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봉-벽소령]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백두대간 종주 1

등록 2003.11.18 09:13수정 2003.11.1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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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편지를 띄웁니다. 아이들과 함께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습니다. 9월 13일 파주에서 출발하여 밤새도록 중산리로 달려왔습니다. 그 첫날, 천왕봉-벽소령 구간을 14명의 아이들과 시작했습니다. 파주중학교 학생 13명과 초등학생 1명이 함께 길을 나섰습니다. 홍일점 1학년 여학생도 있습니다.

새벽 4시 30분에 중산리 매표소를 출발하였습니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찾아서 떠나는 길입니다. 모두들 침묵입니다. 두려움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떠난 길이기에, 새벽 어둠을 가르는 표정들이 당당하기만 합니다. 누구도 자신의 길을 대신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당당한 발걸음들이 무뎌지기 시작합니다. 잠시 쉬어가려니, 봉일천초등학교 5학년인 한호가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들먹입니다. 중학교 3학년 형들이 한호의 배낭을 나누어집니다. 한호의 어깨를 두드려 줍니다. 가자. 넌 할 수 있어!

세 시간만에 로타리 산장에 닿았습니다. 갈 길은 먼데 아이들은 천근만근 무거운 발길입니다. 콸콸 넘치는 샘물을 실컷 들이마시며 지리산의 정기를 보충합니다. 사실 세상에 태어나 이처럼 높은 산을 오르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힘들게 길을 갑니다. 잠깐 걷고 오래 쉬면서,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으리라는 선현의 말씀에 기대어 가파른 돌길을 기어오릅니다.

이 길을 떠나는 나에게, 당신은 꼭 돌아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길임을 잘 압니다. 그 길 위에서 구르는 돌멩이 하나, 이름 없는 풀 한 포기에도 눈길을 주고 오라는 당신의 말을 헤아릴 듯 합니다. 내려오기 위해 오르는 산 위에서, 산을 닮은 모습으로 돌아오라는 당신의 말을 곰곰 새겨 봅니다.

a 또 하나의 문화, 아이들 천왕봉에 서다

또 하나의 문화, 아이들 천왕봉에 서다 ⓒ 신종균


10시 30분에야 천왕봉에 올랐습니다. 남들은 두 시간이면 거뜬하다는데 여섯 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세상이 발 아래에 깔려 있습니다. 모두들 환희에 찬 얼굴입니다. 저 멀리 설악산 진부령, 백두산을 향하여 대장정의 호흡을 가다듬습니다.

천왕봉 표지석에는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라는 글발이 새겨져 있습니다. 나는 몇 번이고 이 글발의 의미를 아이들에게 설명하려다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느낌의 대상임을 어렴풋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 표지석으로 몰려드는 것은 느낌 때문일 것입니다. 혼자 혹은 여럿이 글발을 끌어안고 사진을 찍는 것은 또 하나의 느낌을 창조하는 숭고한 행위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칭찬이 보약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배불리 얻어 먹은 아이들의 발길이 가볍습니다. 제석봉을 지나면서 또 아이들에게 봉우리 전체가 왜 고사목들로 가득한지를 설명하려다가 입을 다물었습니다. 느낌을 전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앎을 통해서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인지, 느낌을 통해서 앎을 확산시키는 것인지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산에서 만큼은 아이들에게 머리로 가르치는 것보다 가슴으로 공유하는 체험이 더 소중함을 믿습니다.

장터목은 늘 시장처럼 사람들이 들끓습니다. 사람들 틈 속에서 부대끼며 점심을 먹고 나니 힘이 배에서 솟아납니다. 장터목에서 세석까지는 구름 위의 산책길입니다. 각자 편한 대로 나무가 되고, 꽃이 되어, 어머니산 지리산의 품에 안깁니다.


a 풀이 되고 나무가 되어 세석으로 가는 길

풀이 되고 나무가 되어 세석으로 가는 길 ⓒ 신종균


오후 2시 30분에 유럽식 산장의 중후함을 뽐내는 세석 산장에 도착하였습니다. 라면으로 원기를 보충합니다. 사실 두 시간 남짓한 벽소령길이지만, 우리 상태로는 네 시간을 늘려 잡아야 합니다. 비까지 내리기 시작합니다. 어차피 야간 산행을 해야 할 판입니다. 지사제를 먹어도 계속 설사를 하는 준용이 덕분에 쉬엄쉬엄 길을 갑니다. 피곤에 절은 아이들이지만, 어디까지 어떻게 가야하는지를 잘 압니다.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둠을 헤쳐갑니다. 가슴 속 솔직한 언어와 느낌을 숲속에 뿌려가며 함께 걷다보니, 멀리 왕자님이 사는 궁궐처럼 벽소령 산장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서둘러 저녁을 해 먹고 잠자리로 들어갑니다. 건강하게 일정을 소화해 준 아이들이 고맙습니다. 더 고맙고도 무서운 것은 아이들의 어머니, 소위 '아줌마'들입니다. 자식들의 장래를 위하여 강남 특구를 만들고, 기러기 아빠를 만들어 내는 아줌마들입니다. 대학 입시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 땅의 아줌마들입니다. 그렇건만 파주중학교의 아줌마들은, 아이들이 대학 입시 전사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직하게 자신들의 아이들을 산으로 보냈습니다. 아이들만의 백두대간 초행길에 어린 딸과 아들을 내보낸 아줌마, 어머니들의 깊은 뜻을 왜 모르겠습니까? 오늘 밤 꿈속에서는 무성한 잔뿌리를 내릴 것만 같습니다. 당신에게도 좋은 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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