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두희 입에서 쏟아진 이승만 연루설

[의를 좇는 사람 (2)] 안두희를 몽둥이로 응징했던 권중희씨(마지막회)

등록 2003.11.24 10:46수정 2003.11.24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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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희 선생은 안두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a "백범 선생님! 선생님의 예언대로 돌아가신 이듬해에 동족상잔의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치렀고 아직도 나라는 두 동강이 난 채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계셨더라면 당신의 몸으로 이런 비극만은 막아내셨을 겁니다. 아! 백범이시여…누가 이 나라를 구하겠습니까?"(효창동 백범 묘소에 참배하는 권중희씨)

"백범 선생님! 선생님의 예언대로 돌아가신 이듬해에 동족상잔의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치렀고 아직도 나라는 두 동강이 난 채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계셨더라면 당신의 몸으로 이런 비극만은 막아내셨을 겁니다. 아! 백범이시여…누가 이 나라를 구하겠습니까?"(효창동 백범 묘소에 참배하는 권중희씨) ⓒ 박도

안두희 입에서 쏟아진 이승만 연루설

어쨌든 그 날(1992년 9월 23일) 안두희의 자백은 크나큰 수확이었다. 마침내 암살지령 바로 윗선이며 직속 상관인 장은산 포병사령관 이름이 튀어나왔고, 묻지도 않은 <시역의 고민>을 대필했다는 얘기,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자기를 경무대로 데리고 가서 이승만 대통령의 치하까지 받게 했다는 얘기까지 털어놓았다.

안두희는 월남 후 서청에서 일하다가 1948년 11월 육사 8기 특3반으로 입교하여 3주간 제식훈련만 받고 포병 소위가 되었다. 1949년 4월 1일 경기도 광주에서 포병 창설 뒤 첫 사격대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도 왔다. 안두희는 그때 관측장교 상을 받은 바 있었다.

안두희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이랬다.

백범 암살 1주일 전인 1949년 6월 20일 무렵, 장은산 포병사령관이 안두희를 사령관실로 불렀다. 안 소위가 사령관실로 갔더니 장 사령관은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각하께서 안 소위를 부른다고 전했다.

안이 육본 지프차로 삼각지에 있는 참모총장실로 갔더니 신성모 국방장관도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다가 참모총장이 안두희에게 "경무대 구경 갈까?"했다.

그러자 신성모 국방장관이 "마침 나도 보고할 것이 있는데 같이 가자"했다. 나중에야 안두희는 그것이 사전에 짜놓은 각본임을 알았다고 나에게 말했다. 일개 육군소위를 이승만 대통령이 하찮은 일로 접견할 리가 있을 수 있나?


a 김구 선생과 이승만 대통령. 동시대의 인물로 대조적인 인생역정을 걸었다.

김구 선생과 이승만 대통령. 동시대의 인물로 대조적인 인생역정을 걸었다.

경무대로 가니 미리 전화 연락이 된 듯 박 비서가 맞아주면서 곧바로 대통령 집무실로 안내했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각하, 이번 사격대회에서 상을 받은 안두희 소위입니다"하고 소개하니까, 이 대통령이 안두희의 손을 잡으며 "국방장관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어. 높은 사람 시키는 대로 일 잘하고 말 잘 들어라"고 격려조로 말했다.

경무대를 나와서 곧장 부대로 직행하여 보고했더니, 장은산 사령관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그 봐, 내 말이 맞지?"하면서 엄지 손가락(대통령을 암시)을 세우면서 거사 후 모든 것을 보장할 테니 안심해도 된다고 회유를 했다.


안두희는 노회한 정객들의 하수인이 된 셈인데, 영웅심에 젖은 안은 "그 말이 그 말이지 뭐. 우리 정보하는 사람(안은 월남 후 한때 미군정 정보요원으로 활동했다)은 '척'하면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는다"고 그게 바로 이심전심의 화법이라고 했다.

암살 조직은 통상 점조직이며, 극비 지령은 암시나 이심전심의 화법으로 내리는 게 불문율이다. 그래야 증거를 인멸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오리발을 내밀 수 있다. 한마디로 이심전심의 화법은 암살 세계의 에이비씨다.

자백을 번복한 안두희

이튿날(1992년 9월 24일) 안두희는 우당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날 밝힌 사실들을 번복하면서 "권중희의 강압에 의한 허위 자백"이라고 생떼를 썼다. 그런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몇몇 신문들은 안두희를 변호하며 나를 공박했다. 안두희가 증언을 번복하게 된 내막이나 자백의 진위 여부를 가려내 확인 취재할 생각보다 안두희 말만 대서특필했다.

하지만 나는 1992년 9월 23일 안두희가 나에게 털어놓은 자백만은 진실에 가깝다고 확신한다. 그 첫째로는 안이 입을 연 후로는 일체 위해를 가하지 않았고 자유스런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 둘째는 내가 묻지도 않은 <시역의 고민> 대필이나 경무대 방문을 안두희는 아주 자세하게 밝혔다.

경무대에서 무슨 차를 마셨느냐고 묻자, 안은 주스를 마셨다고 했다. 수십 년 전 일을 어떻게 자세히 기억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커피를 좋아하는데, 별로 좋아하지 않는 주스가 나와서 똑똑히 기억한다고 했다.

안이 제 입으로 털어놓은 사실을 번복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엄존하는 보이지 않는 무서운 세력을 의식해서 더러운 제 목숨을 잇고자 발버둥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암살 배후자는 자기들 정체가 드러날 듯하면 가차없이 암살자를 처치해 버리는데 그것이 그네들 세계다.

