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고 낮은 거북이의 시선으로"

2회 '고정희상' 자매상- 장애여성연대 '공감' 박영희 대표

등록 2003.12.04 12:25수정 2003.12.04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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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공감' 박영희 대표

'공감' 박영희 대표 ⓒ 우먼타임스

11월 28일 장애여성인권단체 '장애여성공감'(대표 박영희, 이하 공감)이 '또 하나의 문화'가 주최한 제2회 '고정희상'의 단체상인 자매상을 수상했다.

고정희상은 운동가, 시인으로서 고정희씨의 삶을 기리기 위하여, 고정희씨가 남긴 삶의 경험과 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여성(단체)'을 선정하여 2001년부터 격년제로 수여하는 상이다. 이날 행사에서 고정희상 개인상은 시인 김승희씨가, 단체상은 장애여성공감이 수상했다.

"소외된 장애여성 문제 드러냈다"

'공감'에 단체상을 수여한 또 하나의 문화는 "장애여성공감은 제도와 기준이 가진 문제에 대해 서로 공감하고,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사회의 주변부에서 장애를 이유로 분리되어 있는 여성들의 문제를 알리고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권리를 위한 운동을 활발하게 벌여나가고 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장애여성들의 경험을 드러내고, 장애 여성들이 가진 욕구를 표현하며, 장애를 가치절하하지 않고, 장애 여성의 공통된 의식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데 그 의의를 둔다"며 시상 이유를 밝혔다.

1998년 2월 창립된 장애여성공감은 우리 사회가 인지하지 못했던 '여성장애인'이라는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시민단체 활동가 출신인 장애여성과 비장애여성이 어우러진 공감은 여성단체로, 장애운동단체로 매우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다.

2001년부터는 장애여성성폭력상담소를 열고 장애여성의 성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상담 건수는 적지만 장애여성으로서 성폭력 피해를 당한 경우 경찰 조사, 병원 검진까지 끝까지 함께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한 건당 거의 1년을 쫓아다니며 상담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힘이 들기 때문에 전문 상담자들이 선뜻 나서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기도 하다.

매월 장애여성을 위한 강연과 토론회로 구성된 교육과정을 개설하고 인권캠프를 통해 장애여성이 집을 떠나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 가을에는 '난장' 문화제를 통해 함께 참여한 여성들의 연극, 퍼포먼스, 영상문화제 등을 선보이고 있다.


자매상을 수상한 공감의 대표 박영희(43)씨는 수상 소감을 묻자 "기쁘기도 하지만 겁이 난다. 그만큼 우리가 앞으로 더 잘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며 입을 열었다.

우리 사회에 '장애여성'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장애인 중 '여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온 것도, 여성으로서 장애인으로서 이중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려온 것도 '공감'이다. 박영희씨는 자신이 여성장애인으로 살며 부딪히는 일상을 여성장애인을 위한 사회운동으로 승화시켜왔다.


박 대표는 "1995년부터 '빗장을 여는 사람들'이라는 장애운동단체에서 여성분과 운동을 했다. 거기서 나 같은 장애여성 친구들과 비장애여성 친구들을 만났다. 그렇게 만난 9명이 남성 중심의 장애운동이 아닌 여성장애인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1998년 공감을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거북이 시스터즈> 비디오로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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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먼타임스

박 대표는 장애여성 친구 두 명과 함께 가족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1997년 고덕동에 방을 얻었다. 서른 중반이 넘어 처음으로 이룬 독립이었다. 아무도 여성장애인이 스스로 독립해서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해냈다. 그리고 그 하루 하루의 일상을 영상에 담아 올초 48분짜리 비디오 '거북이 시스터즈'를 발표했다. 공감이 사회적 관심을 끌게 된 계기였다.

박 대표는 "내 일상을 다른 사람에게 보인다는 것이 창피했지만 느리고 낮은 거북이의 눈으로 세상을 사는 장애여성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그들의 삶은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이 평범했지만 장애여성이기 때문에 특별했다. 그때부터 세상은 장애여성의 삶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 장애여성에게는 인간으로서 누구나 이성에 대해 가지는 부끄러움이나 욕망은 무시됐다.

박 대표는 "지하철 계단 앞에서 여성장애인에게 남성이 다가와 '업혀요'라고 말한다. 낯선 남자에게 어떤 여자가 그렇게 쉽게 업힐 수 있나? 아무도 그 부담스러움을 이해하지 못했고 계단을 스스로 오를 수 있게 바꿔주려고 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장애女 배려 안한 남녀공용 화장실

장애여성을 힘들게 하는 대표적인 무관심은 장애인 화장실이다. 지하철의 장애인 화장실에는 남녀 구분이 없다. 남자화장실에 비해 여자 화장실이 턱없이 부족한 세상에 장애여성을 위한 화장실은 아예 없었다.

"생리적 현상 앞에서 남녀공용 화장실을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야 했다. '공감'에서 이야기하면서 고속도로 휴게실의 여자화장실에 여성장애인 화장실이 따로 생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공감을 세상에 알린 또 하나의 활동은 매년 가을 열리는 '난장' 문화공연이다. 올 10월에도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장애여성이 직접 기획하고 참여한 연극과 퍼포먼스로 눈길을 끌었다. 단 하루 열리는 공연이지만 난장을 만들기까지 공감과 장애여성들은 1년을 투자한다.

공감은 매년 하나의 주제를 두고 한 달에 두 번씩 강연과 토론회로 구성된 교육과정을 마련하고 있다. 작년에는 '성'이, 올해는 '폭력'이 주제였다.

박 대표는 "남성이 여성에게 언어적, 성적, 물리적 폭력을 가하듯 자매, 어머니, 아버지는 장애여성에게 어렸을 때부터 "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 "무능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것이 바로 폭력"이라고 말한다.

독립된 인격체로 살아갈 수 없도록 가족, 부모, 형제의 보호와 의존 속에 살아야 하는 존재로 박제돼 있는 상황이 신체적인 가해보다 더 큰 폭력이라는 것이다.

"넌 할 수 없어" 언어 폭력에 상처

박 대표는 "토론회에서 여성장애인은 자신의 경험 속에서 어떤 것이 폭력이었는지,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이야기하면서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고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친구를 얻게 된다"고 말한다.

공감은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여성 장애인의 '독립'과 '치유'의 시간을 만들고 그들이 대문 밖을 나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박 대표와 인터뷰가 있었던 11월 26일, 박 대표가 자주 들른다는 시청별관 내의 자판기 앞으로 가려하자 직원들이 행사가 있다며 박 대표의 휠체어를 가로막았다. 마침 장애인이동권연대의 시위가 별관 앞에서 열리기로 한 터라 경찰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별관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비장애인인 기자 혼자 들어갔다면 아무도 막지 않았을 길을 장애여성인 박 대표는 갈 수 없었다. 결국 시청별관 마당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하고 돌아나오는 길에 낙천적인 박 대표는 "민감한가 봐요"하며 환하게 웃을 뿐이었다.

장애여성의 목소리가 이 사회의 화음으로 자리잡고, 시청자판기 앞에 직원들의 눈길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을 때까지 공감은 아직 할 일이 더 많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박 대표의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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