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e-천사'의 중창으로 시작된 2004년

[현장취재기] 첫 생명의 탄생과 함께 맞은 새해 첫날

등록 2004.01.01 11:54수정 2004.01.04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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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004년 1월 1일 0시 정각 출생한 남자 아해

2004년 1월 1일 0시 정각 출생한 남자 아해 ⓒ 김규환


2004년을 소리나는 대로 부르면 '이천사'쯤 되겠다 싶은 생각이 한달째 떠나지 않았다. 그 만큼 지난 한 해는 나와 우리 모두에게 시련의 한 해였다. 가는 해를 굳이 그렇게 싫어한 까닭에 어서 'e-천사'가 오길 바란 것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시간 관념이지만 몇 시간만 넘기면 해가 바뀌니 그렇게 미워할 일이 아닌데도 나는 악귀를 쫓는 심정이었다.

구랍(舊臘) 마지막 날 몇 몇 사람과 의미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북한산에 올라 서울 전역을 굽어보며 새해를 반가이 맞이하려 했다. 그 시각 도시의 빛깔을 생생히 <오마이뉴스>에 현장 중계할 욕심을 부렸다.

그런데 웬걸? 그 지긋지긋한 2003년 끝까지 질긴 인연을 놓지 않으려는 듯 같이 가기로 한 한 명이 빠지자 한 명마저 가기 싫다고 한다. 굳이 혼자서 못 갈 바 아니지만 취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만용(蠻勇)을 부릴 만큼 칠흑 같은 어둠에 익숙하지 않아서다.

남들 다 가는 종로 보신각이나 남산에 올라 현장을 스케치하는 게 께름칙하다는 생각에 글이나 하나 쓰고 아내가 준비한 케이크를 가족과 함께 자르는 것에 만족하기로 하고 해강이 솔강이가 '허천병' 난 것처럼 크림빵을 먹는 걸 지켜보다 무엇보다도 희망은 아이의 탄생 순간이라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a 해강이 솔강이와 이렇게만 보낼 줄 알았습니다.

해강이 솔강이와 이렇게만 보낼 줄 알았습니다. ⓒ 김규환


글을 쓰다 말고,

"여보 삼성제일병원에 좀 다녀와야겠어요."
"이 늦은 시간에요?"
"뭐가 늦다고 그럽니까? 이제 겨우 10시 30분인 걸."
"그래도 마지막 날은 가족과 함께 보내야 되는 것 아닌가?"
"나 혼자 즐기러 가는 게 아니잖소. 금방 다녀올게요."

연말이다 보니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길을 돌아 동국대 정문 근처에 차를 세우고 무작정 병원으로 들어갔다. 우리나라 여성전문병원 중 2위 그룹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독보적으로 아이 출산을 많이 하는 이 병원에서 우리 해강이와 솔강이도 얻은 터라 익숙한 데가 있어 맘이 놓였다.

a 아이공장이라 불릴만 합니다. 살맛이 나지 않을 때 이곳에 한번 다녀오시는 것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아이공장이라 불릴만 합니다. 살맛이 나지 않을 때 이곳에 한번 다녀오시는 것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 김규환


가히 '아이공장'이라 부를 만하게 낳은 지 하루 이틀 지난 200여 명의 신생아가 간호사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세상 모르고 자는 아이, 우유를 빠는 아이, 뭔가 못 마땅한지 보채는 갓난아이들은 여아는 빨강, 남아는 파랑 딱지를 달고 어울려 있다.


'어떻게든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할 텐데…. 어떻게 눈에 띄게 할 수 있지.'

곰곰히 생각하다 유리만 있을 뿐 아이들과 간호사들의 움직임을 훤히 볼 수 있는 곳으로 다가가 디카를 들이밀어 몇 장을 찍어 나갔다. 막 태어난 아이들은 플래시 빛에 약하다는 걸 안 터라 형광 불빛만 의지한 채.


어슬렁어슬렁 10분여 작업을 하던 중 창가 쪽에서 우유 먹이는 간호사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다. 손짓으로 명함 대용으로 갖고 간 오마이뉴스 취재수첩을 들어 보이며 손짓을 해댔다. '취재 왔어요. 아이 사진 찍어서 가려고요.' 안에서는 들리지 않는지 입구로 오라는 신호를 한다.

옳거니! 쾌재를 불렀다. 간호사에게 대충 설명을 했는데 이런 상황에 익숙해선 지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홍보과에 연락을 해보겠다는 거다. 예상치 않은 결과였다. 애초에는 아이 사진만 몇 장 찍어 얼른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취재원은 내게 더 많은 걸 얻어 가라한다.

a 분만실 앞 표정, 애써 태연한 척 하는데...

분만실 앞 표정, 애써 태연한 척 하는데... ⓒ 김규환

얼마를 기다렸을까. 10여 분 후 홍보과 직원이 왔다. 급작스레 기획해 달려왔기 때문에 명함을 잊고 왔고 기획서마저 만들지 못했다고 했다. 직원은 여긴 간단히 스케치만 하고 2004년 첫 아이를 찍을 기회를 주겠다는 제의를 해 온다.