나는 10여년 간에 걸쳐 안두희를 때리고 강제 연행한 것을 부인치 않는다. 이미 그에 대한 처벌도 달게 받았고, 그 어떠한 비난도 감수하겠다. 내가 그를 못살게 군 것은 대낮에 독립지도자를 죽인 반역범이 진실을 털어놓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우국충정에서 살해했다면서 애국자인 양 활개치며 살고 있는 꼴을 볼 수 없어서 모든 것을 각오하고 그를 응징했던 것이다.

일제시대에 일본에 붙어서 독립군을 살해한 밀정을 몽둥이찜질을 했다면 그것도 폭행죄가 되는가? 안두희는 그 밀정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제대로 된 나라였다면 안두희와 같은 반역범은 이미 오래 전에 능지처참했을 것이다.

내 마지막 소원은

내가 송추에 살고 있을 때, 어느 날 박기서씨가 찾아왔다. 그는 나에게 후세에 부끄럽지 않게 안두희가 천수를 누리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며 살해할 뜻을 내비쳤다. 그래서 나는 그 일만은 극구 만류했다.

아직은 더 밝힐 게 있다. 안두희 추적으로 내 인생은 깨질 대로 깨졌다. 이제는 더 이상 깨질 것도 없다. 그러니 죽여도 내가 죽일 것이라고 했는데 기어이 박기서씨가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안두희 살인 사건 후 검찰에 불려갔다. 담당 검사가 나에게 살인교사 혐의를 묻기에 "그것은 나와 박기서씨의 인격을 모독한 것이다. 내가 할 일을 박기서씨에게 빼앗겼을 뿐이다. 비겁하게 이 권중희가 박기서씨를 충동질할 리 없고, 그 충동질에 놀아나서 살인할 박기서씨도 아니다"라고 했더니 더는 문제 삼지 않았다.

a "단 하루라도 민족정기가 바로 선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권중희씨

"단 하루라도 민족정기가 바로 선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권중희씨 ⓒ 박도

내가 마무리 짓지 못하고 박씨가 교도소에 가게 되어 늘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안두희가 제 명대로 천수를 다 누리고 죽었다면 '칠천만 우리 민족의 수치'라고 그때도 지금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암살자가 활개치는 세상만은 막아야

12년 동안 안두희를 추적했던 이야기가 끝났다. 그새 네댓 시간이 흘러갔다. 어찌나 실감나게 얘기하시는지 마치 007 시리즈를 한 편 본 듯했다.

마무리 말씀을 부탁드리자 돈이 마련되면 영어를 잘 하는 사람과 동행해서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가서 한 달 정도 머물면서 1945년 8월 15일 해방부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때까지 한국 관계 비밀문서를 죄다 열람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 백범 선생의 암살에 관한 얘기가 어딘가에서 나올 것이라면서 그게 당신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다.

왕복 비행기 삯과 체류비를 포함하여 2천~3천만원 정도면 충분할 텐데 기업인들이 정치인에게는 사과상자에다 현찰로 수십억씩 갖다 바치지만, 자신 같은 이에게 백범 선생 암살 배후를 밝히라고 단돈 10만원이라도 주겠느냐면서 로또 복권이라도 한 번 사보고 싶다고 했다.

정치 지도자들이 진정한 애국과 겨레사랑의 길은 외면한 채 어리석은 백성들만 속여 등쳐 먹고 있다면서, 정치인 중에 백범 암살 배후만 시원히 밝혀도 후세에 큰 이름을 남길 텐데 그런 일에는 관심을 갖는 이가 없다면서 권 선생은 이런 현실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다시는 이 땅에 안두희와 같은 암살자가 나타나지 않아야 하고, 그런 암살자가 활개치고 사는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끝 말씀으로 마무리하시면서 긴 대담을 마쳤다.

내가 <의를 좇는 사람>을 쓰는 이유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도, 이만큼 민주화된 것도, 이만큼의 자유와 인권 신장이 된 것도,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로 여기던 남북의 정상이 만난 것도, 금강산 뱃길이 열리고 경의선 끊어진 철로가 이어지고 금강산 가는 육로 길이 열린 것도, 교실에서 북에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눈치 보지 않고 가르칠 수 있는 것도,

모두가 다 조국 해방을 위해, 통일을 위해, 민주화를 위해 피를 흘리고 그 제단에 목숨을 바친 독립전사와 선열과 민주 투사들의 숭고한 희생 덕분이다.

씨앗을 뿌린 자가 그 열매를 거두는 곳이 정의로운 사회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 언제부터인가 씨앗을 뿌린 자와 그 열매을 거둔 자가 달랐다. 엉뚱한 자가, 오히려 씨앗을 뿌린 자를 방해한 자가 열매를 거두어 갔다.

나는 글을 쓰는 이로서 씨앗을 뿌린 자에게 그 열매를 가져다 줄 능력은 없다. 하지만 언 땅에 씨앗을 뿌리다가 숨져간 거룩한 영령들의 한을 들어주고, 그 유족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은 할 수 있다는 소명감으로 <의를 좇는 사람>이란 주제로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듣고 그 사연을 많은 이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붙이는 말: 이 연재기사에 대한 정보 제보나 자료제공, 그리고 추천할 인물이 있으면 '쪽지 보내기'나 필자의 메일로 연락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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