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12

등록 2003.12.05 11:06수정 2003.12.05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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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 전부터 환족이 동쪽으로(이때부터 동이족으로 불리기도 했다) 뻗어와 소머리에서 우수리 강까지 영역을 넓혀갔지만 소호 국이 곡부(曲阜)에 도읍한 것은 불과 2,3백 년 전이었다. 그런데 수천 년 전의 신용을 그것도 황하에서 기다리다니 이 청년이 지금 제정신인가? 사나이는 청년이 하는 태도가 도무지 이상했지만 그래도 궁금해서 되물어보았다.

"한데 어찌 청년이 그 신성한 용을 기다린단 말이오?"
청년은 가만히 웃기만 했다. 사나이가 다시 물었다.
"그럼 청년께서는 정말로 믿고 있소? 그 신용이 청년에게도 나타나리라고."
"언젠가는 보게 될 것입니다."


청년이 자신 있게 대답한 후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마치 그 하늘이 대답해줄 것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하늘의 해는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사나이는 이제 청년의 행태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미친 것 같지는 않은데…. 흠, 망상에 사로잡힌 청년이로군!'
사나이는 쩝, 하고 입을 다시면서 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젊으나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미망이라…. 그 나이라면 활쏘기나 심신수련에 정진해야하거늘….'

그때 청년이 물어왔다.
"이 짐승도 이름이 있습니까?"
"있다마다. 이놈이 바로 낙타요. 뭍사람들과 대상들이 갖고 싶어 하는 그 귀물이란 말이오."
사나이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황소처럼 짐을 싣기도 하는데…. 저는 이런 짐승 생전 처음 보았습니다."
사나이는 '없는 짐승이나 쫓아다니니 그렇지'라고 속 대답을 하는데 청년이 뒷말을 이었다.

"그런데 좀 흉측하게 생겼군요."
사나이는 그만 발끈했다.
"흉측하다니, 남의 귀물을 두고 함부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오!"
더할 데 없이 귀한 낙타가 흉측하다니! 사나이는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빠지는데 청년은 그것도 모르고 계속 주절거렸다.

"제가 듣기로는 먼 길엔 말 이상 없다던데요?"
'무식한 것이 건방지기까지 해?'
사나이의 인내심도 이제는 꼭지에 도달해 뚜껑을 차고 나갈 지경이었다. 아직 나이가 일러 세상을 두루 돌아보지 못했거나 식견이 짧아 그럴 수도 있으련만 사나이는 왠지 자꾸만 그렇게 심사가 뒤틀렸다.

하긴 잔뜩 기대하고 찾아온 소호 국이었다. 불과 기백 년 만에 4,5천 여리의 영토(산동성에서 강소성 북부에 이르기까지)를 확장했는가 하면 인재와 문물 또한 가장 앞서 간다는 자신의 본국이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만난 본국, 그것도 도성의 청년이 예지가 번들거리기는커녕 환상이나 쫒는 망상가라니….

"젊은이, 말은 사막엔 적당치 않아. 왜냐구? 하루만 물을 먹이지 않아도 기운을 못 쓰니까. 하지만 이놈은 달라. 어떻게 다르냐구? 닷새를 굶어도 뚜벅뚜벅 잘만 걷는다네."
첫 대면부터 대놓고 나무랄 수 없었던지라 사나이는 애써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도 청년은 다 알아듣지 못한 표정이었다. 불쑥 사나이가 되물었다.

"한데 청년은 몇 살이오?"
"열아홉입니다."
"장가는 들었소?"
"아닙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지요."
"보통 그 나이면 장가를 든다고 들었는데?"
"저희들은 조금 다르지요."


