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너무 사랑스런 우리 아기

[김보일 칼럼 5]추둘란의 <콩깍지 사랑>

등록 2004.01.13 15:39수정 2004.01.13 17:31
0
원고료로 응원
a 콩깍지 사랑

콩깍지 사랑 ⓒ 소나무

소인은 특별한 것에 놀라고, 군자는 평범한 것에 놀란다고 하던가요. 자극적인 것이지 않으면 좀처럼 놀라지 않는 것이 우리네 무딘 심성인가 봅니다. 이렇게 둔해진 우리네 감성을 반영이라도 하듯 인터넷에는 자극성이 강한 엽기적인 것들로 넘칩니다.

광고는 또 어떻던가요? 그것이 아무리 감동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더라도 소비자의 주의를 끌고 욕망을 자극하지 못하는 광고는 결국 실패한 광고겠지요. 결국 광고는 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지원 아래 현란한 이미지들을 양산해 냅니다.


지하철에서, 핸드폰에서, 인터넷에서 상략(商略)이 작용하는 메시지들은 쉴 새 없이 무의식적인 선택을 강요하며 우리네 감성을 자극합니다. 이래서야 마음의 영일(寧日)이 있을 턱이 없지요.

한편의 시조차 자신의 존재성을 알리기 위해 화려한 이미지와 달콤한 센티멘탈리즘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안달입니다. 고통을 과장하는 공허한 수사(修辭), 절망을 채색하는 현란한 이미지들은 자신의 결핍을 보상받으려는 유아적인 욕망의 산물은 아닌가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고통의 나르시시즘이라고나 할까요. 자신의 고통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기주의 말입니다. 거기에 타인에 대한 배려 같은 것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고통이요, 보상받고자 하는 욕망일 뿐이니까요. 나르시시즘의 시들이 말하는 '그리움'이란 따지고 보면 성급히 보상받고자 하는 유아적 욕망의 다른 이름일 때가 많습니다.

조분조분 조용한 목소리로 고통을 말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해서는 아무도 그 고통의 존재에 주목하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콩깍지 사랑>(추둘란 지음/소나무)은 아주 조용하고 겸허하게 고통을 말하는 책입니다. 그 말하기의 방식은 아주 고즈넉해서 소음의 메시지들에 금방 묻혀버리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마저 자아냅니다.

<콩깍지 사랑>은 고통을 말하고 있지만 그 고통은 행복의 다른 표정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고통이 행복의 다른 표정일 수가 있느냐고 당신은 물을 수도 있겠지요. 사랑, 그것이 그런 역설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 책의 저자인 추둘란씨의 아이, '민서'는 21번 염색체가 하나 더 많은 다운증후군입니다. 소위 '장애자' 아이를 낳은 엄마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충분히 저자의 고통이 짐작이 가고 남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식을 보는 엄마의 눈이란 사랑으로 '콩깍지'가 씌운 눈이 아니던가요.

엄마, 추둘란씨는 사랑스런 '민서'를 봅니다. "낯선 사람 빤히 쳐다보기, 아는 사람 보고 웃거나 손 흔들기, 손 박수 발 박수 동시에 하기, 잽싸게 엄마 머리카락 잡아당기기, 드러누운 자세에서 머리를 중심으로 360도 돌기, 자기 전에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하기…" 등등. 사실 이런 행동들이야 조금도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으로 '콩깍지'가 씌운 엄마의 눈에는 평범해보일 리가 없습니다.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 말은 흔히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합니다. 객관성을 잃은 시선이 콩깍지가 씌운 눈이니까요. 냉정하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이 소위 과학의 정신, 근대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얼음의 심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욕망의 존재입니다. 그 욕망 때문에 우리는 대상을 왜곡하기도 합니다. 욕망이 있어 우리는 한 개의 사과를 더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따지고 보면 아름다움이란 콩깍지가 씌운 시선의 산물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대체 욕망 없이 대상을 바라본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요. 더구나 자식이라는 생명붙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냉정한 기계의 시선을 닮을 수 있을까요. 저는 민서를 바라보는 추둘란씨의 시선이 정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부정확함 때문에 도리어 그녀의 시선은 아름다운 것은 아닐까요. 그녀의 시선으로 본 민서는 장애자가 아니라 조금 '천천히 자라는 아이'일 따름입니다. 그 시선 속에서는 정상과 비정상, 장애와 비장애가 무의미해지는 것이지요. 그것은 의식의 퇴화가 아니라 성장으로 보여집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직장을 다니던 노처녀가 홍성 환경교육관에서 사무국장을 하고 있는 남편을 따라 농사를 지으며 이웃 사람들과 알콩달콩 사는 이야기는 분명 행복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의 입가에 슬몃 웃음이 번지지요.

