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깊은 물이 '소'를 이룬 그곳

서귀포 70경(13). 하늘과 땅이 만나는 천지연폭포

등록 2003.12.02 23:28수정 2003.12.03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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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은 아쉬움의 문턱에서 서성이는 늦가을의 정취를 모조리 빼앗아 갔다. 벌거벗은 가로수 사이로 곧게 뻗은 길 위에는, 미처 떠나지 못한 낙엽들이 뒹군다.

그러나 한라산 너머 서귀포에는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기다림과 아쉬움을 잠시 접고 떠나는 서귀포 70리 길. 텅 빈 계절을 꽉 채워올 수 있는 겨울 폭포로 떠나 보자.


a 천지연폭포

천지연폭포 ⓒ 김강임

기암절벽 위에서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리는 하얀 물기둥. 겨울 폭포를 바라보면 가슴에 응어리진 체증이 한꺼번에 쓸어져 내린다.

하늘과 땅이 만나서 이룬 연못, 천지연(天地淵) 폭포는 절벽 아래로 웅장한 소리를 내며 물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여름 폭포가 시원함을 준다면 겨울 폭포는 물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가 흐른다.

특히 서귀포 항에서 이어지는 천지연 폭포 가는 길은 혼자 걷기에는 너무나 아쉬움이 많다. 그래서일까? 가족끼리, 연인끼리 소곤대며 걷는 길은 한 폭의 그림이다.

a 미라보 다리 밑?

미라보 다리 밑? ⓒ 김강임

천지연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다리를 건너야 한다. 다리 밑에는 천지연 폭포에서 떨어진 물줄기가 강물처럼 유유히 흐른다. 다리 한가운데 서면 유년 시절에 애송했던 G.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가 떠오른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 그러나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 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있다"는 싯귀가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 더구나 '기쁨은 항상 고통 뒤에 오는 것'이라는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고통의 터널을 지겹게만 여긴다. 그리고 그 고통의 터널을 포기하고 탓하며 뒤돌아 가는 이도 있다.


그래서 서귀포 70리 길을 걷다보면 고통을 삭일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는지를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곳은 아주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 숨쉬고 있는 대자연이 아닐런지.

a 징검다리를 건너 볼까?

징검다리를 건너 볼까? ⓒ 김강임

다리를 벗어나면 가지런히 놓여 있는 징검다리를 만날 수 있다. 징검다리 밑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요동을 친다. 천지연 폭포의 물줄기가 얼마나 장관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온 이가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가위. 바위. 보를 하며 이긴 사람이 징검다리를 먼저 건너는, 로맨스의 주인공들. 사랑했던 사람과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어 보았을 게다.

a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 김강임

천지연 폭포 계곡에는 겨울의 터줏대감이 벌써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겨울 철새들이 맡는 고향의 냄새는 어떤 것일까? 기나 긴 여정을 단숨에 달려왔을 철새를 보니 언뜻 두고온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a 고향을 찾아온 철새

고향을 찾아온 철새 ⓒ 김강임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고 누가 말했던가? 흐르는 물줄기는 '소'를 이루고 다시 계곡을 만들어 작은 폭포수가 된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보며 세상의 이치와 순리에 고개를 끄덕인다.

노란 단풍잎이 떨어진 폭포 가는 길은 가을의 시작이다. 오솔길을 걷는 느낌, 아늑하고 호젓한 느낌이 마치 고향의 언덕배기처럼 느껴진다. 천지연 폭포 계곡에는 담팔수나무(천연기념물 제379호)가 자생하고 있고 희귀 식물인 송엽란, 구실잣밤나무, 산유자나무, 동백나무 등의 난대성 식물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특히 난대 식물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준다. 서로 어우러진 모습이 평화롭다.

a 오솔길을 걸어 보자

오솔길을 걸어 보자 ⓒ 김강임

천지연의 맑고 깊은 물은 수심 20m의 소(沼)를 이른다. 서귀포항 어귀에서 길게 뻗은 오솔길에는 치자꽃, 왕벚나무, 철쭉 등이 있다.

천지연 폭포는 선녀들이 몰래 내려와 목욕하며 노닐었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다. 높은 절벽에서 물줄기가 장관을 이루며 떨어지는 이름다운 폭포. 물줄기는 열대 수목으로 둘러 쌓인 좁은 연못을 지나 바다로 흘러간다.

a 맑고 깊은 물이 '소'를 이루고

맑고 깊은 물이 '소'를 이루고 ⓒ 김강임

세상의 저편에서 시달리다가 맑고 깊은 물을 보니, 내 마음도 고요해진다. 그 물줄기는 희다 못해 시퍼렇다. 천지연 폭포는 제주도 관광객이라면 반드시 방문하는 곳으로, 조면질 안산암의 기암절벽이 하늘 높이 치솟아 마치 신선이 사는 세계처럼 착각을 일으킨다.

a 가을이 흠뻑 젖어 있네요.

가을이 흠뻑 젖어 있네요. ⓒ 김강임

가을이 쉬이 가버린 줄 알았는데, 12월의 가을을 붙잡고 있는 천지연의 계곡에는 가을 단풍이 핏빛처럼 빨갛다. 이곳의 단풍잎은 왜 이리도 고울까? 아마 맑고 푸른 물 때문은 아닌지. 오지 않는 '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천지연 계곡에는 천연기념물 제163호로 지정된 담팔수 자생지 이외에도 가시딸기, 송엽란 등의 희귀 식물과 숨쉬고 있다. 계곡 양쪽에 구실 잣밤나무, 산유자나무, 동백나무 등의 난대성 식물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천연기념물 제379호로도 지정, 보호되고 있다.

a 기암괴석에 희귀 식물이 있네요

기암괴석에 희귀 식물이 있네요 ⓒ 김강임

산책로에서 1㎞쯤 걸어 들어가니 폭포의 비경을 만날 수 있었다. 폭 12m 높이 22m에서 세차게 떨어져 수심 20m의 호(湖)를 이루는 천지연 폭포. 폭포 뒤에는 벌거벗은 기암괴석이 추위에 떨고 있었다. 그 절벽 사이에 붙잡고 있는 키 작은 나무들. 생명이 얼마나 모진 것인지 그 고통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모르겠다.

날마다 걷는 것이 길이지만, 70리 길은 늘 새롭다. 넓은 아스팔트길을 걸으면서도 답답할 때가 있고, 오솔길을 걸으면서도 실크로드를 걷는 것처럼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 있기도 하다. 그것은 서귀포 70경이 문화, 역사, 자연, 생태학적으로 무한의 모습과 색깔을 띄고 있기 때문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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