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패랭이꽃'

내게로 다가온 꽃들(20)

등록 2004.01.29 10:37수정 2004.01.29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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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

패랭이는 옛날 신분이 낮은 천민 계급의 사람들이 쓰던 모자의 일종입니다. 패랭이를 거꾸로 한 것과 비슷한 까닭에 패랭이꽃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석죽화(石竹花), 대란(大蘭), 산구맥(山瞿麥)이라고도 하는데 낮은 지대의 건조한 곳이나 바닷가의 모래밭, 우거진 풀섶 등 가리지 않고 잘 자랍니다. 패랭이꽃은 이른 봄부터 피기 시작해서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끊임없이 피어납니다. 천민이라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지만 끈질긴 삶을 살았던 이들, 그 사회의 근간이 되었던 이들이 쓰던 모자와 닮은 꽃은 외형만 닮은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내게로 다가온 패랭이꽃은 술패랭이와 갯패랭이였고, 간혹 원예종 패랭이들을 만났는데 그 모양새가 모두 소박하면서도 잔잔하니 서민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꽃인 듯합니다.


술패랭이
술패랭이김민수

억새풀밭에서 가느다란 줄기를 높이 올리고 화들짝 피어난 술패랭이를 만났습니다. 억새의 날카로운 이파리에 가느다란 줄기가 베이지는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억새가 우거져 있었습니다. 마치 꽃잎이 술처럼 갈라져 있어서 패랭이라는 이름에 '술'자를 얻었습니다.

맨 처음에는 '술'이 의미하는 바를 몰라서 바람에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대나무를 닮은 가느다란 줄기를 빗대어 약주에 취해 비틀거리는 어르신들을 보고 지은 이름인가 생각했었답니다.

김민수

그런데 가만히 보니 수술이 얼마나 질서정연한지 술에 취한 것이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사실 아름다운 꽃들은 외모에 신경을 쓰느라 에너지를 많이 소모해서 그런지 강인하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패랭이꽃은 예쁘기도 하지만 어느 곳에서든지 적응을 잘합니다. 그래서 패랭이꽃은 조금 게을러야 잘 키울 수 있는 꽃이라고 합니다. 잘 키우려고 매일 물을 주고, 거름을 주기보다는 그냥 내버려두어야 잘 피는 꽃이기 때문입니다.

김민수

패랭이꽃의 꽃말은 '순결한 사랑'입니다. 꽃말과 잘 어울리는 전설은 아닌 듯하지만 패랭이꽃과 관련된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그리스에 리크네스라는 젊은이가 살고 있었단다. 그런데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홀로 살길이 너무도 막연했단다. 그런데 그 때 당시 한창 번성하던 로마로 돈벌이를 하러 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도 그 곳으로 '로마 드림'을 품고 갔던 거야. 마치 우리 나라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미국으로 가던 것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고 우리 나라로 오는 것과 비슷한 일이지.

로마에는 개선 장병이나 영예로운 시민에게 월계수로 만든 관을 주었단다.이 면류관을 만드는 일은 주로 부녀자의 하는 일이었는데 리크네스는 이 면류관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게 되었던거야. 그가 만든 면류관은 훌륭해서 그 재주를 인정받게 되었고 주문이 쇄도하게 되었지. 그러자 그것을 업으로 삼고 살던 많은 이들이 그를 시기했고 니크트라라는 여자가 자기를 따라 다니는 하인를 시켜서 그를 죽여 버리고 말았단다.


로마 사람들이 그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며 신에게 기도하니 아폴로 신이 그 기도를 듣고 리크네스를 붉은 패랭이로 만들어 다시 태어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단다.


구름패랭이
구름패랭이김민수

그러고 보니 천민들이 쓰던 모자를 닮아 패랭이꽃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나 타국에 가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가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꽃의 전설을 보니 패랭이꽃은 아무래도 서민들의 꽃이요, 민중들의 꽃입니다. 그런 아픔을 간직한 꽃이니 척박한 땅에서 오히려 잘 자라는지도 모르겠군요.


