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10

등록 2003.12.02 10:14수정 2003.12.02 10:57
0
원고료로 응원
'그는 정말로 애초부터 신이었을까?'

그로부터 한달 후였다. 젊은 교사 룸마는 아침 일찍 일어나 니푸르 전역을 돌기 시작했다. 그에게 역사의 실마리를 찾으라는 임무가 주어진 때문이었다.


그는 먼저 에쿠르 신전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그 신전은 북동쪽 맨 끝에 있었다. 여러 사원들의 중심이기도 한 이 엔릴 신전은 텔(산처럼 솟은 언덕)을 깎아 세웠고 그 앞에는 '평화의 문'이 높이 솟아 있었다.

그간 시간이 없어 잘 관찰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정말 장엄한 신전이었다. 특히 신전 처마에서부터 잇대어져 있는 열두 개의 원주들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만큼 독특했다.

그 커다란 원주들엔 그림도 색채도 없었다. 오직 아름다운 문장들만 새겨졌고 그 모두가 엔릴에게 바쳐진 헌정사였다. 특히 맨 앞쪽 두개의 원주엔 시구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그 글씨체가 너무도 예술적이라 필경엔 자신이 있던 룸마 조차도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경지였다.

그 열두 개의 원주 전부가 엔릴에 대한 찬양과 흠모였다. 원주 하나하나 모두가 최대의 열정과 최고의 솜씨, 가장 빛나는 정신이 쏟아져 있었고, 그 것을 다 읽고 났을 땐, 룸마 자신마저도 신과의 사랑에 흠뻑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룸마는 에쿠르 신전을 나와 해자를 돌기 시작했다. '우르의 문', '난나의 문', 그리고 공원을 돌아 정문인 '굴라의 문'으로 향하면서 그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니푸르는 그 자체가 수메르의 성지이자 정신적인 중심지였지만 사실 이 도시는 모두가 엔릴 신에게 바쳐진 곳이었다. 물론 에쿠르 신전 앞에는 이난나 신전, 그 북쪽엔 북방신전이 있었으나 그 밖의 모든 장소는 엔릴을 위해 건축되었고 또 지정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북서쪽 경계를 이룬 시내가 엔릴이 사랑을 나누던 장소로 보존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그랬다.

'우루크의 문'과 '우르의 문'이 거기에 있었던 것은 수메르 도시에 대한 수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도 엔릴 신으로 하여금 자신의 지배 지역을 좀더 잘 보시라고 지어진 것이었다.


룸마는 이제 연애보존구역을 돌기 시작했다. 그곳은 서북쪽 숲이었고 '음란의 문'과 '드높은 신전' 바로 위였다. 룸마는 개울가에 앉았다. 개울 양 옆으로는 아카시아와 타마린드 나무가 빼곡이 들어차 있었고 아카시아나무는 막 꽃망울까지 터트리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에서 엔릴 신은 장래 아내 될 사람이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았다. 그리고 당장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그때도 꽃이 피었을까…'

그는 애초부터 신이었다. 하늘과 땅의 신이 그를 낳았고 그래서 그의 별칭 또한 대기의 신이다. 한데 그들은 어찌하여 대기에서가 아닌 이 강가에서 사랑을 나누었을까? 그때는 달밤이었을까? 그래서 달의 신을 낳았을까?

수메르의 신들 역시 연애를 하고 바람을 피웠다. 자식도 낳고 가끔 부정한 일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장소는 언제나 지하 세계거나 혹은 이 세상과는 다른 장소였다. 한데 엔릴 신만은 왜 지상, 그것도 개울가에서 사랑을 했을까? 그때 어떤 밀어를 나누었을까.

다시 그 신에 대한 신화가 떠올랐다. 어떤 점토판에서는 그가 나이 어린 닌릴 여신을 강간했고 그래서 니푸르로부터 지하세계로 추방당했다가 다시 돌아왔으며 또 다른 점토판에는 바로 이 개울에서 장래 아내가 될 닌릴 여신의 나체를 훔쳐본 뒤 곧 사랑에 빠진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닌릴 여신의 어머니가 먼저 엔릴 신을 사위로 삼으로고 작정해버린 대목은 무엇을 뜻하는가? 어쨌거나 그 두 신들이 이 개울가에서 일을 벌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은데 그러면 어떤 연유로 엔릴 신은 수메르 전 역사에 걸쳐 항상 최고의 신으로 추앙받게 되었는가? 단지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룸마는 고개를 들어 해를 바라보았다. 노을은 나뭇잎 위에서 잘게 부서졌다. 뇌리 속에서 실개천처럼 졸졸거리고 흐르던 생각들이 갑자기 수문을 닫는 것 같았다. 교장이 기다린다는 생각이 그 수문이었다.

교장은 일찌감치 식당으로 와서 먼저 자리를 잡고 일행들을 기다렸다. 부사제장과 교감은 식사시간 전에 왔고 우르에서 함께 온 젊은 사제들과 교사들은 제시간에 와서 음식 나르는 일을 도왔다. 그러나 룸마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교장은 조바심이 나서 자꾸 문 쪽을 힐끔거렸다.

일행들은 먼저 식사를 시작했다. 이날 저녁 메뉴는 보리죽과 치즈, 양유였다. 부사제장이 숟가락을 놓고 '올해는 왠지 타마린드 꽃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꺼낼 때 룸마가 들어왔다.

"먼저 식사부터 하게."
룸마가 죽 그릇을 비우고 양유 잔을 집어들 때 교장은 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래, 실마리가 보이던가?"
룸마는 얼른 양유 잔을 놓으며 대답했다.

