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겨울, 소수 민족촌에서 봄 꽃을 보다

중국 운남 여행기(1)

등록 2004.01.28 12:21수정 2004.01.28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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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에 비친 장족촌의 마을. 호수에 비친 마을이 장족촌인지, 땅 위의 마을이 장족촌인지...
호수에 비친 장족촌의 마을. 호수에 비친 마을이 장족촌인지, 땅 위의 마을이 장족촌인지...최성수
이른 아침 곤명역 광장에는 사람들이 왁자지껄합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몰려들어 기차표를 사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그저 낯선 얼굴로 바라봐야 하는 것이 여행자의 처지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밤 대리(大理)행 기차표를 구할 목적으로 나선 길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늘어선 줄에 한 다리 끼어 보는데, 한참 후에 그 줄은 학생표만 파는 곳이라는 말에 난감해 집니다.


그때 오십 줄은 넘어 보이는 뚱뚱하고 선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다가와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자기네 여행사에 표가 많이 있으니 조금만 웃돈을 얹어 주면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조금 망설였지만,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무표정하고 단호하기까지 한 얼굴들을 보고, 저 틈에 끝까지 버티면서 기차표를 살 자신이 없어 아주머니를 따라 나섭니다.

인파를 헤집고 아주머니가 우리 일행을 데리고 간 곳은 역 앞의 허름한 골목길에 손바닥만하게 자리 자리 잡은 이름만 그럴듯한 곤명과상(昆明科翔) 여행사.

그곳에서 대리행 오늘 밤 경와(硬臥) 열차표를 장당 5원의 웃돈을 주고 구입한 우리는 좀전의 아주머니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소수 민족촌행 버스를 탑니다. 24번 버스, 차비 1원인 그 버스는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가 엉덩이의 인내를 시험하는 차입니다.

중국 여행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중국은 아무래도 사람 개개인이 대접받는 곳은 아닌 듯 합니다. 방석 하나만 놓아도 될 것 같은 버스 의자는 흔들릴 때마다 살 없는 내 엉덩이를 사정없이 흔들어 댑니다.


버스는 좀체 큰 차가 드나들 수 없을 것 같은 좁은 길을 지나갑니다. 왼편으로는 전기 공사가 한창이라 큰 공사 차량이 길을 막고 있고, 오른 쪽에는 사탕수수를 잔뜩 실은 수레가 막고 있는 길을 버스는 용케도 빠져나갑니다.

길 가로는 개나리, 칸나, 능소화가 한창입니다. 곤명을 ‘늘 봄(常春)’의 도시(春城)라고 합니다. 길 가에 핀 꽃들을 보며 그 도시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는 사이, 버스는 시내를 빠져 나와 소수민족촌 앞에 우리를 내려놓습니다.


소수민족촌은 운남성에 소재하고 있는 소수민족들의 마을을 한 곳에 모아 놓은 곳입니다. 곤명시 남쪽 교외에 있는 이 민족촌에는 운남성 곳곳에 살고 있는 26개 소수민족의 생활과 문화를 약 1340평방미터 안에 담아 놓고 있습니다.

세세히 보려면 하루 종일을 돌아도 다 보기 힘들만큼 넓으니 우리는 그저 눈에 띄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 구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여행의 참 맛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타이족 마을 입구에 핀 부겐베리아. 한자어로는 광감각화(光三角花)라고 한다
타이족 마을 입구에 핀 부겐베리아. 한자어로는 광감각화(光三角花)라고 한다최성수
타이족 마을에서 오랫동안 스적스적 산책을 하다가, 장족 마을에 가서 베 짜는 아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모수족 마을에 가 배에서 막 내리는 안정환을 닮은 청년과 인사를 하고, 이족 마을 공연장에서 차 대접을 받으며 민속 공연을 보는 것, 하나도 바쁘지 않게 이웃 마실 구경하듯 돌아보는 소수민족촌은 아름답습니다.

정문에서 조금 가면 오른 편으로 호수가 하나 있습니다. 그 호수 건너편에 장족(티벳족) 마을이 있습니다. 장족 마을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호수에 비친 장족 마을의 건물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는 오랫동안 호숫가에서 물에 비친 장족 마을의 모습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호수 속의 마을이 마치 땅 위의 마을보다 더 진짜 같은 착각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사실 이곳 쿤밍에서 티벳까지는 히말라야 산만 넘으면 되지만 심리적으로는 얼마나 먼 거리인지 모릅니다.

한때는 <티벳에서의 7년>이라는 책을 읽으며, 꼭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몸의 병을 얻고 난 뒤에는 고산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 가기를 망설이고 있는 땅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맛보는 티벳족의 풍경은 내게는 현실이면서 꿈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의 생 전체가 현실이면서 꿈인지도 모릅니다.

장자의 ‘나비의 꿈(胡蝶之夢)’처럼 내가 나비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나비가 인간의 꿈을 꾸고 있는 지 알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존재의 현실인지도 모릅니다. 그 불확실성을 나는 호수 건너의 장족 마을을 보며 한동안 생각했습니다.

