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OW MAN(눈사람)

나의승의 음악이야기 39

등록 2003.12.03 10:49수정 2003.12.04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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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억 속에 그렇게 많은 눈이 오신 적은 없었다. 그 날 밤새도록 눈은 천천히 내렸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밤 동안의 정적과는 다르게 전혀 다른 세상인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꿈을 꾸듯이 마법의 한 장면과도 같았고 신비로웠던 그 날 나는 '눈사람'을 만들었다.

<스노우맨>(눈사람·레이몬드 브리그스 원작)이라는 제목의 애니메이션 영화의 첫 장면은 그런 말들로 시작된다.


지구상의 모든 영어 인구 중에 불과 몇%의 인구만이 사용하는, 전형적인 영국식 억양으로…. 굵고 거친, 그리고 그냥 스쳐 지나가듯 말을 하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날 때까지 단 한마디의 대사도 없다.

언어가 없이 만들어진 영화는 간혹 있어 왔다. 그렇지만 <스노우맨>처럼 언어가 없어서 오히려 아름다운 영화는 그리 흔하지 못하다. 그러나 거기에도 언어는 존재한다. 모든 예술형식에서 느끼게 되는 작가들의 행위는 그것 자체가 이미 언어이기도 하다.

영화는 사람들에게 눈으로 보게 함으로써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것을 전달할 수 있다. '영상언어'란 그러한 것 일 것이다. 애니메이션 영화 <스노우맨>은 영상언어의 그런 일면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상예술에서 그런 이야기는 이제 기초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서, 오히려 순수하게, 기초에 충실한 결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결정체, 나는 <스노우맨>을 그런 마음으로 맞아 대했고 기억한다. 그리고 그들의 순수는 3살부터 80살까지 통용될 것이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다. 일종의 에너지 보존 법칙처럼 우리들의 일상에 헤아릴 수 없도록 흔하게 그런 일은 존재한다. 맞는 비교일지 모르겠지만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옛날 '마일즈 데이비스'는 어느 날 자신의 밴드에서 피아노 없는 연주를 시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재즈밴드에서 피아노·베이스·드럼 세 악기가 주도하는 리듬 섹션은 거의 절대적으로 변하기 어려운 역할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피아노 없는 연주는 특히 혼(Horn) 부분에서 대단히 여유와 유연함이 넘치는 연주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스노우맨>의 '대사 없음'은 영상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해주고, 거기에 깔려 있는 음악의 아름다움에 더욱 귀 기울이게 해주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관객에게 그들이 원했던 것을 전달하는 일에 좀더 효과적인 결과를 맞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시각장애인들이 있다면 영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스노우맨>의 사운드 트랙을 영상 없이, 음반을 통해서 음악만을 듣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80년대 초 <스노우맨>의 사운드 트랙 L.P(Long Playng Record)를 만들 때, 하워드 블레이크라는 뛰어난 '이야기꾼'(무성영화 시대에만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을 '변사'로 등장시켜서, 그냥 듣기만 하는 사람들에게도 각자의 상상력을 통해서 이해와 나눔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꾸몄다.

그런 형식은 인권 영화제 같은 행사에서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각 장애인에게도 영화를 볼 권리는 있다고 생각하기에….

a <스노우맨>

<스노우맨>

이미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본 영화에 대해서 새삼스럽지만 약간의 내용 이야기를 해보면,

아이는 자고 일어나 온통 하얗게 바꿔버린 '눈'의 세상으로 뛰쳐나간다. 눈 위에 발자국을 남겨 보기도 하고 나뭇가지를 흔들다 눈 벼락을 맞기도 한다. 눈 속의 작은 산책과 사색 그리고 눈사람 만들기.

하루 온종일 눈사람을 만드는데 갖은 정성을 다한 끝에 모양을 완성하고, 눈·코·입을 만들고 모자를 씌우고, 목도리를 묶어주는데…. 이윽고 날이 저문다.

