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29

등록 2004.01.07 11:12수정 2004.01.07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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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뚱맞기는. 여태 그 달과 함께 걸어왔으면서….'
제후는 그런 속 대답을 하면서 고개를 쳐들었다. 호수였다. 정말로 옹근 달 하나가 호수에 잠겨 있었다. 마침내 샘물에 도착한 것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짐을 풀어야겠습니다."
제후가 먼저 낙타에서 내리며 말했다.
"마을은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에인이 그의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하루를 더 걸어야 합니다. 그러니 오늘은 여기서 쉬어야 합니다."
제후는 그래도 예의를 차려 대답했다. 어쨌든 여기서는 에인이 지휘 장군인 것이다. 노련한 장수도, 군사들도 그에게 절대 복종하고 있지 않은가. 대장이 한눈을 팔아도 한마디의 질문도 없이 그저 기다리기만 했다.

설령 그들을 지옥으로 이끌고 간다고 해도 그들은 그냥 따를 것이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믿음인가? 왕족이 죽으면 무덤까지 따라가 순장되듯이 그러한 절대적 순종인가? 제후는 잠깐 그것이 궁금했다.

그때 에인이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짐승들도 사람들도 다 지쳤소. 여기서 야영토록 합시다."
그제서야 모두들 말에서 내렸다. 은장수가 지시했다.
"일단 짐승부터 풀어주시오. 물을 마실 수 있도록."

군사들이 말들을 풀어주는 사이 마차 병이 마차에 실어왔던 마포자루를 열었다. 그것은 오늘 아침에 준비해온 밥자루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깔고 누웠던 탓에 형편없는 떡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라도 배고플 때는 흥감한 양식이다.

"자, 요기들 합시다. 먼저 손들 씻고 오십시오."
마차 병이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 분주히 손을 씻고 밥자루로 다가드는데 에인만은 그대로 선 채 호수를 바라보았다. 달빛에 드러난 그 호수는 꼭 초승달 모양이었고 그 가운데 하늘의 보름달이 박혀 있어 사람의 커다란 눈 같아보였다.

'여태 지옥을 건너온 것 같은데 여기에 이런 호수가 있었구나. 그래서 고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왕래할 수 있었던 것이지. 한데 아버님은 무사히 가셨을까. 이런 악천후는 만나지 않으셨을까. 보다도 지금쯤 모든 일을 다 끝내셨을까.'


그는 아버지가 떠나면서 남겨주었던 말을 되새겨보았다.
'대월씨국에는 소호 국에서 운영하는 큰 가게 거리가 있다. 인원이 적으면 먼저 그 거리로 찾아오고 만약 그럴 처지가 아니면 여숙사를 잡아라.'
'그곳은 여숙사도 많습니까?'
'아주 많다. 식사도 제공해주는데 다른 나라에서 운영하는 것들이라 좀 비쌀 것이다. 그러니 여숙사를 잡기 전에 먼저 소호 국 가게부터 찾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네가 도착할 때쯤 혹시 내가 그곳에 없다 해도 거기 사람이 잘 알선해줄 것이다.'

그는 한시바삐 아버지를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보았던 오룡거 이야기도 들려주고 싶었다. 그러자면 빨리 가야하고, 빨리 갈 수 있는 길은 조금도 지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문득 자신의 이탈이 깨달아졌다. 자기 때문에 군사들이 기다려야 했고 그래서 강풍을 만난 것이었다. 설령 거기서 지체하지 않았다고 해서 강풍을 완전히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 해도 어쨌든 자신은 유경험자인 제후의 당부를 무시한 것이었다.

그는 제후 옆으로 걸어갔다. 제후는 밥을 한주먹 가득 쥐고 그것을 먹는 중이었다. 에인이 조용히 말했다.
"낮에는 제가 한눈을 팔았습니다. 이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제후는 주춤하더니 맞춤한 대답을 했다.

"예, 장군님의 아버님도 우리를 무척 기다리실 것입니다."
"그러실 것입니다. 내일 날이 밝자마자 곧 출발하지요."
"예, 그러셔야 할 것입니다. 가만, 시장하실 텐데…."

그때 마침 책임 선인이 깨끗한 마포에 밥덩이를 덜어와 에인에게 내밀었다. 그는 태왕으로부터 금괴운반뿐만 에인의 1급비서까지 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항상 에인이 곁을 떠나지 말 것이며 식사와 잠자리 등 그 모든 것을 책임지고 또한 최상으로 모시라고 했다. 책임선인이 에인에게 말했다.

"장군님에게 밥그릇이 아닌 천에다 이렇게 밥을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에인이 그 밥덩이를 받아들며 대답했다.
"그릇은 나 때문에 잃은 것이 아니오, 어쨌든 고맙소."

에인은 그 밥덩이를 달게 베어 먹었다. 보리알 투성이에 그나마 뭉개져 있었으나 집에서 먹던 고운 쌀가루 떡보다 더 맛이 있었다. 그 역시 배가 고팠던 것이다. 그가 밥덩이를 다 뜯어먹고 빈 마포 천을 접고 있을 때 제후가 다가들며 말했다.

"이제 대월씨국까지는 6천 리가 남았습니다."
"아, 그래요?"
" 거기에서부터 '딛을 문' 까지는 또 5천여 리 길이지요.
"그럼 우리는 이제 고작 3등분을 왔군요."
"그렇습니다."
"앞으로의 길은 어떻습니까? 사막이 또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사막을 피해갈 수 있습니다."
"마을을 통과합니까?"
"예, 내일 낮엔 서역의 동편 마을에 당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부터는 마을과 마을을 지날 수 있고 그 마을 끝 지점부터는 또 험준한 산길과 고원지대가 이어집니다."

"내 교화 스승께서는 사주를 지나면서부터는 두 갈래 길이 있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어느 길로 가실 것인지요?"
"천산 남로로 가야 합니다. 아무래도 북로보다는 날씨가 조금은 더 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마을과 더 가깝습니까?"
"마을을 만나는 데는 남로나 북로의 거리가 비슷합니다."
"어느 길로 가든 같은 마을을 만납니까?"
"아닙니다. 남로로 가면 우린 서역 남쪽 마을을 통과하게 됩니다."
"상세히 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왜 남북으로 갈려 있는지 말입니다."

제후는 에인이 역시 영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금 초행길을 나선 것이다. 어디에 가든 우선 지리부터 알아야 하고, 특히 근동에 도착하면 더욱 그러할 테니 지금부터 배우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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