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19

등록 2003.12.18 09:25수정 2003.12.18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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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일이었다. 이른 아침 신치와 태대신들이 소도(제천을 행사하는 곳) 뒷산으로 올라갔다. 여기저기서 안개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솜뭉치같이 나무에 척척 올라붙었고 그리하여 마치 커다란 누에고치처럼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리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신치는 혼자 생각했다.

'흠, 오늘 제주 부친이 한때 잠사였다고 안개도 예우를 차려 고치처럼 탐스럽게 매달려주는구나.'
저만치 높다란 참성단이 보였다. 어제 백여 명의 중인들이 동원되어 새롭게 단장해둔 천단이었다. 초입의 큰 나무에는 벌써 방울과 북이 걸렸고 천단 주변의 나무들도 잘 손질되어 있었다. 제천이 끝나면 거기에 금줄이 매여질 것이었다.


해마다 3월과 10월에 지내는 소도 대제에는 태대신들은 물론 역대의 신치들까지 다 참여하여 우주의 창조와 환족의 고사(古史)와 동이, 소호의 형제국이 머무는 곳의 산천지리, 명승지, 천자와 백성의 도리 등이 노래로 읊기도 했다.

간혹 새로운 무기나 발명품이 만들어졌을 때도 담당대신이나 장수가 천단에 그것을 봉납했다. 처음 단궁(박달나무로 만든 활)이 만들어졌을 때도, 광대사리 활에 요석촉 화살을 사용하게 되었을 때도 장수가 그 발명품을 바쳤다. 경신년, 디딜방아를 만들어냈을 때는 왕이 직접 그 발명품을 천신에게 고했다.

한번은 한 사나이가 큰나무를 쪼개서 배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너무 커서 천단까지 들고 올 수 없었으므로 대신 작은 모형을 만들어다 봉납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절차가 없을 것이었다. 주무행사는 멀리 출정하는 사람이고 따라서 신의 정기가 그에게 깃들도록 태대신이나 중인, 백성들이 모두 함께 빌어주어야 할 것이었다.

천단 옆 방구(方丘)에도 이미 영고(迎鼓)인들이 도착해 있었고 그와 좀 떨어진 곳엔 흰 옷을 입은 에인도 똑바로 앉아 명상에 잠겨 있는 것이 보였다. 신치와 태대신들이 산곡과 나무, 토단 위치와 높이의 정확여부를 살피고 있을 때 봉납물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천신에게 바칠 술과 햇곡으로 빚은 떡, 음식들이었다. 고기는 주로 수렵으로 잡은 것들로 통 돼지와 노루 등이었다.


머리를 박박 밀어붙인 중년 선인들이 봉납 물을 받아 천단에 차례로 놓는 사이 왕과 함께 '딛을 문'의 제후가 올라왔다. 벌써 백성들도 다 도착해 양 옆으로 나란히 도열해 있었고 태왕이 지나갈 땐 모두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여인들은 깨끗한 옷차림에 머리들을 단정하게 틀어 올린 반면 처녀 총각들은 푸른 옷에 머리들을 길게 땋아 내렸다. 미혼들이 그런 차림을 하기 시작한 것은 태왕이 등극하면서부터였다. 그러니까 그것은 태왕이 만든 새 풍속인 셈이었다.


태왕이 천단 가까이 닿았을 때 에인이 내려왔다. 에인이 태왕을 맞이할 때 역법사가 제후의 팔을 슬며시 잡아당겼다. 뒷줄로 물러나라는 뜻이었다.

태왕과 에인이 나란히 서서 천천히 천단으로 향했다. 그 천단은 삼신을 뜻하는 3단 형식이었으나 사람들이 다듬어 올린 것은 사실상 두 단이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설 수 있는 곳은 맨 아랫단으로 바닥만 잘 고른 것이고 그 위 중간 단은 돌을 쌓아올려 왕과 중신들이 도열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고 참성단은 중간 단 끝 쪽에 서 제법 높고 또 넓게 올려져 있었다.

