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9

등록 2003.12.01 11:39수정 2003.12.01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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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어려우시다면 니푸르 책임 사제장도 도와주실 것입니다."
부사제장이 말했다.
"뭘 도와줘요?"
자기 생각에 빠져 있던 터라 교장은 부사제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얼른 알아차리지 못했다.

"책임 사제장도 고대문자에 해박하십니다."
"아, 그래요? 그래주시면 고맙지요."


교장이 대답하고 고개를 들었다. 저만치 니푸르의 성벽이 보였다. 높다란 '굴라 성문'이 그들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대사제장의 예견이 옳았다. 니푸르에는 침략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다. 우르에서 약 4백여 리쯤 떨어져 있을 뿐인데도 아주 평온해서 전혀 다른 세계에 온 기분까지 들었다. 하긴 이곳은 성지였다. 성안 전체가 신전이자 종교적인 역할만 했다. 사제나 신전에 종사하는 사람들만 살고 있어서 더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도 몰랐다.

물론 여기도 우르에서처럼 에두바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 학교 역시 사제나 수습 승려만 몸담고 있을 뿐 일반인들은 없었다.

교장은 숙소를 배정받은 뒤 곧 고문서판 보관실부터 찾아보았다. 지하 보관실은 신전 오른쪽, 좁은 통로로 해서 들어간다고 했다. 그는 혼자서 그 입구로 들어섰다.

그 지하실 통로는 생각보다 좀 복잡했다. 처음은 미로 같은 길을 빙빙 돌다가 별안간 나선형 계단이 시작되었고 그 끝머리에 문도 없는 지하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지하실은 텅 비어 있었다. 도서판이나 그것을 놓은 선반조차도 없었다. 더욱이 바닥이 흥건히 젖어 있어 고개를 들어보니 어두운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대사제장이 잘못 가르쳐 주었거나 잘못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이런 곳은 고문서 보관소론 마땅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시 올라가 책임 사제장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고문서는 분명 그 지하실에 있다, 다른 곳엔 옮긴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지하실로 돌아왔다. 컴컴해서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싶어 온 벽을 손으로 더듬으며 확인해 보았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좀 짜증이 났다. 그래서 다시 계단으로 올라서는데 바로 그 계단 벽에 선반처럼 길쭉하게 뚫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바로 도서 선반이었다. 계단 벽을 따라 엇각으로 뚫어둔 그곳에 고문서들이 포개져 있었다. 지하실의 습기 때문에 그런 편법을 쓴 모양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점토판 하나를 꺼내보았다. 미끈거렸다. 자칫하면 손바닥에서 떨어져나갈 만큼 그것 역시 습기가 대단했다. 읽는 것보다 건조가 급선무 같았다.

그날 오후부터 그들은 당장 일을 시작했다. 먼저 신전용 양털을 빌려다 마른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서판을 늘어놓았다. 서늘한 곳에서 이틀을 건조시키자 만져도 부스러지지 않을 만큼 습기가 가셨다.

"거의 다 마른 것 같은데, 이제 시대별 분류를 해야겠지요?"
교감이 말했다.

"그럽시다. 얼마나 걸릴 것 같소?"
"모두 해서 백장도 되지 않으니 금방 끝낼 수 있어요."
"아니 번역을 하자면 말이오."
"쉬어가면서 해도 한달이면 끝날 것입니다."
"그래요."

그때 교장은 투박하고 두꺼운 점토판 하나를 집어 들었다. 모서리가 떨어져 나간 그 고대문자판이 바로 대사제장이 언급했던 엔릴 신의 선언문이었다.

신들이 검은머리의 사람들을 만든 후에

순결한 이곳에 다섯 개의 도시를 이룩하였도다.
이 도시들의 통치자를 다음과 같이 임명하였도다.
에리두 시 누드먼드…
시파르 영웅 우투…

그는 그 점토판을 살그머니 제자리에 놓았다. 더 읽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렇게 건성으로 읽을 서판이 아니었다.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한 뒤 차근차근 읽어야 했다. 그럼에도, 다 읽지 않았음에도 그의 뇌리에는 벌써 이런 질문들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니푸르와 엔릴 신, 엔릴 신과 검은 머리 사람들, 거기에는 어떤 함수관계가 있는가. 그 보다도 검은 머리 사람들의 역사는 과연 어디에서 태동했는가?'

그날 저녁 식사 때 교장은 책임 사제장과 한 밥상에 앉았다. 긴 벽돌밥상에 아마포 방석이 깔려 있는 상석이었다. 식당 일꾼이 보리빵과 버터와, 우유, 삶은 고깃점, 부추와 파를 섞어 담은 접시를 날라다주었다.

"오늘은 양상추가 공급되지 않은 모양이오."

책임 사제장이 말했다. 그만 해도 건 편인데 싱싱한 야채가 없다고 변명을 한다면 이곳은 제정 사정에 걱정이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수메르 인이라면 누구나가 양상추를 좋아하지만 이 시기에 상용하기엔 좀 비쌌던 것이다. 어쩌면 신전에 딸린 밭이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교장은 대답했다.

