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베르의 상상력 '나무' 키우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집 <나무>

등록 2004.01.07 13:39수정 2004.01.07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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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나무>
책 <나무>열린책들
<개미>와 <뇌>로 유명한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을 좋아하는 마니아가 우리나라에도 꽤 많은 편이다. 이들이 그의 소설에 매료되는 가장 큰 이유는 기발한 상상력을 토대로 하면서도 현실에 뿌리를 둔 독특한 소설 양식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장편 소설을 따라 가다 보면 거대하고 풍성한 상상력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소설집 <나무>는 그와 같은 풍성한 상상력의 줄기는 없지만, 독특하면서 톡톡 튀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시점으로 짤막한 이야기들을 전개한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면서 베르베르의 부동의 인기를 증명하였다고 한다. 책의 서문에 설명해 놓은 책 내용에 대한 안내는 전반적인 이야기들의 주제를 느끼게 한다.

"이 책에 담겨 있는 것은 열여덟 편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차라리 일련의 심각한 질문과 그에 대한 베르나르 나름의 대답이라 할 수 있다. 그 근저에 있는 질문이란 <인간은 파국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은 스스로를 묶어놓은 지식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을 것인가>, 요컨대 <인간은 스스로 진보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베르베르의 소설은 환상과 사색이 공유하는 공간으로서 존재한다. 상상의 세계를 펼쳐 나가면서도 그 안에서 철학적 사유를 유도하는 것이 그의 소설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이다. 그래서인지 가벼우면서도 가볍지 않은 소설이 그의 소설이다.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도 그의 그러한 특징들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기계문명의 발달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온갖 기계들의 '주제넘은' 모습을 보여 주는 작품 <내겐 너무 좋은 세상>은 미래 사회에 대한 충격적인 모습이다.

이 작품에서는 프로그램이 발달하면서 '점점 더 정감 있게, 점점 더 인간적으로!' 발전한 기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결국 인간을 뛰어넘은 기계들, 그들 속에 존재하던 인간마저도 결국 같은 기계였음을 보여주는 반전 또한 유쾌하다.


"나 역시 당신 심장과 똑같은 것을 내 가슴 속에 감추고 있어. 지구 상에 진정으로 살아 있는 유기체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야. 우리는 모두 기계야. 그럼에도 우리 자신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

그런 환상을 품도록 우리 뇌가 프로그래밍 되어 있기 때문이야. 땅콩 자동판매기와 당신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그건 당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 뿐이야. 꿈에서 깨어나야 해."



작가는 미래에 대한 상상력뿐만 아니라, 과거에 대한 추리와 상상을 통해 옛 프랑스의 모습을 재현한다. 작품 <바캉스>는 현대를 사는 프랑스인이 17세기로 바캉스를 떠나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 작품에서 그려내는 프랑스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하는 낭만적인 공간이 아니라, 파리 떼와 쓰레기로 들끓는 위생 불결한 상태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생각한다. "내가 떠나온 21세기가 단점만 있는 건 아니야"라고.

실험실에서 투명 피부를 만드는 약을 개발하고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사용한다는 내용의 <투명 피부>.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피부가 투명해진 자신의 모습을 통해 인간들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말하자면 나는 살가죽을 한두 꺼풀 벗기고 보면 우리 인간의 모습이 진정 어떠한지를 그들에게 일깨워 준 셈이다. 내 모습은 하나의 진실이지만, 아무도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자아를 거부하고, 거짓으로 포장된 모습만을 드러내는 데에 대한 풍자이다. 우리는 겉으로 꾸며진 자신만을 보여줄 뿐 위선과 거짓과 더러움으로 가득 찬 자신은 숨기고 싶어한다.

노인 배척 운동이 일어나 자신들이 설자리를 잃은 노인들이 결국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내용의 <황혼의 반란>은 현대 노인 문제를 풍자적으로 고발한다. 노인들의 수가 늘고 그들을 짐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이면에 숨겨진 모습이다.

외계인들의 입장에서 인간에 대한 생각을 늘어놓는 작품,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 또한 인간의 실존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외계인의 입장에서 보는 인간들이란 종잇조각을 화폐로 사용하고 모든 것을 날려 버리는 폭탄을 소지한 괴상한 동물들이다.

"그들은 저녁마다 파르스름한 빛을 내는 상자에 불을 켜고 꼼짝 않고 앉아서 그 상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몇 시간을 보낸다. 이 기이한 행동에 대해 현재 우리 연구자들이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인간은 불나방처럼 그 상자의 불빛에 홀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외계인들은 지구에 사는 이 인간들의 별난 관습에 대해 연구를 한다. 날씨가 매우 더운 계절에 물이나 숲으로 대거 이동하는 이상한 습성들. 그리고 바퀴가 달린 금속제 교통 수단에 갇혀 느릿느릿 나가며 털로 덮인 얼굴을 바깥으로 내미는 습성들.

마지막으로 그들이 생각하는 인간의 가장 이상한 관습은 바로 지하철 열차 하나에 천여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 갇히는 일을 매일 같이 반복하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지닌 이 관습에 대해 "산소도 부족하고 몸을 움직이기도 어려운 공간에서 그렇게 우글거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베르베르의 소설은 이처럼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한 온갖 풍자로 가득하다. 그 풍자와 고민들이 유쾌하고 재미있는 상상력을 통해 펼쳐지기에 그의 소설은 지루하지가 않다. 그게 바로 베르베르의 소설이 인기를 유지하는 비결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다음 카페 <지이의 독서일기>로 가시면 좀더 다양한 책 이야기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다음 카페 <지이의 독서일기>로 가시면 좀더 다양한 책 이야기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열린책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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