발걸음을 옮겨 찾아간 타이족 마을 입구에는 부겐베리아 꽃이 한창입니다. 정열이라는 꽃말을 가진 부겐베리아는 계절 탓인지 정열적이기보다는 다소 쓸쓸해 보입니다. 아니 그 꽃이 한 없이 나른하고 낮게 느껴지는 것은 여행자의 눈으로 봤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타이족 아가씨의 고운 춤 사위
타이족 아가씨의 고운 춤 사위최성수
여행자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여행이 삶인 사람은 여행자가 아니라 생활인입니다. 나같이 게으른 여행자는 늘 보이는 것들의 안이 아니라 밖에 서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보는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게으르고 낮아지는가 봅니다.

마을 한 켠에서 갑자기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듣는 음악보다 한 옥타브쯤 높은 데서 시작되는 그 음악은 이번 여행 내내 내가 듣게 된 고산족 음악입니다. 소리 나는 곳으로 가 보니, 타이족 집 2층에서 곧 공연을 할 모양으로 아가씨들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객은 우리 일행 넷이 전부입니다. 달랑 넷을 앞에 놓고도 타이족 아가씨들은 방실방실 웃는 얼굴로 공연을 시작합니다. 공연 중에 몇이 더 늘긴 했지만, 끝날 때까지 관객은 열이 채 안 되었어도 타이족 전통 무용은 아름다웠습니다.

열 아홉살, 장족 아가씨의 베짜는 모습. 스러진 아가씨의 꿈이 애닯다.
열 아홉살, 장족 아가씨의 베짜는 모습. 스러진 아가씨의 꿈이 애닯다.최성수
그 공연은 관객의 숫자가 아니라 보는 이들 하나하나의 눈과 마음에 초점을 맞춘 것이기에 더 아름다웠습니다. 남방의 아가씨일수록 미인이라더니, 타이족 아가씨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미인의 개념을 넘어서는 순수하고 순박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참을 타이족 마을에서 지체한 우리는 호수를 건너 장족 마을에 들어가 봅니다. 밖에서는 그림 같지만, 안에는 생활이 있는 곳입니다.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옷감을 짜고 있던 장족 아가씨는 우리 일행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털어 놓습니다.

19살이라는 장족 아가씨는 여행을 온 우리의 직업을 묻고, 유학중이라는 송희의 말에 부러움을 감추지 못합니다. 더 공부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며, 그저 이렇게 여기에서 옷감을 짜고 공연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자기의 운명이라고 말하는 아가씨의 손끝에서는 색깔도 고운 옷이 꽃처럼 피어나고 있습니다.

장족 마을을 나와 다른 마을로 찾아가는 길, 갑자기 우리 눈앞에 그림 같은 봄 풍경이 나타납니다. 길 양쪽으로 늘어선 벚나무들이 늘어서 있는데, 한 쪽은 꽃이 한창이고 다른 쪽은 꽃이 지고 잎이 돋고 있습니다. 그 꽃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한동안 길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겨울의 나라에서 온 여행객에게 봄꽃이 눈부시고 신기해서가 아니라, 같은 자리에서도 어느 쪽은 피고, 어느 쪽은 지고 있는 저 꽃들의 살아가는 이치가 신비로워서입니다.

늘 봄인 곳에서는 어떻게 꽃이 지고, 열매가 맺힐 수 있을까, 계절의 변화가 없는 곳에서는 과연 그 꽃들이 열매나 맺을 수 있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했습니다.

불임의 꽃은 아닐지라도, 한여름의 쨍쨍한 뙤약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열매들이 제 몸을 제대로 단련시켜 낼 수 있을까, 매운 겨울바람과 맞서지 못해본 나무들이 단단한 과실을 제 안에서 잉태해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길 양쪽으로 나누어 서있는 벚나무. 오른쪽은 꽃이 한창이고, 왼쪽은 꽃 지고 잎 피어난다.
길 양쪽으로 나누어 서있는 벚나무. 오른쪽은 꽃이 한창이고, 왼쪽은 꽃 지고 잎 피어난다.최성수
그래서 그런지, 쿤밍의 봄 꽃은 질 때도 허무해 보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잠시 피었다가 언제 그랬느냐 싶게 한 순간에 지고 마는 우리네 꽃들을 바라보면 생이 허무해집니다. 그러나 늘 피어있는 꽃들은, 그 속에서 지기도 하고 또 피기도 하는 일들을 순서 없이 이루어 낼 테니 쓸쓸할 틈도 없겠지요. 어느 순간 화려했다가 극적으로 소멸의 단계로 이어지는 그 덧없는 풍경이 ‘늘 봄’인 이 도시에서는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어쩌면 그런 생각조차도 덧없는 것인지 모릅니다. 아무리 ‘늘 봄’이라도 그 내면에는 여름인 때도, 가을과 겨울인 때도 있을지 모르니까요. 우리네 땅에서도 봄이면서 동시에 여름과 가을, 겨울의 순간들이 잠시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더구나 저는 사계절의 분명한 땅에서 찾아온 여행자, 그 여행자의 눈에 봄 꽃은 쓸쓸하고 덧없이 보입니다.