그 참성단이 봉납물을 바치는 천단이었고 천단 양 옆으로는 일곱 개의 계단이 있었다. 봉납물은 그 계단을 통해 올려졌으며 그와 같은 계단의 숫자가 곧 칠성을 의미했다.

태왕과 에인이 천단을 마주하고 섰다. 안개는 그새 사라지고 붉은 햇살만이 두 사람을 포근히 감싸 안았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역법사의 입에서 호! 하는 탄성이 울려나왔다. 징조가 좋은 모양이었다.

신치와 태대신들도 그 뒷줄에 나란히 섰다. 각 읍의 수장들은 중신들 뒤에 섰고, 백성들까지 천단을 향해 똑바로 섰을 때 경쇠가 댕, 하고 울렸다. 그러자 곧 태왕이 입고 있던 황포를 벗었다.

태왕은 벗은 황포를 천단을 향해 세 번 휘저은 뒤 에인에게 입혀주었다. 그로서 백성들은 오늘 제주는 왕이 아니라 에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태왕이 뒤로 물러나고 에인이 앞으로 나서자 영고인들이 북을 치기 시작했다. 신을 부르는 신호였다. 에인이 두 팔을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천신이 오셨나이다!"
뒤이어 영고인들이 빠르게 북을 쳤다. 백성들의 귀에는 그 북소리가 산정을 뛰어내려오는 신의 발소리로 들렸고 그와 동시에 모두 엎드려 절을 올렸다.

"환인, 환웅신님이 오셨나이다!"
다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영고가 좀 길었고 모두 그대로 엎드려 있는 사이 에인이 천신에게 서고문을 바쳤다.

"조화의 신이 내려오셔서 우리의 성이 되고 치화의 신이 내려오셔서 우리의 정(精)이 되었사옴에 우리 환족이 만물의 으뜸이 되었나이다!"
뒤이어 주악인이 경쇠를 두드렸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천천히 일어나면서 환화가(桓花歌)를 부르기 시작했다. 다른 주악인들도 그 노래에 장단을 맞추며 피리와 날라리를 불었다.

산유화야 산유화야
거년종 만수요 금년종 만수로다
불함에 봄이오니 꽃은 만홍이라.
천신을 섬기고 태평을 줄기네

해가 높이 올랐을 때 천신제는 끝났다. 마침 점심 때였다. 천단의 음식들이 내려지기 시작했다. 선인들이 음식을 들어내 주면 중인들이 줄을 서서 그 음식을 아래로 전달했다. 이제부터 두레 음복 시간이었다. 천단 아래로 받아 내려진 떡과 고기는 모든 백성들에게 분배되었다.

사람들이 둘러앉아 음식과 함께 환담을 즐기는 사이 선인들이 긴 직포를 풀어 천단 주변의 나무들에 금줄을 둘렀다. 식사가 끝나면 곧 천군의례가 시작될 것이었다. 그것은 제주로 지정된 사람이 치러야 할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다. 새 제주는 금줄 안으로 들어가 천신 혹은 삼신(三神)들과 만나 그들로부터 예언을 듣거나 어떤 조화를 볼 것이었다.

금줄치기가 끝나갈 때쯤 백성들도 식사를 끝냈다. 이제 그들은 하산을 서둘러야 했다. 일단 금줄이 쳐지면 천단 주변엔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되었고 제주는 밤이 될 때까지 혼자 남아 있어야 했다.

세 가닥의 금줄이 모두 쳐지자 경쇠가 울렸다. 그 경쇠소리에 발맞추어 황포를 입은 에인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참성단으로 올라갔다. 그가 참성단 위 맨 가운데에 정좌로 앉았을 때 아래서 지켜보던 태왕이 등을 돌렸다. 신치도, 태대신들도 모두 태왕을 따라 하산을 시작했다.

'딛을 문'제후만이 더 지켜보지 못하는 것이 애석한 듯했으나 그 역시 아니 내려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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