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31

등록 2004.01.12 09:04수정 2004.01.12 09:07
0
원고료로 응원
8


곤륜산 서쪽 기슭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높고 험준한 천산 기슭보다는 여기가 좀더 완만하다고 했지만 그래도 마차가 지나가기에는 협소한 골짜기들이 많았다. 책임선인은 수시로 마차를 돌아보며 바퀴 상태를 확인했다. 그런대로 잘 굴러가고 있었다. 지난 번 마을에서 모든 마차를 수리하거나 손을 본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마을에서는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이틀을 쉬었다. 강풍에 마차들이 상한데다 말들까지 지친 때문이었다. 마차는 하루 만에 다 고쳐졌지만 말들의 식성이 활발하지 않아 그렇게 하루를 더 머문 것이었다.

그 이틀간은 사람과 짐승, 그 모두에게 황금 같은 휴식이었다. 마을 족장 또한 제후와도 잘 아는 사이여서 숙식은 물론 모든 일처리를 성심껏 도와주었다. 하지만 마을의 풍속은 소호국과 완전히 달랐다. 부녀자들은 알록달록한 통 자루 옷을 입었고 남자들은 모두 긴 수염에 긴 머리를 틀어 올린 뒤 터번을 쓰고 있었다.

때문에 젊은 군사 한 명이 양을 몰고 가는 여성의 색다른 모습에 정신이 팔려 자기도 모르게 뒤따라가다가 그것이 작은 소동이 되긴 했지만 손님의 중재로 간단히 무마되었다.

떠날 때는 그곳에서 곡물과 양유와 양유떡(치즈)까지 실었고 그 모든 대가 지불은 여우 털과 무두질이 잘된 원숭이 가죽 등, 모피 15장으로 해결했다.

갑자기 마차 한대가 멈추어 섰다. 오르막 협곡이었다. 말 두 마리가 앞으로 오르려고 애를 썼지만 마차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게를 덜려고 마차 병이 내려주어도 마찬가지였다. 은장수가 뒤돌아오며 군사들에게 지시했다.

"모두 내려서 창들을 덜어내라!"
그 마차엔 창이 유독 많이 실려 있었다. 군사들이 말에서 내려 창을 나누어 들자 비로소 마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지에 닿으면 마차에 도로 실어라."


그러니까 덜어낸 창은 군사들 자신의 몸으로 운반하라는 뜻이었다. 군사들은 모두 창 묶음을 어깨에 을러메고 골짜기를 오르기 시작했다. 날씬한 세모꼴의 창이라 쇠붙이 용량이 크지 않았음에도 그것은 아주 무거웠다. 그럼에도 군사들은 불평 한마디 없이 꾸역꾸역 협곡을 올랐다.

"이제 내려놓아도 좋다."
은장수가 명령했다. 평지가 아닌 다시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마루터기에서였다. 군사들은 창을 마차에 되 실은 후 모두 자기 말에 올랐다. 말 등에 키를 세우자 능선 아래의 길이 훤하게 보였다. 그것은 길이 아닌 초원이었고, 그 초원은 오른 쪽 산모퉁이 저쪽으로 잇대어져 있었다. 내려가 봐야 초원을 완전히 다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자!"
에인이 말의 허리를 때리며 앞장을 섰다. 내리막길인데도 그의 말은 속력껏 달리는 것이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말은 곧 아래로 곤두박질 칠 것 같은데 자신의 몸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말은 숨 가쁘게 내려와 그 아래턱에 이르렀다. 그런가 했더니 별안간 우뚝 멈추어 섰다. 그 앞에 아득한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갑작스런 평원에 말도 놀라버린 모양이었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었구나!"
여태 산길을 타고 오던 에인에게도 그곳은 완전히 별천지였다. 게다가 짙푸른 초원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바닥은 전체가 검은 모래와 자갈인데, 푸르게 덮여 있는 그것은 단 한 종류의 식물, 바로 파였다.

길게 쭉쭉 뻗어 있는 파들은 지금 모두가 하얗고 둥근 모자 하나씩을 쓰고 있었다. 씨앗 주머니였다. 웬만한 추위는 다 이겨낸다는 파들은 저마다 그렇게 씨앗주머니를 머리에 이고 내년 봄을 기다리는 것이다.

설령 강추위가 찾아와 푸른 대궁들이 쓰러진다 해도 봄이 되면 어느새 그 바닥에는 어린 싹들이 머리를 내밀 터였다. 수 천년, 혹은 수 만년 동안 파들은 그 넓은 고원 전체를 자기 집터로 알고 그렇게 번식해온 것이다.

그곳이 바로 파가 많아 파령으로 불리기도 하는 파미르 고원이었다. 해발 5천 미터에 펼쳐진 세계라 세상의 지붕이라 일컬어지기도 한 그 광대한 고원에 고산식물도 아닌 파들이 그렇게 군락을 이룬 것이었다.

에인은 다시 교화스승의 말을 떠올렸다.
'환족은 마늘과 쑥보다도 파를 더 즐겨먹는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의 시원지에 파밭도 함께 있었던 때문이었다.'

민족의 시원지인 천산, 천산 곁의 파령, 파령 바로 아래에서 첫 둥지를 틀었다던 파내류 국…. 파내류 1후국, 제2후국…. 근거지를 옮기거나 이동을 할 때도 나라 이름과 파씨는 꼭 챙겨간다는 환족의 파내류 국…. 흑해 근처로까지 분가해간 어느 천자의 아우는 그 낯선 땅에서도 파내류 제2후국이라고 칭했다던가….

에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사방을 돌아보았다. 저 멀리서 천산과 곤륜산의 봉우리들이 이 고원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 높은 곳에서도 여태 파가 푸르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에인은 새삼 가슴이 뛰었다. 자신은 지금 민족시원지 근처에 도달한 것이었다.

그토록 가보고 싶던 천산, 환인천황이 하강하신 그 영산도 바로 저기에 있다. 돈황까지 5천여 리, 거기서 다시 5천여 리의 길, 조국에서 만여 리를 와서 마침내 종족의 시원지 앞에 선 것이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2. 2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3. 3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4. 4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5. 5 휴대폰 대신 유선전화 쓰는 딸,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휴대폰 대신 유선전화 쓰는 딸,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