초상권 문제로 간단히 몇 장 찍고 분만실로 따라 내려갔다. 밤 11시 15분 잠시 짬을 내 <오마이뉴스>에 전화를 걸어 2004년 첫 아이 탄생을 취재하러 왔다고 했더니 꽤나 반긴다. 일감은 늘어도 <오마이뉴스>에도 이런 시도를 하는 사람이 있어 고맙다는 말까지 들었다.

30분 전 방송사 취재진들이 몰려왔고 나는 유일하게 신문사 대표로 참여하고 있었다. 10분 전 가운과 모자, 입마개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분만실 내부는 예상과는 달리 평온했다. 우리 두 아이 낳을 때 밖에서 축하주 마시다 탄생의 순간을 보지 못해 평생 못된 남편으로 살아가게 된 나는 야릇한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a 어...어,,, 나옵니다.

어...어,,, 나옵니다. ⓒ 김규환


떨림의 이유는 새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을 빠뜨리지 않고 지켜볼 수 있다는 기쁨이었다. 가슴이 떨려오고 손이 떨렸다. 시시각각 시간은 다가오고 5분, 4분이 채 남지 않았다. 산모에게 몇 가지 주의를 전하고 준비 완료.

3, 2, 1! 회음부 절개를 하고 밤 12시 정각, 2004년 1월 1일 0시 00분 건강한 여자아이가 밝은 세상의 빛을 보는 최초의 순간이다. 순식간에 바다에서 붕 떠오르는 태양처럼 쏘옥 빠져 나오고야 말았다.

"공주님이십니다."

새 생명의 탄생, 희망의 시작, 이천사의 등장.

a 탯줄을 자르면 인격체가 됩니다. 독립된  인간으로 잘 자라길...

탯줄을 자르면 인격체가 됩니다. 독립된 인간으로 잘 자라길... ⓒ 김규환


엄마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를 연발했다. 무에 그리 고맙다는 건지 안다. 인고의 세월을 몸과 마음에 담고 시련을 견뎌낸 엄마에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어디 세상에 고맙고 감사하지 않은 게 있으랴.

"응애~" "응애 응애 응애~" 핏덩어리 아이는 탯줄을 자르는 것으로 엄마와 새로운 만남을 약속했다. 몸을 닦고 손과 발 각각 다섯 개씩 달린 것을 확인하고 2.6kg 몸무게를 잰 뒤 잠시 숨을 돌린 아이는 엄마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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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순간에도 '천사'가 태어났음을 말하였다. 그래 너희는 정말 'e-천사'다. 엄마 말씀처럼 인덕 있고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이제 이 희망으로 다가온 천사가 이 겨레와 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동량(棟樑)이 되게 하는 건 어른들의 몫이다. 올 한 해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가꿔나가야겠다.

a 아해와 아빠

아해와 아빠 ⓒ 김규환


마음이 급해졌다. 부모의 간단한 신상을 적은 뒤 옆방에서 한날 한시에 태어난 남아를 카메라에 담고 뛰었다. 차에 올라 <오마이뉴스> 본사에 전화로 두 아이가 동시에 나왔다는 소식을 전하던 중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집에 도착에 보니 새벽 12시 40분. 글을 새로 써야 한다는 중압감에 더 바빠졌다. 웹 폴더에 저장하고 필요한 걸 고르라고 했더니 열리지 않는단다. 다시 몇 개 골라 보내고 글을 정리해 보내고 나니 새벽 2시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이렇게 의미 있는 하룻밤을 보냈다. 희망의 새해를 보듬어 안아야겠다. 어제 밤부터 새벽까지 생명의 존엄함 앞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맥주 한 병을 사와 잠을 청하려던 중 현장 취재기를 써달라는 당부에도 자꾸만 무거워지는 눈꺼풀은 어쩔 수 없었다. 자고 일어나 보니 밝은 빛이 창가로 들어왔다.

a 엄마 품에 안긴 아해. 엄마 말 잘 들어라 아가야. 그리고 건강하게 자라다오. 네가 무사히 나온 걸 엄마는 고맙다고 했단다.

엄마 품에 안긴 아해. 엄마 말 잘 들어라 아가야. 그리고 건강하게 자라다오. 네가 무사히 나온 걸 엄마는 고맙다고 했단다. ⓒ 김규환


a 건강한 아이 엄마 젖 많이 먹고 튼튼하게!

건강한 아이 엄마 젖 많이 먹고 튼튼하게! ⓒ 김규환


a 이렇게 찬란한 해가 떴습니다.

이렇게 찬란한 해가 떴습니다. ⓒ 김규환

덧붙이는 글 | 취재에 협조해 주신 <삼성제일병원> 관계자와 가족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밤늦은 시각까지 기사 손질하시느라 수고하신 오마이뉴스 기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건강하고 복된 한 해 되시길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취재에 협조해 주신 <삼성제일병원> 관계자와 가족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밤늦은 시각까지 기사 손질하시느라 수고하신 오마이뉴스 기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건강하고 복된 한 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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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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