이문구의 소설, <관촌수필>을 읽을 때처럼 충청도 사투리의 육질을 씹는 맛도 그만입니다. 우리에게 충청도 사투리의 구수한 미각을 선사할 수 있었던 것도 추둘란씨의 주위를 보는 따뜻한 시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배운 것 없는 무지렁이 촌로들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는 평범하지 않은 그녀의 시선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할머니들을 모아 가르치는 '밀알 한글학교'에서 들려오는 할머니들의 사투리는 얼마나 멋들어진 해학을 간직하고 있는지, 일요일 밤의 '개그콘서트'가 무색해질 판입니다. 왁자한 웃음이 아니라 배시시 입가에 번지는 웃음, 이 책은 콩깍지처럼 연한 그 미소의 색깔을 닮아 있습니다.

추둘란씨는 말합니다. "엄마는 아이의 몸이 자라도록 돕지만, 아이는 엄마의 영혼을 키우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요. 진정한 관계에서 일방적인 관계란 없는 것이겠죠. 일방적으로 주는 것만 같은 관계일지라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거기엔 반드시 주고받음이 있는 것일 테죠. 추둘란씨가 민서를 통해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면 아직 말을 못하는 민서지만, 민서는 이미 엄마에게 많은 말을 한 셈입니다.

이 책을 읽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는 조금 아픈 일입니다. 추둘란씨가 이래 살아라 저래 살아라 강요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책의 독서는 끊임없이 '내 삶은?'이라고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람의 숲에서, 일의 숲에서, 글자의 숲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길을 잃고 들여다보니 제 속엔 상처만 남아 있었습니다"라고 말할 때, 독자들은 헤매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자각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좋은 책은 이렇게 독자들의 의식에 이런 작은 균열을 내는 것이겠지요. 그 균열의 틈을 통해 세상이 내 속으로 흘러 들어오고 내 의식은 비로소 나르시시즘의 울타리를 벗어나 타인의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지요.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전우익의 <혼자만 잘 살만 무슨 재민겨>, 전시륜의 <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등은 논픽션입니다. 이 책들은 전혀 과장된 수사 없이도 독자들의 가슴을 파고들지요. 사실의 무게가 전해주는 진정성의 힘이랄까요. 이런 책 들 앞에서 시인이나 소설가들은 좀 더 겸손해져도 좋을 것 같습니다.

소설가 이윤기씨가 어떤 출판기념회에서 처음 보는 전우익씨 앞에서 큰절을 올려 깍듯한 예를 표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꼭 그렇게까지 할 것이야 없겠지만 어쨌든 문학인의 겸손은 흐뭇합니다. 소설가 김훈도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과격하게 표현한 바 있지만, 이런 표현에도 소위 문학적 나르시시즘에 대한 불만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콩깍지 사랑>은 위에서 열거한 훌륭한 논픽션의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실컷 눈물을 다 쏟아내고 난 그 즈음에, 이젠 괜찮다고 자신을 추스르게 된 바로 그 즈음에 제게는 작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한 번도 눈여겨본 적 없는 다른 사람의 눈물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눈물이 보이기 시작하자, 한 번도 아름답다고 생각해 보지 못한 것들의 아름다움과 소중함도 함께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들의 동그랗고 조용한 뒷모습을 볼 때나, 시골 아주머니들의 벗어둔 신발을 볼 때나, 장애아를 둔 엄마들이 미소짓는 것을 볼 때나, 씨앗을 털어낸 이질풀들의 꼬투리를 볼 때나, 어둔 곳에서도 붉은 싹을 내는 감자를 볼 때면 제 가슴은 아름다움이 사무쳐 저려 오는 듯했습니다."

사물의 가슴으로부터 슬픔을 길어올 수 있는 힘이라니, 이런 구절로 미루어 보면 추둘란씨는 분명 시인입니다. 시를 쓰는 시인이 아니라 시를 살아내는 시인 말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양수 검사를 받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그 순간이 제게는 축복의 순간이었습니다. 민서로 인해 저는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고, 예전에 좇던 삶의 가치가 얼마나 헛된 것들이었다는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저를 알던 사람이 요즘의 제 글을 읽거나 사는 모양을 보게 된다면, 놀라도 한참 놀랄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며 몹시 마음이 기우뚱거렸습니다. "나는 과연 무엇으로 인해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볼까?"하는 자괴심이 그것이지요. 불은 쇠를 시험하고 고통은 인간을 시험한다던가요? 그른 말이 아닙니다. 고통을 과장하는 한 고통을 벗어나는 것은 요원합니다.

덧붙이는 글 | 도서정보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의 칼럼니스트 김보일 님의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도서정보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의 칼럼니스트 김보일 님의 글입니다.

콩깍지 사랑 - 추둘란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수필집

추둘란 지음,
소나무, 2003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2. 2 "독도 조형물 철거한 윤석열 정부, 이유는 '이것' 때문" "독도 조형물 철거한 윤석열 정부, 이유는 '이것' 때문"
  3. 3 방치된 폐가였는데 이젠 50만명이 넘게 찾는다 방치된 폐가였는데 이젠 50만명이 넘게 찾는다
  4. 4 일본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어떤 관계일까 일본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어떤 관계일까
  5. 5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