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퍼뜩 가서 까치밥 좀 따온나"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33>까치밥

등록 2004.01.26 15:03수정 2004.01.26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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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까치밥

까치밥 ⓒ 이종찬


창원공단 조성으로 지금은 대부분 사라져 버리긴 했지만 내가 태어나 자란 동산마을 주변에는 꿩과 산토끼, 족제비, 여우, 노루 등이 참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동산마을 주변에는 비음산과 대암산이 하늘로 오르다가 마치 꼬리처럼 길게 늘어뜨려 놓은 야트막한 산들이 많아 새들과 산짐승들이 서식하기에 딱 좋았기 때문이었다.


겨울날, 쇠죽을 끓일 솔방울을 줍거나 삭정이를 모으기 위해 마당뫼나 앞산 가새에 나가면 가장 눈에 많이 띄는 게 꿩과 산토끼였다. 그리고 저만치 빈 들판에는 노루 몇 마리가 마치 허수아비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노루는 사람들이 곁에 다가가더라도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했다.

"쓸개 빠진 기 노루라카더마는 그 말이 참말인가베."
"그라이 사람들이 아무리 배가 고파도 노루괴기(노루고기)는 안 묵는다 아이가. 쓸개 빠진 넘이란 소리로 듣기 싫어가(싫어서)."
"그기 아이고, 노루로 잡아 묵으모 삼 년 동안 재수 옴 오른다(재수 나쁘다) 카더라. 백산댁 봐라. 까딱없다 캄시로(하면서) 노루괴기로 맛나게 묵더마는 작년에 버부리(벙어리)로 턱 낳았다 아이가."


당시 우리 마을 사람들은 노루를 쓸개 빠진 짐승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노루를 잡아 먹으면 삼 년 동안 재수가 나쁘다고 해서 아무도 노루를 잡지 않았다. 간혹 사슴처럼 등에 흰 얼룩이 여러 개 있고 뿔이 달린 노루가 내려와 다랑이밭에 심어둔 겨울 배추를 뜯어 먹어도 그저 "후여 후여" 손사레를 치면서 저만치 쫓아내기만 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들도 노루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우리들은 겨울 방학 내내 마당뫼와 앞산가새를 헤집고 다니며 장끼의 아름다운 깃털을 주으려 애썼다. 그렇게 헤집고 다니다가 간혹 얼룩 무늬가 나란히 새겨진 장끼의 깃털을 하나 주으면 털모자에 꽂고 마치 왕이라도 된 것처럼 마을을 돌아다니며 으시대기도 했다.

"니 퍼뜩 가서 까치밥 좀 따 온나."
"까치밥을 가꼬 뭐 할라꼬?"
"꽁(꿩) 잡구로(잡게)."
"그라모 수꽁도 잡히것네?"
"그걸 말이라꼬 하나? 그라고 수꽁이 잡히모 그 깃털을 몽땅 니한테 다 주꺼마. 그라이 퍼뜩 가서 까치밥이나 많이 따온나. 감나무에 매달린 그 까치밥 말고."


우리 마을에서 까치밥이란 이름을 가진 열매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감나무마다 한두 개 남겨둔 빨간 감홍시였고, 다른 하나는 찔레나무에 매달린 작은 열매들이었다. 하지만 그때 마을 형이 말했던 그 까치밥은 찔레나무 가지에 매달린 빨간 열매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당시 마을 형들은 우리들이 도랑가에서 따 온 빨간 까치밥이나 불린 메주콩에 바늘로 작은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그 구멍 속에 하얀 '싸이나'(청산가루의 일종) 가루를 집어 넣고 촛농으로 떼웠다. 그런 다음 까치밥은 마당뫼와 앞산가새 곳곳의 나뭇가지에 걸어두었고, 메주콩들은 꿩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에 조금씩 떨어뜨려 두었다.

a 꿩들이 까치밥을 잘 따먹었다

꿩들이 까치밥을 잘 따먹었다 ⓒ 이종찬


"이야! 이거는 까치밥을 줏어 먹은 지 며칠이 지났는지 내장이 아예 새까맣게 썩어 뿟다. 우짜꼬?"
"내장을 깨끗히 긁어내뿌라. 잘못하다가는 사람이 가는 수도 있은께네."