눈사람이 서 있는 마당에서 집으로 들어가 씻고 잠자리에 드는데, 한밤 열두시 낮에 만들어 놓은 눈사람 생각에 잠 못 이루다 깨어난 아이는 어느 순간 눈사람이 마치 마법에 걸려 있는 듯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된다.

친구를 맞이하는 것처럼 악수를 하고 집으로 초대를 하는 아이 그리고 처음 보는 갖가지 물건에 놀라는 눈사람, 그는 TV, 전등, 더운물 찬물이 나오는 개수대, 각종의 과일, 냉장고, 아빠의 틀니, 거울, 모자 따위를 태어나서 처음 보느라 신기해하고, '오르골'상자를 열면 나오는 음악과, 삐에로가 춤출 때, 거기에 맞추어 춤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아이와 눈사람은 마당 한구석에 세워져 있는 오토바이를 타고 숲을 헤집고 다니며 꿩·토끼·부엉이·여우·조랑말의 밤잠을 깨우다 집으로 돌아오고…. 창고에 들어가 저온저장고에서 눈사람은 잠시 쉰다.

그러다 문득 눈사람은 잊어버렸던 일이 생각난 듯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오고 아이와 눈사람은 활주로를 달리듯이 마당을 달리고 마침내 날아 오른다.

영화 <스노우맨>에서 가장 유명한 '하늘을 걷다'(Walking in the air)라는 음악은 여기서 나온다. 조지 윈스턴이 그의 음반 <포레스트>에서 연주하기도 했던 '하늘을 걷다'는 그 외에도 여러 사람이 연주하고 노래했다.

어쨌든 그들은 파란 겨울 하늘을 날아서 사람들이 잠든 집과 마을을 넘고 바다를 건너며, '오로라'의 오색 영롱한 빛이 있는 북국의 눈과 얼음의 나라에 도착한다.

아이와 눈사람은 산타할아버지와 눈사람들의 환영과 춤과 음악의 축제에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거기서 그들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오두막에 초대를 받고 하얀 사탕이 무늬져 있는 파란 목도리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는다. 아이와 눈사람은 갔던 길을 날아서 집으로 돌아오고 작별인사를 하고 눈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처음 서 있던 그의 자리에 돌아가 전처럼 부동의 자세로 서고, 눈사람과 작별의 포옹을 하고 돌아서는 아이는 아쉬운 마음으로 집으로 들어간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자 마자 눈사람에게 뛰어가는 아이. 그가 멈춰선 마당 한곳에는 눈사람이 썼던 모자와 목도리와 아이가 단추로 달아 주었던 석탄 몇 개만이 녹아버린 눈사람의 흔적 위에 남아 있었다.

아이는 울먹이는데 그의 손에는 산타할아버지가 선물한 사탕무늬가 있는 목도리가 꼭 쥐어져 있다.

한국화의 부감법으로 그린 산수화처럼, 녹아버린 아이스크림같은 눈사람의 흔적 앞에 서 있는 아이의 모습은 거기서부터 줌아웃되고, 그 장면에 피아노의 연주로 '하늘을 걷다'는 흐른다. 그리고 끝에는 어느 영화나 그렇듯이 자막이 올라간다.

겨울이라는 이름의 자연과 그것을 상징하는 눈사람 그리고 우리 모두의 친구인 자연. 남원의 지리산 자락, 해발 500m에 사는 선배 J는 전화속에서 "천황봉이 옷을 하얗게 입었어"라고 말한다. 천황봉은 지금부터 적어도 내년 4월까지 그렇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는 그가 보았던 모든 애니메이션 영화속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스노우맨>을 꼽는다. 그의 주장은 가장 쉬운 언어가 가장 최고의 언어라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스노우맨>을 봤다. 나도 아이가 생긴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나의 선배도 나도 보통사람이다. 이것을 읽는 당신도 보통 사람이어서 우리와 생각을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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