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면서 차 나누는 별난 여자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20>강변 찻집 "알 수 없는 세상"

등록 2003.12.08 13:29수정 2003.12.08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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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강변찻집 "알 수 없는 세상"

강변찻집 "알 수 없는 세상" ⓒ 이종찬

창원시 동면 본포리
새로 놓인 낙동다리 건너기 전
강변 나지막한 곳에
언제 자리를 잡았는지
'알 수 없는 세상'이라는 찻집이 있더이다
집주인은 오십대 초반의 중년 여인
손님이 오면 차와 함께
직접 기타를 치면서 서너 곡의 노래를 들려주는
참으로 멋진 여자라는 생각이 들다가
대여섯 평 면적에 열 서너 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
한 백오십 호가 될까 말까 한 크기의 창 밖에는
새로 놓인 다리
말없이 흐르는 강물
강변 모래
간간이 날아오르는 철새들
창밖의 풍경이 그림인지
저쪽에서 보는 우리가 그림인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세상이더이다


(이선관 "알 수 없는 세상" 모두)


알 수 없는 세상? 그래.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면 한마디로 알 수 없는 세상이다. 부안군 핵폐기장 문제도 그렇고, 자신들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미국 같은 야당의 태도도 그렇고, 이라크 파병문제도 그렇다. 그래. 그래서 찻집의 이름마저 "알 수 없는 세상"이라고 지었을까.

살얼음 끼는 낙동강변에 겨울 철새가 날아들듯이 간혹 길손이 찾아오면 국화 차나 복분자 차 같은 우리 전통차를 내놓는 여자. 그리고 그 길손의 추운 마음을 달래주기라도 하려는 듯 기타를 치며 철새 울음소리 같은 목소리로 동요를 불러주는 참으로 별난 여자. 손님도 가려서 받는다며 눈웃음 치는 여자.

a 이곳은 동읍 본포 낙동강 옛나루터였다

이곳은 동읍 본포 낙동강 옛나루터였다 ⓒ 이종찬

a 기타를 치며 동요를 부르고 있는 주인 장윤정씨

기타를 치며 동요를 부르고 있는 주인 장윤정씨 ⓒ 이종찬

제 아무리 알 수 없는 세상이라지만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이 가끔 찾아드는 손님을 선별해서 받아? 그래. 분명 저 50대 아지매의 눈웃음 속에는 뭔가가 있다. 아마도 찾아드는 손님을 받지 않는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보이는 손님에게는 동요를 불러주지 않는다는 그런 뜻일 게다.

"남편과 헤어진 뒤 아이들을 데리고 살다보니까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이 집을 하게 됐지요. 또 그렇게 하다 보니까 이제는 제가 좋아서 계속하고 있구요."
"올 겨울은 조금 따뜻하게 날 수가 있겠습니까?"
"추우면(벌이가 신통찮으면) 조금 떨면 되지요."


"알 수 없는 세상"의 뒷문 밖에는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속에 나오는 그 금모래가 한 폭의 그림처럼 반짝이고 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보면 금모래 속에는 누군가 뿌려놓은 밀이 파란 눈망울을 두리번거린다. 보나마나 저 파란 밀싹의 절반은 날아드는 철새들의 모이가 될 게 뻔하다.

1953년 대구에서 태어나 창원공단에 근무하는 남편을 따라 창원으로 이사를 온 장윤정(50)씨. 그도 처음에는 여느 가정주부처럼 자식을 낳고 남 부럽지 않게 알콩달콩 살았다. 그리고 그렇게 곱게 늙어갈 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세상이 놓여져 있었다.


