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특하고 대견한 대학생 생질

등록 2003.12.17 13:40수정 2003.12.1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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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전인 10일 색다른 일을 하나 했다. 천안의 한 대학교 기숙사에 가서 방학을 맞은 생질의 짐을 내 차에 실어오는 일이었다. 오전에 생질의 모교인 만리포고등학교 3학년 특강을 마치자마자 점심도 거른 채 곧바로 출발했다. 일찍 돌아와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실속도 없이 참 바쁘게 산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생질의 부탁에 의한 그 일이 싫지는 않았다. 컴퓨터도 있고 짐이 많아서 버스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기에 외삼촌께 부탁을 드린다는 녀석의 메일이 나는 고맙기도 했다.

생질이 다니는 공업대학을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교문에 붙어 있는 학교 이름 바로 위의 '국립'이라는 두 글자가 내게 삼박한 질감을 안겨주는 듯싶었다. 내 전화를 받은 생질은 학교 안이 아닌 바깥쪽에서 달려왔다. 방학 동안 헤어져 지낼 친구들과 한 잔하고 있던 중이라고 했다.

생질을 태우고 기숙사로 갔다. 한 학기 20만원의 저렴한 비용으로 생질이 생활하는 기숙사 건물이 어쩐지 내게 다정한 느낌을 안겨주는 것 같았다. 생질이 룸메이트와 함께 짐을 내오는데 꽤나 많았다. 내가 승합차를 갖고 있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녀석이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컴퓨터는 지난 여름방학 동안 수원에 있는 삼성전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구입한 최신형이라고 했다.

짐을 다 싣고 생질을 태우고 돌아오는데 녀석이 내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전에는 왜 내게 이런 부탁을 하지 않았느냐고 하니, 그때는 컴퓨터도 없었고, 처음부터 짐이 많았던 건 아니기에 버스를 타고 태안에 가고 올 때마다 한가지씩 나르는 일이 어렵지 않았노라고 했다.

학교가 국립이라서 한 학기 등록금이 100만원 정도밖에 안 되는데, 자신은 두 번이나 50만원과 30만원의 장학금을 타서 등록금에 보탰노라고 했다. 그리고 이번의 기말시험도 잘 보아서 또 장학금을 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한다고 했다.


나는 복잡한 시내 운전을 하면서도 자주 생질에게로 눈이 갔다.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한지 흐뭇한 눈으로 녀석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생질의 학교는 2년제 대학인데 2006년부터는 충남대나 공주대와 합쳐지면서 4년제 대학이 된다고 했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 생질은 그 안에 자신이 졸업을 하게 돼서 무척 아쉽다고 했다. 자신이 '생활보호대상자'가 아니라면 군복무 면제를 받지 않게 되고, 그래서 군에 갔다가 제대할 때쯤이면 학교가 4년제로 변해 있어서 자연스럽게 복학을 할 수 있을 텐데…하며 군에 가는 친구들이 오히려 부럽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생질은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졸업 후에 일단 취업을 한 다음 학교가 4년제 대학이 되면 편입학을 할 생각이라고 했다. 취업을 하게 되면 그게 어렵지 않겠느냐고 하니, 그때 가서 심도 있게 생각해 볼 문제지만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을 거라는, 꽤나 어른스러운 말을 했다.

겨울방학을 맞은 공업대학 플랜트 설계과 1년 생인 생질을 태우고 태안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녀석과 관련하는 많은 생각들을 했다.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릴 때 녀석은 쿨쿨 단잠을 잤다. 잠을 자는 녀석을 돌아보니, 내 품에서 잠들던 어렸을 적의 귀여운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일순 울컥 끓어오르는 슬픔과 함께 내 눈앞에 뿌옇게 안개가 끼는 듯했다.

녀석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와 헤어졌다. 영영 헤어진 것은 아니지만, 기구한 사연의 질량만큼 너무 멀리 떨어져서 벌써 8년 세월이 지나도록 부모와 만나지 못하고 있다.