사나이는 자꾸만 심술이 나서 '네까짓 게 뭐가 그리 다르냐'고 다질러주고 싶었지만, 아침부터 감정이 들뛰면 자신에게도 이롭지 않다 싶어 질문의 가닥을 돌려 보았다.
"한데 허리에 맨 그 흰 띠는 뭐요? 그건 이 마을 풍습이오?"
"아닙니다. 이건 청년 선인(화랑도 같은 것)이란 표시지요."
"청년선인?"
"아직 조의선인(교화나 강론도 담당할 수 있다)이 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답니다."
"조의선인은 또 뭐요?"
"조의선인이 되면 검은 비단 끈을 맵니다."
"선인, 선인 하는데, 대체 그 선인들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이오?"
"백성들을 교화하거나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으면 앞서는 사람들이지요."

위급한 일에 앞선다는 사람이 무술연마는 하지 않고 엉뚱한 것이나 쫒아? 사나이가 속으로 왼고개 질을 할 때 청년이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저기 벌써 성문이 보이는군요."
그들이 성문 안으로 들어서자 사나이가 물었다.
"궁문은 어디로 가는지 아오?"
"예, 바로 저기입니다."
청년은 선선히 궁문 앞으로 안내했고 거기서 다시 물었다.
"제가 안에까지 안내해드려야 합니까?"
"아니오, 됐소. 이제 돌아가 보시오."


사나이는 '이제 너 같은 것은 소용없다'는 듯이 잘라 말했다. 이제부터는 궁지기들이 자기를 알아서 모셔준다는 뜻이었다. 사나이가 낙타와 함께 궁문 안으로 들어가자 궁지기들도 그 뒤를 따랐다. 낙타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들 또한 그 이상한 짐승은 처음 보는지라 그 좋은 구경을 놓칠 리가 없었다.

그날 오후 청년은 몇몇 젊은이들과 함께 교화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내년 국중대회 때 참전식(參佺式)에 응시하기 위해서였다. 그 참전식은 국중대회의 주무행사였고 거기서 조의선인이 선발되었다.

"신시(神市)에는 녹서(鹿書)가 있었고 단군에는 신전(神篆)이 있었고 자부에는 우서(雨書)가 있었고 파내류 국에는 오서(烏書)가 있었고...태호 복희에는 용서(龍書) 가 있었다…."

교화 스승이 강론을 계속했다. 스승은 대머리에 백발의 긴 수염을 가졌는데 그 수염을 끈으로 묶었다. 나이든 교화스승들은 대체로 머리보다는 수염에 치장하기를 좋아했는데 그 까닭은 늙어질수록 머리는 잘 빠져 대머리가 되기 쉽지만 수염만은 그렇지 않은 때문인지도 몰랐다. 또한 어떤 스승은 머리는 아예 배코를 치고 수염만 길렀는데 그 수염 치장에도 각자의 취향이 다 달랐다.

스승이 수염 아랫단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녹서와 오서의 형태를 설명했다. 그 스승은 이번 학생들을 위해 먼 곳에서 특별히 초청된 분이었다.
"이제 용서를 말하자면 그것은 곧 우리가 쓰는 괘, 역서(易書)와도 같느니라."

스승이 '용서'를 언급하자 청년은 또 신용을 떠올렸다. 오늘 아침에도 용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대신 이상한 짐승과 낯선 사람을 보았다. 그 손님은 아주 먼데서 사막을 건너왔다고 했는데도 소호 국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방언 같기는 했지만 의사전달은 확실했다.

"용서를 만든 태호 복희씨는 또한 신시의 계해역법(癸亥曆法)을 고쳐 갑자세수로 삼았고…."
청년의 생각은 자꾸만 낯선 손님에게로 달려갔다.
'그는 어디서 온 사람이었을까. 왜 그걸 물어보지 않았을까. 손님이 온 곳이 아주 멀어 내가 들어보지 못했다 해도 스승에게 물어보면 훤히 아실 것이고 또 그곳이 어디쯤인지 잘 갈쳐주실 텐데.'

스승은 젊은 시절부터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교화 지도를 해왔다. 소머리 강 쪽은 물론 황하를 지나 중원, 천산, 천해(바이칼 호) 근처까지 아니 다닌 곳이 없었고 또 지역 특성에 대해서도 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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