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농사짓는 그는 어떤 시를 썼을까

농림부, 정규화 시인 등 아름다운 농촌시 5편 선정 발표

등록 2003.12.23 10:37수정 2003.12.23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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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중략)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 신경림, <농무> 중에서



농민 문학이 각광받던 시대가 있었다. 지방색이 짙은 농촌과 농민의 삶을 그린 문학 장르를 우리는 농민 문학이라 일컫는다. 농민은 곧 우리네 고향을 떠올리는 상징어였다. 농촌을 노래하는 것은 곧 한국인의 정서를 노래하는 것으로 인식돼 왔다.

농민 스스로 농사 짓고 창작에도 참여하는 문인들이 많았다. 농민문학이 처음 제기된 것은 1930년대 초 안함광씨가 <조선일보>에 '농민문학 문제'라는 글을 쓰면서 비롯됐다. 그이는 조선의 프로문학은 농민 문학을 거치지 않고는 수립될 수 없다고 주장했던 것. 이후 백철 시인은 평론을 통해 가난한 농업과 농촌 현실을 문학의 주제로 삼고, 가난한 농촌을 개발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산업화에 밀려난 농촌과 농촌문학 다시 세우기

1930년대 대표적 농민문학으로는 이광수의 <흙>, 이기영 <고향>, 김유정 <동백꽃>, 심훈 <상록수>, 김동리의 <산화(山火)>, 박영준의 <모범경작생>, <목화씨 뿌릴 때> 등을 꼽을 수 있다. 1970년대 들어서는 30대 평론가를 중심으로 사실주의·반사실주의 논쟁 속에서 농민문학론, 농촌문학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농촌을 모르고서 한국의 사회 현실을 안다고 말할 수 없고, 농촌 현실을 모르고서 농촌 문학을 거론할 수 없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일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신동엽의 <금강>, 신경림의 <농무>가 각광받았고 유치진의 <소>, 이무영의 <아버지와 아들> 등이 희곡으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산업화의 거센 물살을 만나 이러한 농민 문학의 밑거름이었던 농촌의 삶과 전통 문화가 문학 작품 속에서 서서히 뒷걸음을 쳤고 문학 역시 그 힘을 잃어갔다.


농림부는 지난 19일 2003년 하반기 동안 각종 문예지에 발표된 시작품 가운데 농촌 소재를 중심으로 한 시 5편을 최종 선정해 지난 19일 김정호 농림부 차관 주재로 '아름다운 농촌시' 시상식을 가졌다. 농림부가 문학 작품을 선정해 발표하는 것은 농민 문학과 함께 한 우리 농촌의 정서적 가치를 되살려 내기 위해서다. 농촌 정서를 소재로 한 작품을 통해 국민들에게 농촌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개방화에 흔들리는 농업·농촌의 가치를 드높이자는 것이다.

정규화, 고재종, 배한봉 시인 등 아름다운 농촌시 선정


어려울수록 굵고 밝은 시를 통해 농촌의 희망을 이야기하자는 메시지도 담고 있는 이번 '아름다운 농촌시'에 선정된 작품은 정규화 시인의 <피사리>, 고재종 시인의 <사랑, 그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은봉 시인의 <저 석양!>, 정우영 시인의 <감자분(憤)>, 배한봉 시인의 <복숭아를 솎으며> 등이다.

농림부는 30개 문예지를 대상으로 1차로 30편의 농촌 소재 작품을 발굴한 후 지난 12일 이성부, 송수권, 강형철 시인이 최종 심의위원으로 참가한 가운데 농촌 체험이 배여 있는 5편의 좋은 시들을 최종 선정했다.

이번 심사에 참여한 이성부 시인은 "농촌 문학은 한때 우리 문학의 주요 분야로 각광받았으나 전통 농촌이 사라지면서 농촌 문학도 뒷걸음치기 시작했다"면서 "농림부가 분기별로 선정하는 이번 기획을 통해 농촌 문학이 다시 활성화되었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송수권 시인 역시 "문학 작품의 경향은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우리 문학의 바탕은 본디 가락과 서정에 있어 전통 농촌·농업 문화에 있다"면서 "우리 문학이 농촌 삶과 문화에 더 깊이 천착할 때"라고 강조했다.