부모와 헤어져서 사는 8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생질은 부모의 보살핌을 전혀 받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초등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차례로 졸업하고 이제는 대학생이 되었다. 자신의 장래 계획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면서 힘껏 열심히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갈 줄 아는 어연번듯한 청년이 되었다.

생질은 칠순이 넘은 당뇨병을 앓으시는 할아버지, 역시 건강이 좋지 않은 칠순을 바라보는 할머니와 함께 사는데, 중학생인 동생이 하나 있다. 할아버지는 이태 전까지 비디오 테이프 대여점을 운영했으나 타산이 맞지 않아 정리를 하고, 지금은 경제 능력이 전혀 없는 상태로 살고 있다.

부모의 주민등록이 말소되어서 생질은 고아 아닌 고아가 된 형국이라 다행히도 고등학생 때 '소년가장'으로 등록되어 정부로부터 생활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고교 3년 때는 학교의 선처로 논산에 있는 기술교육학교로 가서 이른바 '위탁교육'을 받았다. 녀석이 고등학생 시절부터 집을 떠나 먼 타지 기술학교의 기숙사에 가서 생활할 때는 어찌나 안쓰러웠는지….

무사히 기술학교를 졸업하고 공업 분야의 자격증들을 소지하게 된 생질은 천안에 있는 공업대학으로 진학을 했다. 어느새 대학생이 된 녀석을 볼 때마다 기특하고 대견스러운 마음이 컸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사는 가운데서도 전혀 기죽거나 상심하는 기색 없이 항시 명랑한 얼굴로 농담도 잘하며 붙임성 좋게 생활하는 녀석이 고맙기 그지없다.

얼굴도 잘생긴 데다가 성격도 좋으니 생질에게는 여자 친구도 많은 것 같다. 주말에 집에 올 때는 꼭꼭 성당에 가서 미사 참례를 하고 청년회 봉사 활동을 한다. 그런 녀석을 볼 때마다 외할머니는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안쓰러운 마음과 기특한 마음이 겹쳐서 용돈을 주지 않고는 못 배기신다.

내 아내도 생질 아이들에게 여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집에 오게 해서 맛있는 음식을 해 먹이기를 좋아한다. 아내가 어찌나 잘해 주는지 생질아이들이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은 큰외숙모"라고 했을 정도다.

하지만 생질들, 특히 대학생 생질이 좋아하는 사람은 많다. 외할머니, 외삼촌들과 외숙모들, 안양의 큰 이모와 이종사촌 누이들 모두 한결같이 그에게는 좋은 사람들이다. 또한 그들은 모두 그의 든든한 후원자들이다.

도와주고 격려해주고 아껴주는 울타리 안에서도 생질은 자립심이 강하다. 자립심을 최대한 발휘한다. 지난 여름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에다가 울타리의 도움을 보태 고가의 컴퓨터를 장만한 생질은 내년 1학기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번 겨울방학에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고 한다.

월 120만원을 받는 수원 삼성전자와 90만원을 받는 태안화력본부 아르바이트 자리를 놓고 저울질을 하다가 집에서 다닐 수 있고 또 주일에는 성당의 청년회 봉사도 할 수 있는 태안화력본부 자리를 선택했다고 한다.

엊그제 저녁 우리 가족과 함께 외식을 할 때 나는 생질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너는 성격이 좋아서 외삼촌은 아무 걱정이 없다. 그런데 네 동생은 성격이 워낙 내성적이어서 걱정이 크다. 걔는 어떻게 해야 좋다니?"

그러자 대학생 생질은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걔도 앞으로 크면서 성질이 달라질 거예요. 그리고 제가 있잖아요."

"그려. 네가 형 노릇도 아주 잘하게 생겨서 정말 마음이 놓인다."
그리고 나는 기분 좋게 다시 술잔을 들었다. 내 건강 문제를 생각하면서도 철이 다 든 듯한 대학생 생질과 대작을 하는 기분이 참으로 흐뭇했다.

저 먼 하늘 밑에서 자식들 키우는 재미 하나 맛보지 못하면서 고달프게 살아가는 막내 누이 부부의 딱한 처지에 가슴 저려 하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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