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화가 '정순옥'의 겨울나기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13> 목로주점 '토막'

등록 2003.11.10 13:00수정 2003.11.11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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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가운데 화장지를 들고 있는 이가 화가 정순옥

가운데 화장지를 들고 있는 이가 화가 정순옥 ⓒ 이종찬

"목덜미가 제법 선들선들해지는 걸 보이(보니까), 인자 겨울이 오긴 오는갑다"
"없는 사람 살기는 그래도 여름이 나을낀데…."
"그나저나 니는 요즈음 우떻노?"


매주 주말 오후 3~4시 다가오면 나는 마산 부림시장에 있는 선술집 '큰대포'로 향한다. 큰 대포집에는 별다른 약속이 없어도 주말 오후가 되면 늘 막걸리를 가운데 놓고 그 자리를 지키는 그리운 얼굴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번씩 서로 얼굴만 보아도 그저 정겹기만 했다. 또한 그렇게 막걸리가 서너 잔이 돌고 나면 서로 약속이라도 한듯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순옥이 니는 올 겨울을 보낼 준비는 다 했나?"
"준비는 머슨 준비가 필요합니꺼. 저는 물감값만 벌면 되는데…."
"아, 니 작업실에 난로라도 한 개 있어야 될 끼 아이가. 올 겨울은 디기(많이) 춥다카던데, 그래가꼬 추버서(추워서) 우짤라꼬?"

그때, 고성에서 조그만 작업실을 갖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순옥이가 가방에서 휴대폰 충전기를 꺼냈다. 그리고 "아지메, 요기 전기 꽂는데는 오데 있능교"라고 물었다.

"니, 어제 작업실에 안 들어가고 오데서 눈(누워) 잤기에 휴대폰 충전도 못시켰더노?"
"그기 아이고예, 어제 집에 들어갔더마는 전기가 끊기뿟다 아입니꺼."
"그기 머슨 말고? 그라모 이때꺼정(지금까지) 전기세도 못내고 있었다 그 말이가."
"참말로 독한 넘들이지예. 전기로 끊은 것도 모자라가꼬 쌀꺼정 들고 가뿟더라 아입니꺼. 그 쌀도 얼마 전에 절에 가서 일해주고 얻어온 쌀인데."


순간, 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저만치 제쳐두고 살아가는 이야기,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무명화가 정순옥의 겨울나기에 대해서 심각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a 부디 이곳에서 물감값이라도 벌게 해주소서

부디 이곳에서 물감값이라도 벌게 해주소서 ⓒ 이종찬

"오데 솥단지 하나 걸어놓고 장사할 만 곳이 없겠습니꺼?"
"부림시장에 가모 빈 가게가 있기는 있는데, 그것도 보증금을 쪼매 걸고 월세도 조금 주고 해야 될 낀데. 니 그 돈이 있나?"
"제가 돈이 오데 있습니꺼? 가진 기라꼬는 이 몸뚱이 하나뿐인데."


난감했다. 김호부 선생의 말로는 부림시장에서 5평 남짓한 가게를 얻으려면 약간의 보증금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십시일반으로 보증금을 마련한다고 해도 문제였다. 당장 장사를 하려면 약간의 돈도 있어야 했다.

그러나 두 눈에 눈물까지 그렁그렁하게 매달고 있는 순옥이는 막무가내였다. 김호부 선생을 붙들고 무조건 그 가게를 보증금 없이 계약할 수 있게끔만 해달라고 졸랐다. 나머지 일은 알아서 한다면서. 하긴 얼마나 사정이 심각했으면 저러나 싶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 대한 확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일단 김호부 선생께서 그 가게 주인과 잘 아는 사이이니 어떻게 좀 해 보십시오. 우선 순옥이가 가게문을 열어놓아야 우리가 돕든지 말든지 할 게 아니겠습니까."

"내 참! 미치것네, 껍데기도 안 베끼고 묵을라꼬 덤비니…. 그렇게 할밖에야 내가 하고 말것다."
"오빠! 좀 도와주이소. 내는 물감값만 벌모 됩니더."

그렇게 어렵사리 해서 순옥이는 지난 주 목요일에 다섯 평 남짓한 가게를 계약했다. 가게의 이름 '토막'은 부산에서 오랫동안 화랑을 운영하다가 최근 화가 현재호 선생 댁에서 기거하고 있는 아헌 김상헌 선생이 지었다.

a 화가 현재호

화가 현재호 ⓒ 이종찬

"아무 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제법 가게 흉내는 냈네."
"내는 한번 한다카모 하늘이 무너져도 하는 아(아이) 아이가. 그라고 아까 이선관 선생님께서 가게 문 연 기념으로 맥주 1박스 사 주고 가셨다."
"그으래. 하여튼 축하한다. 어쨌거나 토막에서 열심히 해가꼬 물감값만 벌끼 아이라 반듯한 작업실 하나도 마련해라."

지난 토요일 오후부터 가난한 무명화가 정순옥이는 마침내 '그림 그리는 주모'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 화가 현재호 선생님을 가운데 모시고 밤 늦도록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이어 그림 그리는 주모 순옥이가 화장지를 길게 풀어 스스로 한풀이 춤을 췄다.

"토막의 발전을 위하여, 그림 그리는 주모 정순옥을 위하여, 그리고 이 땅의 모든 가난한 사람들의 따뜻한 겨울나기를 위하여, 건배!"

그날도 화가 현재호 선생은 말없이 소줏잔만 가울이고 있었다. 현재호 선생의 소줏잔에는 화장지를 풀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는 그림 그리는 주모 정순옥의 모습이 일렁였다. 현재호 선생의 가늘게 뜬 눈 속에는 이 땅의 가난한 화가들의 서러운 세상살이가 실루엣으로 밤새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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