 상대적 영향력은 이보다 훨씬 낮은 셈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외견상 그 이유는 단순해 보인다. 고속인터넷 사용가정이 70퍼센트에 이르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다. 일본방송협회(NHK)의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80퍼센트 가까은 응답자가 "거의 인터넷을 사용하는 일이 없다"고 대답했다.

어떻게 보면 일본에서는 고속통신망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터넷을 쓰는 사람이 적으며, 인터넷을 쓰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온라인 신문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사람들이 고속통신망에 가입하기 위해 인터넷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고속통신망에 가입한 것처럼, 일본에 고속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인터넷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지 고속통신망이 없어서 인터넷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인터넷에 대한 관심이 인프라 구축의 결정적 요인이지 인프라가 인터넷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기술의 영향력을 말할 때 흔히 도외시되는 사회적 요인과 맥락의 중요성을 떠올리게 된다. 기술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 이상으로 사회는 기술의 채택과 사용과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잔잔> 홈페이지
<잔잔> 홈페이지
한국의 보수언론과 전면전을 벌여온 <오마이뉴스>와는 달리 <잔잔>은 "기존의 언론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발행인은 밝히고 있다. 기존의 언론과 화합하면서 그들을 변화시키겠다는 것이다. 한국사람들에게는 좀처럼 이해되기 힘든 이러한 개혁관은 조화와 복종에 익숙한 일본문화와 불명확한 일본인들의 정치의식 때문이라는 것이 2003년 8월 16일자 <아사히신문>의 분석이다.

일본의 사회운동가인 이시즈는 <일본 미디어 리뷰 Japan Media Review>에서 "일본에서는 어떤 대안매체라도 미디어 재벌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발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잘라서 말한다. "고이즈미가 수상이 되든, 모리가 수상이 되든 아무런 관심이 없는 일본인들의 고질적인 정치적 무관심"이 해결되지 않는 한 어떤 형태의 미디어가 등장해도 사회변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터넷을 논할 때 '탈중심성,' '상호작용성,' '탈규제성' 등의 일반적 특징에 대해서 논하면서, 이 내적 특성을 유토피아적 미래상에 결부시킨다. 인터넷의 민주적 특성이 좀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오마이뉴스>의 활약은 이 낙관론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한국언론의 고질적인 병폐는 인터넷이 알아서 해결해 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예상 가능한 일이지만, 이들의 대책없는 낙관론은 지배구조를 영속화하는 데 일조할 뿐이다.

'디지탈'로 시작해서 '유비쿼터스'로 끝나는 이들의 '진보적인' 주장은 사회변화는 전지전능한 인터넷에 맡기고 편히 쉬라는 주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개혁주의자들은 '낡은 사고의 소유자'로 간주된다.

<디지탈이다 Being Digital> 표지
<디지탈이다 Being Digital> 표지
나는 이들의 주장에서 "신문과 방송이 모두 '비트'로 통합되는 마당에 방송사와 신문사의 교차소유를 금지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고 주장하던 네그로폰테나 "지식사회의 등장으로 계급이나 착취 등은 고리타분한 옛날 이야기가 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드러커나 토플러 등의 '퓨처리스트(futurist)들'의 그림자를 본다. 네그로폰테의 <디지탈이다 Being Digital> 표지에 실린 루퍼트 머독의 추천사에서 보듯, '미래학자'들이 보수정치인들이나 미디어재벌의 환대를 받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오마이뉴스>가 한국사회 변혁의 중심에 놓일 수 있었던 것은 인터넷의 기술적 특성 때문이 아니다. 그에 앞서 사회로 하여금 그 기술을 채택하게 만들었던 다양한 사회적 요인이 존재했고, 그 기술을 사회의 변혁을 위해 사용하려는 능동적 사회의식을 갖춘 사람들이 존재했다. 기술이 사회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기술을 결정한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인터넷을 수용하는데 도움을 준 요인들이 모두 자랑스러운 내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새 기술'이라면 정신 없이 수용하도록 만든 근대화 시대의 불우한 기억이 있고, '컴맹'으로 대표되는 억압적이고 위계적인 지식의 담론이 있으며, '인터넷'과 '강국'이라는 별 관계 없는 용어를 결합시켜 유치한 조합어를 만들도록 한 제국주의적 열등감과 탐욕이 도사리고 있다.

이제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보았던 그 무한한 가능성은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있다. 인터넷의 동의어였던 "자유로운 정보의 흐름"의 시대는 가고, 이제 정보는 서서히 상업논리 속으로 편입되어가고 있다. 인터넷에서 무료로 정보를 제공하던 많은 신문과 방송이 유료화의 길을 가고 있으며, "누구나 자신만의 매체를 가질 수 있다"고 약속하던 것과는 달리 대다수의 온라인 대안매체가 한 두 해를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돈이 돈을 버는' 현실사회의 질서는 인터넷에서도 재생산되어가고 있다. 오프라인에서 가장 많은 부수를 가진 신문이 온라인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이 이 사실을 말해준다. 보수언론이 높은 보수를 주며 고용한 웹디자이너와 '인터넷 전용 기자'들이 늘어가는 현재 그동안 '틈새시장'을 통해 주류언론과 맞서던 대안매체들은 점차 더 어려운 싸움을 벌여가야만 한다.

다시 한 번 기억하자. <오마이뉴스>는 인터넷이 만든 것이 아니라 개혁을 소망하는 우리들이 만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들의 손과 관심에서 떠나는 순간 <오마이뉴스>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우리가 인터넷의 능력을 찬양할하고만 있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학자의 예언이 아니라, 현실을 염려하는 사람들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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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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