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은 탑이요, 절은 절이니….

[까탈이의 세계여행 - 미얀마 3] 바간

등록 2004.01.07 23:46수정 2004.01.08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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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 안에서 기념품을 파는 여자들이 조약돌로 공기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원 안에서 기념품을 파는 여자들이 조약돌로 공기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김남희
지난 밤에도 밤새 비가 내렸다. 양군에서 머문 사흘간 내내 비가 내린 셈이다. 빗소리가 잦아들 새벽 무렵에 깨어 뒤척였다. 7시 반 쯤 일어나 아침을 먹고 나니 출발 시간인 2시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다.

체크아웃을 하고 로비에 앉아 이창래의 ‘A Gesture Life'를 읽고 있는 지금, 창 밖으로는 여전히 비가 내린다. 버스 터미널로 가보니 라오스의 버스들이 전부 현대 중고차를 수입한 것인데 반해 이곳의 버스는 전부 일본 중고차다.


에어컨이 나오고, 뒤로 기댈 수 있는 버스라고 해서 내심 기대했더니상황은 영 딴판이다. 의자는 뒤로 젖혀져 있는데 앞으로도 뒤로도 더 이상은 움직일 수 없고, 통로까지 보조의자를 부착해 놓았다니…. 에어컨도 '헉헉'거리며 간신히 돌고 있다. 이 차로 18시간을 갈 것을 생각하니 출발 전부터 한숨이 앞선다.

양군에서 바간 가는 길 양편으로는 초원처럼 드넓은 논이 끝없이 이어진다. 사방을 둘러봐도 거칠 것 없이 탁 트인 벌판이다. 그 가없는 지평선 위로 해가 진다. 온 대지를 붉게 적시며 떨어지는 마지막 햇살은 아름답고 장엄하다.

버스 안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저녁 노을을 볼 줄이야…. 4시간을 쉬지 않고 달리던 버스가 마침내 식당 앞에 선다. 예상대로 비싸다. 조금 전 샌드위치 먹은 것도 있고 해서 식당 앞 간이 매점에서 비빔 국수로 저녁을 대신한다.

가와다팔린 사원
가와다팔린 사원김남희
저녁 7시를 넘기니 비포장 도로가 시작된다. 흔들림이 너무도 엄청나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 밤 내내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내려앉기를 거듭하며 새벽을 맞는다. 주인 잘못 만나서 단단히 고생하는 내 몸만 불쌍할 뿐이다.

새벽 6시가 조금 못 돼 바간에 도착하니 버스 안의 외국인을 깨워 입장료를 징수한다. 입장권을 끊고 거의 폐인이 되어 버스에서 내린다.
하룻밤만에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을 이끌고 뉴 파크 호텔로 가니 3불이라던 싱글룸 가격이 죽어도 4불이란다.


다른 날 같으면 장기전의 태세로 돌입해 웃고, 어르고, 애교를 떨며 어떻게든 1불을 깎기 위해 전심을 다해 매진했을 테지만 오늘은 흥정할 기력도 없다. 결국 달라는 대로 다 주고 방을 얻어 그대로 뻗고 만다. 눈을 뜨니 10시. 늦은 아침을 먹고 자전거 한 대를 빌려 올드 바간으로 간다.

바간은 아시아 최고의 불교유적지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다. 9세기에 시작된 미얀마 고대왕국의 수도인 바간은 1057년 첫 미얀마 왕인 아뇨라타(Anaw raahta) 왕이 이웃 국가인 타톤을 정복하며 번영기에 접어든다.


이 시기는 미얀마의 종교가 힌두교와 대승불교를 지나 소승불교로 넘어가는 시기이다. 하지만 바간의 영광은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겨우 200년 후부터 쇠락하기 시작해 1287년에는 마침내 몽골의 쿠빌라이 칸에 정복당하기에 이른다.

히말라야에서 발원하여 미얀마의 최남단까지 이어지는 이라와디강 중부에 위치한 바간은 42평방킬로미터의 면적에 2300여 개의 탑과 사원이 보존된 ‘탑들의 고장’이자 칠기를 비롯한 수공예품의 집산지로 미얀마 최고의 관광지이다.

