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8

등록 2003.11.28 15:52수정 2003.11.28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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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감이 서한을 넘겨주자 교장은 그것을 다음 사람에게 건넸다. 그도 화덕 가까이 다가와 눈으로 빠르게 읽어갔다.

모든 사람들이 다 읽었을 때 교장이 말했다.


"이제 여러분들도 이해를 했을 것이오. 왜 이 자리를 주선했는지. 그렇소. 뒤따라오겠다던 대사제장께서는 이미 돌아가셨고 나 혼자서 나설 수도 없는 일이라 이렇게 여러분들을 부른 것이오."

"저희들로서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요."

교감이 대답했다. 다른 교사들도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교장이 미리 연락해 주지 않았다면 그들 또한 다른 교사들처럼 잡혀갔거나 타지를 헤매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저희들까지 교장 선생님을 따라간다면 폐가 되지 않을까요?"

젊은 교사가 물었다.


"아니오. 뭔가 함께 할 일이 있을 것이오."

교장이 대답하자 교감이 나섰다.


"모두 동행하기로 결정이 되었다면 이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요?"
"잠깐, 그 전에 길 사정부터 알아야겠는데…."

교장이 도움을 요청하듯 사제들을 바라보았다. 부사제장이 나섰다.

"여기 두 사제가 니푸를 다녀왔는데, 우루크, 라르사가 점령되었답니다. 그러니 좀 멀더라도 라가시 쪽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라가시까지는 여기서 몇 리나 되오?"
"백오십 리 쯤 됩니다."
"지금 출발한다면 날이 밝기 전에 그곳을 통과할 수 있겠소?"

그러자 또 다른 교사가 나섰다.

"그쪽이 아직 건재하다면 날이 밝아도 큰 위험은 없지 않겠습니까?"

교장이 대답했다.

"한나절 전의 건재가 한나절 후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니까…."
"어쨌든 서두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번에는 부사제장이 재촉했다.

"그래야겠지요. 그럼 어떻게 가는 것이 좋겠소? 내 말은 우리 모두 함께 가느냐, 아니면…"
"두 사람씩 짝을 지어서 가는 것이 좋겠지요. 여럿이 함께 가면 눈에 띄기도 쉽고 또 혼자서 간다 해도 가는 도중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그럼 젊은 사제 둘이 먼저 나서시오, 나는 교장 선생님과 동행하겠소."

부사제장이 그렇게 짝을 지었고 그래서 젊은 사제들이 먼저 나서는데 교장이 그들을 다시 불러 세웠다.

"잠깐, 전번 행보 땐 잠은 어디서 잤소? 민가에 들었소?"
"아니오.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아주 피곤할 때는 나무 밑에서 잠깐씩 쉬었을 뿐이지요."
"이번엔 낮잠을 자도록 합시다."
"낮잠이라니요?"
"다들 알고 있겠지만 라가시를 벗어나면 니푸르 행 직로에 '정원이 딸린 여관'이 있소. 거기서 일단 합류를 해서 낮 동안 지내다가 밤이 되면 다시 출발하는 것이오."
"여관은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곳은 내 친구가 운영하고 있소. 슐기 왕께서 그의 선조에게 지정해 주신 이래 대대로 이어온 가업이오. 믿을 만한 친구라 식사까지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오. 자, 그럼 출발하시오."

나머지 일행들도 짝을 지어 방을 나서기 시작했다. 마지막 사람까지 나가자 교장은 손에 들고 있던 점토판을 화덕 속에 던져 넣었다. 만약 이곳까지 약탈 대상이 된다 해도 화덕 속까지 뒤지지 않는 한 그 서판은 살아남을 것이다.

니푸르

부사제장은 교장과 걸어오면서 내내 대사제장에 관한 이야기만 했다. 20여 년 가까이 모셔 오면서 겪었던 일, 신전 관리를 어떻게 했고, 장인 대접은 어떠했으며, 눈속임이 심한 주방장의 집을 급습해서 훔쳐간 양과 염소 다리 열 개를 되찾은 일, 고아와 과부에게는 무일푼으로도 언제나 신전을 드나들 수 있도록 허락했으며, 몹시 가난한 사람에겐 헌납으로 받은 양털을 나누어주기도 했다는 이야기 등등.

