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사 논쟁, 감정적으로 풀어선 안돼"

조선족 중국학자, "중국내에서도 다양한 학설 존재"

등록 2003.12.17 22:27수정 2003.12.19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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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고구려사를 둘러싼 논쟁으로 인해 한국과 중국 학계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중국이 내년 소주(蘇州)에서 열리는 세계문화유산 위원회(UNESCO)에서 북한의 평양과 중국 집안(集安) 일대의 고구려분을 중국 유산으로 신청할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고구려사 논쟁'은 중국과 한국 사이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이는 자칫 한중 양국간 민족감정으로 번져 외교 마찰의 소지가 될 수도 있는 문제이기에 한국의 언론 매체들도 앞다투어 고구려사 문제에 대한 보도를 하고 있으며 일반 시민들의 고구려사에 대한 관심도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이에 대한 한국의 분위기는 상당히 격앙되어 있다. 대부분 "중국이 한국사를 강탈하려 한다"는 전제하에 고구려사 문제를 대하고 있다.

물론 고구려사 문제가 우리 민족의 자존심과 직결될 수 있는 문제이기에, 상당히 민감한 사안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감정에만 치우쳐 고구려사 문제를 다룬다면 보다 근본적이고 현실적인 방안보단 일회성의 처방만을 내놓기 쉽다.

현재 언론매체 등을 통해 한국학자들의 입장은 충실하게 대변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과 다른 입장을 표명하거나 중립적 시각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고 있는 학자들의 관점은 거의 소개되지 않고 있다.

이에 상해 복단대에서 '한국학 개론'을 강의하고 있는 박창근 교수를 인터뷰하였다. 박 교수는 국적상 중국인이지만 조선족이다. 또한 '중국'에서 '한국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중국 국적이라는 현실적 조건과 조선족이라는 감정적 조건이 미묘하게 교차하고 있는 '경계인'인 셈이다.

박 교수는 고구려 역사 논란의 '최전선'인 연변보다는 상대적으로 '후방'이라 할 수 있는 상해에서 고구려사 문제를 관망하고 있다.


17일 이루어진 전화 인터뷰에서 박 교수는 "한국인들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고구려사 문제를 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이다.


- 최근 중국측이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동안 중국 내에서는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있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많은 연구진들이 고구려사를 연구하고 있고, 따라서 중국 내에서도 고구려사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중국학자들 중, 고구려사가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가장 큰 논거는 조봉·책봉 관계입니다. 고구려와 중국간에 조·책봉 관계가 있었기에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 정부로 보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논거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신라, 백제와 같은 경우, 고구려와 똑같이 조·책봉 관계가 있었지만 중국사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사가 중국사에 포함되는가 여부는 결국 당시의 조·책봉 관계가 어떻게 해석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데는 현재 중국 정치 상황의 변화 또한 무시 못할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사실입니다."

- 2004년에 소주에서 열리게 될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중국 측이 중국영토 집안(集安)의 고구려 고분은 물론 평양의 고구려 고분까지 중국 유적으로 등록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이에 대해선 어떻게 보시는지요?
"사실 중국이 자국 영토의 유물을 유네스코에 등록하려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역사적 관점으로 봤을 땐 고구려사가 어디에 속하느냐에 따라 민감하게 갈릴 수 있는 문제이겠습니다만, 현실적인 영토 개념으로 봤을 때는 분명 중국 영토에 속한 유물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평양 등에 있는 유물까지 중국의 유물로 등록하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볼 수 있겠죠. 이는 현실적인 조건 하(현재의 영토개념)에서 생각해야지 감정적으로 무리하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 이 문제에 관해 한국 학자들과 의견을 나누어 보신 적은 있습니까?
"아니오. 아직 없습니다. 하지만 저도 인터넷을 통해서 한국내의 반응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내의 반응을 보면 너무 감정적으로 치우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실 앞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중국 내에서도 고구려사에 대한 논의는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모든 중국학자들이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주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 내에서는 마치 모든 중국학자들이 '고구려사를 빼앗아 가려 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는 미숙한 반응이라고 봅니다.

역사를 사실 그 자체로 보아야지, 지나치게 감정적인 측면으로 몰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제가 최근에 서강대학교 김한규 교수님의 '한중관계사'란 책을 중국어로 번역하였는데요, 김 교수님의 관점에 따르면 요동지방은 '역사 공동체'적 성격을 띤 지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 요동지방이 현재의 한반도와 미분리 상태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점차 한반도에서 떨어져 나와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 또한 분명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현실이지요.

따라서 요동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고구려사의 문제에 있어서도 일방적으로 한쪽의 역사라고 판단하기보다는 '역사 공동체'적인 성격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 북한 학자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아직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분명 한국의 학자들보다 더욱 강력하게 항의할 것으로 보입니다. 과거 고구려 영토였던 지역을 국토로 하고 있는 나라인데다가 북한의 학풍 자체가 민족주의 사학이기 때문에 아마도 그 반응이 더욱 강경할 것입니다."

- 학생들에게 한국 고대사를 어떻게 가르치시나요?
"최대한 모든 견해를 동시에 소개해주려 하고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한쪽의 견해만을 가르치는 건 바람직하지 않겠죠. 한국과 중국, 양쪽의 의견을 고루 가르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 앞으로 고구려사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십니까?
"정치적인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역사는 사실 그 자체로 평가받아야지 정치적 이유로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또한 지나친 민족감정으로 판단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현실과 역사를 적당히 거리를 두고 판단할 줄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사 논쟁에 있어 한국은 중국에 비해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박 교수가 언급한 대로 중국 내에는 고구려사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고구려 연구가 깊고 방대한 범위에 걸쳐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격앙된 분위기와는 달리 박 교수는 차분하고 담담한 태도로 인터뷰에 임하였다. 일방적으로 고구려사가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중국 내에도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고 있다는 보다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민족감정으로만 역사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박 교수의 지적은 우리의 역사관이 지나치게 피해의식에 젖어 있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오히려 지금 격앙된 분위기에서 한 발짝 물러나 객관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고 중국학자들과의 교류를 활성화해 한국과 북한, 중국이 서로에 대한 의견 차이를 좁히고 상대방을 정확히 알아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 보다 절실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사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오로지 중국과의 ‘승부’ 국면으로만 몰고 가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 차분하고도 이성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판단해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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