바간에는 논과 밭 사이에, 혹은 풀들이 자라는 벌판에 수천 개의 오래된 탑과 사원들이 흩어져 있다.
바간에는 논과 밭 사이에, 혹은 풀들이 자라는 벌판에 수천 개의 오래된 탑과 사원들이 흩어져 있다.김남희
대부분의 사원과 탑들이 위치한 올드 바간으로 가는 길은 제법 나이를 먹은 나무들이 그늘을 만드는 어여쁜 길이다. 자전거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푸른 초원에 붉거나 흰 탑들과 황금 지붕을 인 크고 작은 사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면적의 논과 밭들 사이에 펼쳐진 탑의 바다이다. 하지만 감동은 잠시, 하루 종일 자전거와 모질게 씨름하느라 심하게 정신적, 육체적 체력을 소모하고 만다.

두 번이나 모래에 빠져 넘어지는 바람에 무릎이 깨지고, 바지가 찢어졌다. 또 손바닥까지 까지고 멍들었다. 자전거만 빌렸다 하면 늘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 왜 자꾸 빌리는 걸까? 안장을 최대한 낮췄는데도 짧은 다리로 인해 타고 내릴 때마다 고생하고, 모래길에서는 끌고 다니느라 힘 쓰고…. 처참한 몰골로 자전거를 끌고 돌아오는 길 내내 내일은 꼭 우아하게 마차를 이용하리라 결심한다.

가와다팔린 사원 안 차가운 대리석 위에서 땀을 식히며 졸고 있는데, 누군가 “남희! 남희!”하고 부른다. 고개를 들어보니 에이미다! 라오스에서 태국으로 넘어온 후 잠시 같은 숙소에 머물다가 헤어졌는데 이곳에서 다시 만난 거다. 에이미 옆에는 멋지게 생긴 남자가 서 있다.셋이서 식당으로 가 저녁을 먹으며 그동안의 회포를 풀고 돌아왔다.

다음날은 숙소 옆 식당에서 매운 양념을 한 두부 요리로 아침을 맛있게 먹고 날렵하게 마차에 올랐다. 기분 좋게 흔들리는 마차에 앉아 이 길을 가자니 갑자기 농노에서 귀족으로 급격한 신분상승이라도 한 것 같다. 그런데 아무래도 좀 느리다 싶었더니 역시 뒤에서 하나둘씩 자전거들이 추월을 하기 시작한다.

자전거보다 더 느린 마차라니! 말이 늙고 힘이 빠지면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 마차 끄는 일이라더니 이 마차의 속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느리다. 하지만 급하게 갈 일도 없는데 오히려 더 잘 됐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의 풍경을 즐기기에는 느린 속도가 제격이니까.

사원에서 복권 파는 처녀 지옌넷이 손거울을 들고 타나카를 바르고 있다.
사원에서 복권 파는 처녀 지옌넷이 손거울을 들고 타나카를 바르고 있다.김남희
고타블리 사원에서 꽃과 복권을 팔던 아가씨들이 타나카를 발라보겠느냐고 물어본다. 타나카는 미얀마의 모든 아이들과 여성들이 얼굴에 바르는 천연화장품으로 피부를 차갑게 해주고, 모공을 수축시키고, 피지 제거 및 선크림의 역할까지 한다고 일러준다.

북부미얀마에서만 자라는 키 작은 나무 타나카의 줄기를 물과 섞어서 갈면 나오는 노란 즙이 바로 이들의 가장 중요한 화장품이다. 물과 섞어서 돌판에 간 나무 줄기의 즙은 놀랍도록 부드럽고 시원하게 얼굴에 스며든다.

다들 손뼉을 치고 환호성을 지르며 예쁘다고 난리인데, 막상 거울을 들여다보니 새카만 얼굴에 노란 분칠을 한 내 얼굴은 웃기기만 하다. 내 얼굴에 타나카를 발라준 아가씨가 손짓발짓으로 내게 말을 건다.

내가 타고 온 마차의 마부가 더듬거리는 영어로 통역을 해주는데 저녁 때 자기 집으로 놀러오라는 초대란다. 한 번도 이런 초대를 거절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당연히 가겠다고 대답을 하고 만날 곳과 시간을 정하고 헤어진다.