가난과 병마와 싸우며 시 쓰는 정규화 시인

농림부는 앞으로 매 분기별 작품을 선정하고 선정된 작품은 신문, 농림부 홈페이지 및 산하기관의 사보 등 온라인, 오프라인 매체를 통해 널리 알리고 추후 단행본으로 출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 선정된 작품에 대해서는 일정액의 원고료를 대신하여 쌀을 지급하고, 작가가 지정하는 개인이나 사회복지 시설에 쌀 또는 농산물 상품권도 함께 지급해 '우리농업과 농촌사랑'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이끌어내고 쌀 소비 등 '우리 農사랑'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확장해 나가겠다는 계획이다.

이번 선정 시인 가운데 정규화 시인은 가난과 병마 속에서 농촌시를 고집하며 창작 활동을 해 온 대표적인 시인이다. 경남 하동 출신인 그이가 선보인 시는 <피사리>였다. 농업이 대접받지 못한 삶의 일부가 되면서 농사 지으며 늘 함께 하던 잡초 이름마저 우리는 잃어버릴 날이 올지 모른다는 안타까움을 웅변해주고 있는 시이다.

"벼 한 톨이라도 더 거두겠다는/지극한 마음이었고/벼농사의 기본이었다/하지만 벼가 돈이 되지 않는 요즈음에는/아무도 논에서 피사리를/하지 않는다/벼 반, 피 반으로 뒤섞여 있어도/귀찮게 땀 흘려가며/피를 뽑겠다고 나서질 않는다/이렇게 잊혀져가다 보면/우리들 기억 속에서 피사리라는 말조차/사라져버리는 게 아닐까/추수한 날이 닥쳐오기 전에는/벼와 피를 구별할 줄도 모르게 되지 않을까?" (<피사리> 중에서)

특히 정규화 시인은 부상으로 받은 쌀을 불우 이웃에게 모두 기증했다. 그리고 같이 수상한 나머지 후배 시인들은 받은 부상을 가난한 선배 시인에게 주겠다며 정규화 시인에게 기증하는 훈훈한 모습을 연출했다.

이장 출신 시인과 과수 농사 짓는 시인

전남 담양군 이장 출신인 고재종 시인 역시 전통적 농촌 현실을 체험하면서 시를 써오고 있다. 그리고 우포늪을 지키는 생명시인으로 알려진 배한봉 시인은 직접 농촌에서 복숭아 농사를 지으면서 체험담을 소재로 하여 <복숭아를 솎으며>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사실적 묘사와 농사를 통해 겸허하고 비우는 삶을 알았다는 다소 교훈적 화두를 던져주는 시이다.

"한 해 실농(失農) 하고서야 솎는 일이/버리는 일이 아니라 과정이란 걸 알았네/삶도, 사랑도 첫 마음 잘 솎아야/좋은 열매 얻는다는 걸 뒤늦게 알았네/나무는 제 살점 떼어내는 일이니 아파하겠지만/굵게 잘 자라라고/부모님 같은 손길로 열매를 솎는 오월 아침/세상살이 내 마음 솎는 일이/더 어렵다는 걸 알았네"(<복숭아를 솎으며> 중에서)

이밖에 이은봉 시인의 <저 석양!>은 어려운 농촌 현실을 전통 시골 정서로 대신 따뜻하게 보듬어 내는 아름다운 묘사와 서정적 가락이 돋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정우영 시인은 도시 생활을 하면서 <감자분>을 통해 잊혀진 농촌 정서를 되살려 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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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언론학박사, 한국기자협회 자정운동특별추진위원장, <샘이깊은물> 편집부장,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위원, 한국잡지학회장, 국립등대박물관 운영위원을 지냈다. (사)섬문화연구소장, 동국대 겸임교수. 저서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섬여행> <바다, 섬을 품다> <포구의 아침> <빈손으로 돌아와 웃다> <예비언론인을 위한 미디어글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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