그가 한번도 꿈꾸지 못했던, 아니 TV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것인 줄 알았던 '이혼'이라는 단어. 그 '이혼'이란 뜻하지 않았던 장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때부터 달갑지 않은 '이혼녀'라는 꼬리표를 매달고 알 수 없는 세상을 향한 긴 항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40대 중반이 되어 닻을 내린 곳은 낙동강변 옛 나루터였다.

a 뒤뜰엔 낙동강이 흐른다

뒤뜰엔 낙동강이 흐른다 ⓒ 이종찬

"처음에는 과수원에 달린 조그만 움막이었지요. 과일을 수확해서 잠시 보관하는 창고라고나 해야 할까요. 그런 집을 매일 같이 쬐끔식 수리를 한 뒤 간판을 달고 나자 괜히 시샘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어요. 그 때문에 그동안 그냥 사용하고 있었던 이 집을 구입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랬을 것이다. 첫 눈에 보아도 고향 같이 아늑한 곳, 말 그대로 안이 풍경인지 밖이 풍경인지 모를 정도로 너무나 정겨운 곳이 이 곳이니까.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좋은 일에는 늘 마가 따르기 마련이었던가. 지난 번 태풍 '매미'가 왔을 때에는 이 집의 절반이 잠길 정도로 큰 수해를 입었단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돕는 사람이 없었다. 근처에 있는 마을 사람들 몇몇이 밤새 이 집이 주인과 함께 강물에 휩쓸리지나 않았는지 흘깃거리다가 돌아갔을 뿐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혼자서 집을 다시 수리하고 벽지를 새로 바르고 빨래를 하느라 꽤나 애를 먹었단다.

바람속으로 걸어갔어요
이른 아침의 그 찻집
마른 꽃 걸린 창가에 앉아
외로움을 마셔요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홀로 지샌 긴 밤이여
뜨거운 이름 가슴에 두면
왜 한숨이 나는걸까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

(조용필 '그 겨울의 찻집' 모두)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바라만 보아도 저절로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이라는 노래가 흥얼거려지는 강변 찻집 '알 수 없는 세상'. 그 세상 속에서 마음이 쓸쓸한 날이면 금모래를 바라보며 시를 긁적이고, 시퍼런 강물을 바라보며 노래도 부른다는 알 수 없는 50대 초반의 여인 장윤정씨.

a 겨울 철새들도 제법 날아든다

겨울 철새들도 제법 날아든다 ⓒ 이종찬

a 옆뜰에 세워둔 솟대가 지난 번 태풍으로 반쯤 무너져 있다

옆뜰에 세워둔 솟대가 지난 번 태풍으로 반쯤 무너져 있다 ⓒ 이종찬

옆뜰엔 지난 번 태풍 때 반쯤 무너진 솟대. 그 솟대 곁, 바람이 숭숭 빠져나가는 나뭇가지만 남은 감나무에 꼭 하나 매달린 감홍시. "알 수 없는 세상"이라는 글씨가 씌어진 빨간 우체통. 빨간 우체통 위 아름드리 미루나무 가지에 매달린 허연 낮달. 그리고 뒷뜰에 펼쳐진 금모래. 금모래를 사이에 끼고 말없이 흐르는 낙동강….

한번 다녀간 사람은 반드시 다시 찾는다는 강변 찻집 "알 수 없는 세상". 그래. 나 또한 지금 이곳을 떠나면 다시 찾아와야만 할 것만 같은 '그 겨울의 찻집'. 눈을 비비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아도 이선관 시인의 시처럼 밖에 그림인지 안이 그림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언뜻 보기에는 저 여자가 차를 팔고 노래나 부르면서 살아가는 아주 낭만적인 여자처럼 보여도 실상은 그렇지가 않아."
"아니 왜요?"
"낙동강의 파수꾼이거든. 지난번에도 사냥꾼들이 마을사람들 몰래 천둥오리를 잡으러 왔다가 저 여자한테 걸려서 혼땜을 했었지."
"하여튼 알 수 없는 세상에 사는 별 난 여자가 틀림없네요."

a 아주 작고 빨간 우체통이 정겹다

아주 작고 빨간 우체통이 정겹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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