그랬다. 마을 형들은 까치밥과 메주콩을 줏어 먹고 여기 저기 죽어 있는 꿩들을 들고 와 우선 내장부터 모두 긁어냈다. 그리고 김이 입김처럼 풀풀 나는 뜨거운 물에 꿩을 담근 뒤 털을 모두 뽑았다. 그리고 꿩의 뱃속에 쌀을 가득 집어넣고 짚으로 묶은 뒤 가마솥에 푹 삶았다.

그때 나도 처음으로 꿩고기를 조금 먹어봤다. 꿩고기는 마치 식초를 집어 넣은 것처럼 뒷맛이 약간 쌉싸름했지만 닭고기 맛과 거의 같았다. 마을 형들은 꿩고기에 쌉싸름한 맛이 나는 것은 꿩이 개미를 많이 쪼아먹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 개미의 꽁지에 혀를 댔을 때 나던 그 맛, 그 맛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꿩고기보다 장끼의 깃털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틈만 나면 까치밥을 따다가 마을 형들에게 건네줬다. 아름다운 꽁지를 가진 장끼가 하루 빨리 잡힐 그날을 학수고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마을 형들은 장끼보다는 암꿩을 훨씬 더 좋아했다. 장끼는 고기도 너무 질기고 살이 많이 없다면서.

"요새는 꽁도 보통 영리한 기 아이라카이."
"와? 하나도 안 줏어묵었더나?"
"그기 아이라 분명 줏어 묵었기는 묵었는데, 꽁이 오데 갔는지 한 마리도 안 보인다카이. 희한한 일이제?"
"그으래? 그라모 아까 그 알라들(아이들) 짓인강?"
"그기 머슨 말이고?"
"아까 아침에 보이(보니까) 마을 알라들이 숫꽁 깃털로 한 무더기 들고 오데로(어디로) 신나게 가고 있던데?"


그랬다. 당시 우리들은 장끼의 멋진 깃털을 줍기 위해 틈만 나면 마당뫼와 앞산가새를 마구 헤집고 다녔다. 그러다 보면 수풀에 처박혀 죽어있는 꿩들을 제법 발견하기도 했다. 또한 그럴 때면 우리들은 으레 그 꿩들을 주워 마을 형들에게 갖다 줬다.

하지만 간혹 장끼를 발견할 때면 아무도 마을 형들에게 갖다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장끼의 모습이 너무나 멋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장끼의 꽁지털은 우리들 생각처럼 그리 쉬이 뽑히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들은 죽은 장끼를 마을 형들이 잘 모르는 풀숲에 꼭꼭 숨겨두기도 했다. 언젠가 장끼의 아름다운 꽁지털이 빠질 날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그래. 찔레나무에 을씨년스럽게 매달린 까치밥을 바라보면 그때 그 풀숲에 숨겨두었던 장끼의 아름다운 꽁지털이 떠오른다. 그리고 '싸이나'가 든 그 빨간 까치밥을 쪼아먹고 마당뫼와 앞산가새 곳곳에 풀섶처럼 널브러져 있었던 그 수많은 꿩들의 주검이 아프게 어른거린다.

꽁아 꽁아
마당뫼 잔솔밭에 뽈뽈 기는 꽁아
맛나게 흔들리는 까치밥에 속지 마소
그 까치밥 좋아라 따 먹다가
어제 그제 울 아배 울 어메 다 자빠졌소

꽁아 꽁아
앞산가새 다랑이밭에 뽈뽈 기는 꽁아
맛나게 흩뿌려진 메주콩에 속지 마소
그 메주콩 좋아라 쪼아 먹다가
어제 그제 울 낭군 울 동무 다 자빠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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