"이만만 해도 성찬이지요."

그들은 식사를 시작했다. 주위의 다른 밥상에서도 사제들이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할 때 교장이 입을 열었다.

"오늘 오후 도서관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에두바와 신전도서관까지. 서판들이 참으로 많더군요."
"누가 아니랍니까. 그래서 에두바 도서관은 지난 가을 새로 확장까지 했답니다."
"사제들이 신전 경배는 하지 않고 글만 쓴 모양이지요?"
교장이 허허 웃으며 응수했다. 그러자 책임 사제장이 주위를 돌아본 뒤 나직이 말했다.

"여기 에두바도 학풍이 드새답니다."
"사제들이라면 신학일 텐데 거기에도 학풍을 세울만한 갈래가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경배하는 신들도 다 다르고 또 관심사도 다양해요. 신학 외에도 문학과 천문학, 경제, 지질학까지…."
"역사에 관한 것도 있습니까? 물론 신과 함께 하는 역사이겠지만요."
교장이 알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것도 많습니다."
"그 모든 작품들은 분류가 되어 있습니까?"
"아마 못했을 겁니다. 확장 뒤 옮겨놓기만 하고 짬을 내지 못했지요. 아시다시피 그게 여간 큰일이라야 말이지요."
"그럼 이참에 그것까지 분류해서 아예 목록표를 만들면 어떨까요?"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만, 그게 그렇게 바쁜 일입니까? 내 말은 선생께서는 고대 서판을 정리하시러 오셨고, 그 일이 급선무일 텐데…."

고대 서판이 많지 않았을 때 교장은 '역사 이어붙이기'를 생각해 보았다. 무엇보다도 니푸르는 자료의 보고였다. 수메르의 그 어느 도시보다도 훨씬 많은 기록판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자신들의 작업을 위해서는 그 이상 좋은 곳도 없었던 셈이었다. 교장이 대답했다.

"그 고대 물 정리라는 게 생각했던 것처럼 분량이 많지 않고…. 허허, 일이 빨리 끝나면 책임 사제장께서 우리를 당장 내쫒을까, 두렵기도 하고…."
"그럴리야 있겠습니까, 왜 그런 생각을…."
교장은 농담 삼아 말했는데 책임 사제장은 진심으로 받아들였던지 심각한 얼굴로 고개까지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교장은 좀더 자세히 풀어서 말했다.

"총 정리까지 한다면 우리가 오래오래 머물 명분도 생기고 또 여기 사제들도 새로운 일거리라 흥미도 있을 테고…."
"그러니까 현대물 도서판 정리는 우리 사제들이 한다, 그 말씀입니까?"
"그래주면 금상첨화겠지요."
"그래요? 그것 참 괜찮은 생각인데요."
첵임 사제장의 얼굴이 비로소 환해졌다. 그에겐 교장이 특별한 사람이었다. 가장 존경하는 대사제장의 동창인데다 명망 있는 수도 우르의 교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가능하면 무엇이나 도와주고 싶었다. 임무 때문이 아닌 마음이 그러했다.

두 사람이 후식으로 나온 말린 무화과를 먹고 있을 때였다. 한 사제가 급히 식당으로 들어오더니 곧장 책임 사제장에게 다가와서 조용한 목소리로 보고를 했다.

"오늘 낮에 슈루파크까지 넘어갔답니다."

슈루파크는 니푸르에서 1백리도 떨어져 있지 않는 곳이었다. 교장의 얼굴은 삽시에 굳어졌다. 자칫하면 일을 시작해보기도 전에 다시 철수해야할지도 몰랐다.

"알았네. 오늘부터 성문을 걸어 잠그고 외부인을 통제하게."
책임 사제장이 말했다. 별로 걱정되는 얼굴이 아니었다. 보고자가 자리를 뜨자 교장이 물어보았다.

"성문만 잠그면 일이 해결됩니까?"
"그러믄요. 여긴 성지가 아닙니까? 또 어떤 신이 지배하고 계십니까? 걱정을 놓으십시오."

그 책임 사제도 대사제장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니푸르를 치면 엔릴 신이 용서하지 않고 그것은 침략자들도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교장은 안심이 되지 않았다. 자신 역시 집에 기도대가 있었고 매일 기도를 해왔지만 신이 언제나 보호해준 것은 아니었다. 적국에 끌려간 왕 또한 그랬다. 지난 정초에 '신성한 결혼식'을 성대히 올렸는데도 이난나 여신은 잘 익어가던 곡식마저 침략자에게 짓밟히게 했다. 이유야 어쨌든, 신이 돌아앉았던 아니던, 궂은 일이 올 때면 반드시 온다는 것이었다.

"교장 선생님, 내일 아침부터 우린 일을 시작합시다."
교장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책임 사제장은 태평스레 말했다.

'이 사람 엔릴 신을 믿어도 정말 대단히 믿고 있군.'
교장이 그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 낮에 읽었던 구절이 떠올랐다.

'다섯 개의 도시들…이 도시들의 통치자를 다음과 같이 임명하였도다.'
그는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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