"아니오, 아직… 하지만 검은 머리 사람들의 역사가 니푸르에서 태동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 군거는?"
교장이 얼른 되물었다.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것 같았다. 룸마가 대답했다.

"애초 엔릴 신이 니푸르에서 검은머리 사람들을 창조하셨다면, 니푸르로부터 지하세계로 추방당했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엔릴 신에게 '추방당했다'는 말이 사용되자 불경스럽다고 여겼던지 부사제장이 거들었다.

"그 일은 니푸르의 신들이 결정한 일이지요. 다시 말해 검은머리 사람들과는 상관이 없는 일일 텐데…"

교장은 알고 있었다. 부사제장 역시 사제였다. 그가 바라는 것도 신들의 칭송이며 그 번역일 것이었다. 그러나 작업방향은 이미 역사 쪽으로 결정이 되었으니 가능한 한 그의 기분을 상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일을 진행해야 할 것이었다.

"예, 그렇지요. 그냥 서판에 있는 대로 말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만, 아무튼 좀더 들어보지요."

교장은 부사제장을 안심시킨 뒤 다시 룸마에게 물었다.

"그럼 자네 말은 엔릴 신께서 지하세계로부터 추방당했다가 돌아오신 뒤에야 니푸르는 검은 머리 사람들의 영역이 되었다는 말인가?"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또한 최초로 언급되는 곳이 딜문이라는 것도 그렇구요."

"딜문? 아, 그랬지. 신화에서 언급되는 최초의 지상 낙원... 그렇다면 그 장소가 어디인지도 알고 있나?"

"아니오. 몇 분에게 여쭤보았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룸마가 대답하자 교장은 다시 부사제장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부사제장께서는 짐작되는 곳이라도 있소이까?"
"대사제장께서는 알고계신 것 같았는데, 안타깝게도 여쭤보지 못했습니다."

교장은 그간 연대기에만 집중해왔다. 모든 자료를 뒤져 분류해낸 연대기는 다섯 시기로 나눌 수 있었고 그 1)은, 이른 왕조기, 2)는, 키슈 왕조, 3)우루크 시대, 4)우르 시대, 5)라가시와 움마 시대였다.

시대가 뒤로 갈수록, 다시 말해 현세에서 가까울수록 그 자료는 넘칠 정도로 많았지만 그러나 이른 왕조시대, 즉 마사카크(Mashkak)나 에타나(Etana) 군주 이전의 기록은 별로 없었다. 더욱이 최초로 언급되는 '딜문'에 대해서는 전무 상태였다.

"하지만 좀더 찾아보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룸마가 말했다. 고무적이었다. 교장은, '딜문이 검은 머리 사람들을 불러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 매개자 역시 엔릴 신이니 최초의 그 고대서판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후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더 미룰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내일부터 당장 필경작업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그대들 의견은 어떻소?"
"빠를수록 좋지요."

교감이 대답했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부사제장만은 좀 난처한 얼굴이었다.

"아직 도서관 도서들에는 꼬리표도 다 달지 못했는데요?"
부사제장의 그 말에 교장이 설명을 했다.

"급한 것은 고대서판을 복원하는 것이오. 우리가 그 서판들을 번역하고 복원하는 동안 뒷부분도 정리가 될 테니 그때 또 이어붙일 수가 있을 것이오."

교장의 말에 부사제장은 당장 환해져서 대답했다.

"아, 그러실 생각이었군요. 그럼 내일 아침 일찍 필경 실에 점토판을 가져다두겠습니다."
교장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부사제장에게 물어보았다.

"한데, 작업량이 얼마나 될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엄청난 양의 점토판이 필요할지도 모르는데 부사제장께서는 그 모든 물량을 공급하실 수 있겠소?"

사실 점토판 공장이 쉬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뒤부터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던 터였다. 부사제장은 그런 일이라면 전혀 걱정을 말라는 듯 얼른 대답했다.

"점토판 문제라면 이미 천여 장의 완성품이 습포에 잘 싸여 있습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말이오?"
"요즘 공급처가 끊겨 그간 점토판 공장이 문을 닫았습니다만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재가동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여기서 아예 역할들을 정합시다."
일행들이 일제히 교장을 주시했다. 교장이 뒤를 이었다.

"우선 사제들과 교사들이 두 팀으로 나뉘어져야 할 것이오."
"그래야겠지요."
부사제장이 응수해주었다.

"교사 팀에서는 교감과 내가 번역하거나 수집한 것들을 읽어 가면 룸마가 초벌기록을 하고 나머지 두 교사들은 그 초벌 기록을 완전 판으로 정리하는 것이오."
"…"

"그리고 사제 팀에서는 부사제장께서 필경 판 공급에 주력해주시고, 젊은 사제들께서는 책임지고 건조와 안전한 장소에 보관하는 것이오. 그럴 수 있소?"
교장이 두 사제를 돌아보며 물었다.

"물론입니다. 안전한 장소를 찾는 것도 우리의 임무지요."
"아시겠지만 이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관이오. 대사제장께서도 원하셨듯이 우리가 이 일을 하는 이유도 안전하게 남기기 위해서요."
그 말이 모두에게 현실을 일깨워준 것인지 그만 표정들이 굳어졌다. 교장이 다시 말했다.

"자, 기운들 냅시다. 내일이라도 당장 우르를 탈환하게 될지 뉘 알겠소."
"그럼요, 그땐 우리도 이 막중한 임무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구요."
교감이 그 역성을 들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3. 3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