우리 나라에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3D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그들의 꿈을 무참하게 짓밟는 업주들과 악법들로 인해서 많은 이들이 아파하고 있다고 합니다.

갯패랭이
갯패랭이김민수

이른 봄에 해안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반짝반짝 빛나는 예쁜 이파리를 만났습니다. 바위틈에도 많이 있기에 하나를 화단에 갖다 심었는데 어느새 쑥쑥 크더니 꽃을 피웠습니다. 꽃을 피우고 나니 그 식물의 비밀이 밝혀졌는데 바로 '갯패랭이'였습니다. 지금은 씨앗이 퍼져서 화단 여기저기에 심지어는 텃밭까지도 작은 싹을 냈으니 올 여름에는 갯패랭이가 여기저기 피어날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생명력, 척박한 땅도 마다하지 않고 피어나는 패랭이처럼 이 땅에서 천대받는 모든 사람들이 화들짝 피어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좋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민수

올해는 작지만 아름답고, 아름다우면서도 강인한 꽃에다 척박한 해안가에 자라나서 '갯'이라는 이름까지도 덤으로 얻은 갯패랭이를 만나면 수고했다고 두런두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어야겠습니다.

원예종패랭이
원예종패랭이김민수

이제 들판에서 피는 야생화가 아닌 원예종 패랭이들을 만나봅니다.
사람의 손을 타긴 했지만 그 본성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꽃 모양이 아름다우니 관상용으로 품종 개량이 되어 아주 다양한 모습들로 우리를 반깁니다.

정체 불명의 외국 이름을 가진 꽃들보다 우리 이름을 가진 이런 꽃들을 조경화로 심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패랭이꽃 외에도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이른 봄부터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심지어는 겨울에도 피어날 수 있는 우리 꽃들이 많은데 주로 조경화로 쓰여지는 꽃들을 보면 외국산 일색이라서 아쉽기도 합니다.

김민수

위에서 잠시 정체 불명의 외국 이름을 가진 꽃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그들 역시도 고향이 아닌 먼 이국 땅에서도 최선을 다해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는 것을 생각하면 미워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것이 아니라면 무조건 반대하는 것도 안될 일이겠지요.

지금이야 계급 구조의 사회는 아니니 천민이다 양반이다 하지 않지만 자본이라는 거대한 물신(物神)이 교묘하게 우리를 이간질시켜서 서민들의 삶을 고단하게 만듭니다. 사회 주변부에서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당하고 있는 이들, 그들이 행복하게 웃을 수 있을 때 이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패랭이꽃, 아름다우면서도 강인함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꽃이기에 참으로 서민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꽃으로 다가옵니다.

덧붙이는 글 | 이선희 선생은 초등학교 교사로 주중엔 꽃보다 아름다운 아이들과 생활하다가 주말은 돋보기 들고 들에 나아가 꽃 관찰하며 이야기 나누고 그러다 화폭에 담아 응접실에 걸어놓고 행복해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색연필로 들꽃을 그린 지 4년째입니다. 예쁜 카드(현재 3집까지 나왔음)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들꽃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카드를 팔아 불우한 어린이를 돕고 있습니다.

<내게로 다가온 꽃들>은 총 100회를 목표로 시작했으며, 이 기사를 통해 나오는 원고료와 관련 수익금은 전액 불우어린이들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기사까지의 기금] 380,000원

덧붙이는 글 이선희 선생은 초등학교 교사로 주중엔 꽃보다 아름다운 아이들과 생활하다가 주말은 돋보기 들고 들에 나아가 꽃 관찰하며 이야기 나누고 그러다 화폭에 담아 응접실에 걸어놓고 행복해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색연필로 들꽃을 그린 지 4년째입니다. 예쁜 카드(현재 3집까지 나왔음)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들꽃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카드를 팔아 불우한 어린이를 돕고 있습니다.

<내게로 다가온 꽃들>은 총 100회를 목표로 시작했으며, 이 기사를 통해 나오는 원고료와 관련 수익금은 전액 불우어린이들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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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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