마흔 가까이 된 어느 해였습니다. 그해따라 유난히 봄 꽃이 쓸쓸해 보였습니다. 짧은 시간동안 세상의 전부라는 듯 피었다가 언제 그랬느냐며 순식간에 스러져 버리고 마는 봄 꽃의 덧없음보다는 곧 이어 돋아나는 여린 새 잎의 싱그러움과 풋풋함이 더 좋아졌습니다.

젊은 날에는 봄 꽃의 아름다움에 기울다가, 나이 들면 잎새의 싱그러움에 더 마음이 가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꽃 진 벚나무와 붉디붉은 꽃잎이 한창인 벚나무를 번갈아 바라보며 문득 당나라 시인의 시 한 편을 떠올렸습니다.

낙양성 동쪽에 핀 복숭아꽃 오얏꽃은
날아오고 가고 뉘 집에 떨어지나
낙양의 아가씨 얼굴빛도 서러워라
길 가다 꽃 지는 모습 보며 긴 한숨만 짓네
올 봄에 꽃이 지면 얼굴색이 바뀌는데
내년에 꽃 필 때 또 누가 이 자리에 있을까
소나무 잣나무는 꺾여 장작이 되고
뽕나무 밭이 변해 바다가 되는 게 세상 이치
옛 사람 다시는 낙양성 동쪽에 없고
새 사람이 꽃지는 바람을 맞고 있네
해마다 해마다 피는 꽃은 같건만
해마마 해마다 사람은 서로 다른 것을…

(洛陽城東桃李花 飛來飛去落誰家
洛陽女兒惜顔色 行逢落花長歎息
今年落花顔色改 明年花開復誰在
已見松栢摧爲薪 更聞桑田變成海
古人無復洛城東 今人還對落花風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


늘 봄인 곳에서도 꽃을 보며 쓸쓸해 하는 것은 역시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사물을 보는 탓입니다. 어쩌면 내 생애에 다시는 이 자리에 와서 이 꽃들을 또 바라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여행자의 여린 마음결이 시 속의 낙양성 아가씨의 마음에 닿아서인지도 모르지요.

전통 악기를 연주중인 소수민족 아가씨. 낙양의 아가씨 모습이 저랬을까?
전통 악기를 연주중인 소수민족 아가씨. 낙양의 아가씨 모습이 저랬을까?최성수
하니족 마을을 지나고, 이족 마을에서 달디 단 떡과 차를 한 잔 마시고 찾아간 곳은 풍우교(風雨橋)입니다. 소수 민족촌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풍우교의 난간에서 바라보는 호수의 모습을 들겠습니다.

특히, 저물녘의 풍우교에서 바라보는 호수와 산과 물살에 아롱대는 지는 햇살은 덧없이 잔잔합니다. 그래서 마음까지 가라앉게 합니다. 부는 바람조차 나직하고 싱그럽습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다리 위에 놓인 의자에 누워 바람이나 햇살이 되어버리고 싶습니다.

풍우교에서 바라본 호수 건너의 소수 민족촌의 하나.
풍우교에서 바라본 호수 건너의 소수 민족촌의 하나.최성수
그러나 해가 지자 금세 차가워지는 곤명의 1월은 우리를 더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바쁜 날개짓으로 제 둥지를 찾아 날아가는 새들처럼, 여행자도 저녁이면 쉴 곳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듯, 제법 찬 바람이 우리를 풍우교에서 밀어냅니다.

어둑해지는 민족촌을 나서 길을 건너고, 어느새 캄캄해 진 길을 역시 1원짜리 버스 (44번)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제 마음 속에는 소수 민족촌의 사람들과 풍경이 어느 새 별처럼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민족촌에서 본 부겐베리아와 소수민족 음악, 춤, 의상들은 운남 여행 내내 나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풍우교의 일몰. 선선한 바람과 어둑어둑한 풍경에 마음조차 가라앉는다.
풍우교의 일몰. 선선한 바람과 어둑어둑한 풍경에 마음조차 가라앉는다.최성수
호수 다리 위에 앉아 있는 갈매기. 곤명 시내에도 물이 있는 곳에는 이런 갈매기가 떼지어 난다.
호수 다리 위에 앉아 있는 갈매기. 곤명 시내에도 물이 있는 곳에는 이런 갈매기가 떼지어 난다.최성수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지난 1월에 약 보름 남짓 운남성의 곤명, 대리, 여강을 여행한 기록입니다. 몇 차례에 걸쳐 이어 쓸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지난 1월에 약 보름 남짓 운남성의 곤명, 대리, 여강을 여행한 기록입니다. 몇 차례에 걸쳐 이어 쓸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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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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