타나카를 바르고 다니니 사람들의 인사와 미소가 두 배는 더 커지고 깊어진다. 종일 사원의 벌판을 헤매다가 일몰을 보기 위해 쉐샨도 사원으로 간다. 어제는 밍글라제디에서, 오늘은 이곳에서 해 지는 모습을 본다. 빛은 섬세하고도 부드럽게 대지로 스며들어 첨탑들의 평원과 그 뒤로 흐르는 이라와디강을 빛내고 있었다.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숙소로 돌아오는 길. 한적한 길가에는 마차들의 말발굽 소리만이 '달그락 달그락' 거릴 뿐 사위는 고요하게 어둠 속으로 젖어든다. 한낮의 열기도 식어가고, 상쾌한 바람이 잎새 사이를 넘나들며 다가오는 이른 저녁.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행복한 시간이다.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 누가 남자이고 누가 여자일까?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 누가 남자이고 누가 여자일까?김남희
‘뉴 헤븐 게스트 하우스’ 앞에 내리니 약속대로 지옌넷이 기다리고 있다. 나를 보더니 환호성을 지르며 반가워 어쩔 줄을 모른다.
지옌넷에게 팔을 잡힌 채 집안으로 들어가니 말똥 냄새가 먼저 뜨겁게 나를 반긴다.

나무로 얼기설기 지어 올린 집과 그 안으로 얼핏 보이는 단촐한 살림살이는 한 눈에 보기에도 빈한하다. 지옌넷의 아버지는 올해 43세, 어머니는 42세다. 맏이인 지옌넷이 24살, 막내가 6개월이니 18살에 결혼한 지옌넷의 어머니는 무려 24년 간 8형제를 낳고 길러온 셈이다.

귀한 손님이라도 온 듯 온 식구가 모여들어 법석을 떨며 과자며 과일을 분주하게 내온다. 그 와중에 지옌넷은 일부러 챙겨두었던 듯 종이에 싼 타나카와 돌판을 선물이라며 건네준다. 이 집의 주요 수입은 아버지와 세 아들이 모는 마차이다.

사원 앞에서 복권을 파는 지옌넷이 받는 월급이 식비를 제하고 한 달에 3000쳇이니 하루에 4000∼5000쳇을 버는 마차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입이 좋은 일이다. 당연히 가난한 이들의 꿈은 관광객을 상대로 마차를 모는 것일 수밖에.

더 있다가는 없는 살림에 민폐만 끼칠 것 같아 지옌넷을 데리고 나와 사원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대접한다. 반찬을 내 밥 위에 얹어주고, 나를 위해 부채를 구해다 주고, 안 되는 영어로 자꾸 "행복하다"며 웃은 그녀가 참 예쁘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그녀의 아버지까지 함께 합세해 맥주 한 병을 놓고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밤. 식당 옆 사원은 달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다. 숙소까지 바래다 준 그녀와 인사하고 들어오니 어느새 10시가 다 됐다.

밍글라제디 사원에서 내려다보는 해질 무렵의 바간
밍글라제디 사원에서 내려다보는 해질 무렵의 바간김남희
다음 날 다시 마차를 빌려 타고 또 올드 바간으로 간다. 너무도 많은 사원과 불탑을 사전 지식도 별로 없이 사흘만에 보고 또 보고 하니 가끔은 헷갈리는 단계를 넘어서 마침내는 ‘탑은 탑이요 절은 절이니…’하는 득도(?)의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어제 들렀던 사원들을 다시 찾으면서 내부는 대충 둘러보고 발코니나 뒤뜰 같은 후미진 곳을 자꾸 기웃거리는 나를 본다. 돌이켜보니 주변적인 것이 내게는 언제나 핵심적이었던 것 같다.

사람을 만나고 판단할 때도 늘 나를 매혹시키거나 절망시키는 것은 그 사람의 사소한 습관과 태도 같은 것들이었고, 가장 아름답고 완벽하다는 건축물을 바라볼 때조차 그것이 품고 있는 작은 균열이나 부조화에 먼저 눈이 머물고는 했다.

일출이나 일몰보다는 해뜨기 전의 미명, 타는 듯 붉은 노을을 남기고 태양이 사라진 후의 잔영 이런 것들이 나를 사로잡고는 했다. 삶에서 내가 사랑하는 것도 어쩌면 무언가를 이루고 난 뒤의 허망함, 패배 후의 씁쓸한 교훈 이런 것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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