사흘 동안 부사제장으로부터 들은 그 이야기만 다 기록한다 해도 점토판 1백장은 될 정도였다. 교장도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웠다. 말없이 그냥 걸어왔다면 훨씬 힘들고 지루했을 것이다.

"이제 니푸르까지는 한 십 리쯤 남았습니다."

부사제장이 말했다. 이야기도 거의 바닥이 났는지 그리고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각자 앞만 보고 걷는 것도 무료한 일이었다. 교장은 이제 자신이 이야기할 차례라 싶었고, 그래서 조금씩 걸음을 늦추며 넌지시 물어보았다.

"한데 난 아직도 모르겠구려. 그이가 왜 날더러 니푸르에 가라고 했는지. 단순히 도서 판을 읽거나 지키는 일이라면 그곳 사제들도 많은데…"

교장은 물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판에는 확실한 언급이 없었고 또 부사제장의 생각도 확인하고 싶어서 그렇게 자기 속내를 비춰본 것이었다.

"그렇지요, 사제들이야 많고도 많지요. 우르의 사제들까지 대부분 그곳으로 피신해 있으니까요."

부사제장이 대답했다.

"하다면?"
"대사제장께서는 아마도 교장 선생님과 함께 고문서들을 번역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역시 짐작했던 대로였다. 그들은 젊은 날 에두바(필경학교: 아카데미의 명칭)에서 함께 고대 문자를 공부한 사이였다. 교장이 다시 물어보았다.

"대사제장께서는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셨소?"
"오래 전부터 그러셨습니다. 고문서들을 현대 문자로 번역해두고 싶으시다고."

그렇게 마음만 먹어오던 중 불시에 침략을 당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른 아침 왕마저 끌려갔고, 그것은 곧 사직의 종언이었다. 그래서 대사제장은 다급하게 교장을 떠올렸고, 빨리 니푸르로 가라고 재촉했던 것이다.

그 서한을 읽었을 때 교장은 다른 각도에서 가슴이 뛰었다. 대사제장은 물론 신화를 확인시켜주거나 총정리하고 싶었겠지만 그는 신화가 아닌 역사였다.

이 나라에는 모든 기록이 넘쳐나지만 역사만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신학, 문학, 천문학, 농업, 수산업, 임업서, 법전까지 만들었고 그것들이 도서목록으로까지 정리되어 있지만 역사는 지금껏 신화의 우산 속에서 한 발짝도 밖으로 나오려들지 않았다.

수메르엔 수많은 왕조가 있어왔음에도 그 연대조차 바로잡혀져 있지 않았다. 만약 대사제장과 그 일을 한다면 그는 신화에서 역사를 추출하거나 최소한 왕조의 연대기라도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부사제장에게 당장 대답해 준 것이었다.

"물론 나는 당장 떠날 수 있소. 한데 대사제장은 언제쯤 합류할 수 있을 것 같으오?"

부사제장은 금방 눈물이 글썽해지면서 힘없이 대답했다.

"돌아가셨어요."

그만 맥이 빠졌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그가 없다고 해서 보류할 일이 아니었다. 또 사제장이 자기에게 그런 서한을 남겼을 때는 만약의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몰랐다. 혹시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쳐 그 일을 시작하지 못한다면 자네라도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그래서라도 신화든 역사든, 새롭게 정리해 두어야 한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는 부사제장을 돌려보낸 후 한참이나 서재를 서성거렸다.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오직 치고 오는 것은 '해야 한다, 반드시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한데 혼자서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분량이 많다면 누가 다 번역을 하고 또 누가 그것을 기록할 것인가?

그때 그는 교감을 떠올렸다. 교감은 고대 문자 해독에 능할 뿐만 아니라 일의 추진력도 뛰어났다. 그는 곧 교감에게 개인 서한을 보내 가능한 한 모든 교사들께 연락을 취하라고 지시했다.

정말로 니푸르가 안전하다면 교사들의 피신도 도울 겸 또 일도 함께 한다면 이 지독한 시기를 넘기는데도 각자에게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약속 날 오두막까지 온 평교사는 세 사람뿐이었다. 이미 많은 교사들이 도시를 떠났거나 어디론가 동원된 후였다. 교장은 실망이 컸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그 세 명의 젊은이들이 각자 역사와 시에 밝으며 필경 솜씨 또한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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