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숫가로 이어진 문. 물살이 문에 매달려 출렁이는 것 같다.최성수
배추쌈에 삼겹살 숯불구이로 배를 채우는 호사도 누려가면서 함께 간 일행들, 대리 문씨 아저씨와 함께 모닥불 가에서 나누는 이야기들도 여행자들이 드물게 맛보는 즐거움입니다.
몇 달째 여행 중인 친구들에서부터, 며칠 전에 여행을 떠난 나 같은 사람들까지, 대리에 터 잡고 살게 된 문 사장의 내력(그는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다 대리의 아름다움에 반해 폐가인 집을 얻어 지금의 넘버3 게스트 하우스를 꾸몄다고 합니다. 그는 대리를 풍수지리상 ‘천하의 명당’이라고 합니다) 등 서로 나눌 수 있는 이야기들은 끝이 없는데,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자리를 피합니다.
말의 숲을 떠나 또 다시 말에 갇히기 싫기 때문입니다. 나처럼 말로 일을 해야 하는 직업의 사람은 때때로 말이 싫어질 때가 있는 법입니다. 내가 한 말이 도리어 나를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어쩌면 내 생의 전부가 말의 덫에 걸려 있었던 것 같은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떠난 여행길에서 또 말의 함정에 빠지고 싶지 않은 나는 어둠을 더듬어 호숫가로 나섭니다.
호수 건너로 몇 개의 불빛들이 반짝입니다. 아득해 보이는 호수 건너편의 마을 누구네 집에서는 이제 가족들이 머리를 맞대고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늦게 일터에서 돌아오는 아버지를 맞아 가족들이 불빛 아래 환한 웃음을 피워 올리고 있는지요? 그런 생각을 하며 바라보는 호수 건너의 불빛들은 그리움입니다. 그리고 얼하이의 물결은 불빛 건너편으로부터 끝없이 내 발치로 밀려듭니다.
새벽, 소변이 급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아니, 어쩌면 밤새 내 귓전을 간질이던 파도 소리에 잠이 깼다고 해 두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아직 동이 트려면 먼 시간이지만, 세상은 푸르스름한 빛으로 가득합니다. 나는 우선 화장실로 향합니다. 남도 풍정도의 이 중국 전통 가옥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어쩌면 화장실인지도 모릅니다.
중국 여행을 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화장실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앞문이 없는 화장실, 그래서 늘 닫힌 공간에서 생리적 문제를 해결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제대로 일을 해결하지 못한 경험들 말입니다.
벌써 꽤 오래 전의 일입니다. 천진, 북경, 서안을 거쳐 다시 북경서역에 도착한 때였습니다. 손님을 호객해 채우면 떠나는 버스를 기다리다, 북경 서역 근처 역무원 아파트의 공중 화장실에 갔을 때였습니다. 이미 그때는 중국식 화장실 문화에 익숙해 져서 으레 그러려니 하고 화장실에 들어섰는데, 나는 당황해서 잠시 망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화장실에는 옆 칸막이조차 없었습니다.
그저 구멍이 세 개 뚫린 대변기가 있고, 소변을 볼 수 있는 곳은 벽에 홈을 파놓은 것뿐이었습니다. 세 구멍 중 가운데에 앉아 대변을 보는 사람이 하나, 나는 그를 등 뒤에 두고 소변이 나오지 않아 한동안 애를 먹어야 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중국인은 내 뒤에서 끙끙 힘을 주고 있었습니다.
북경 공항에서는 칸막이가 되어 있는 문을 휙 열어젖히고 볼일을 보는 사람을 본 적도 있었습니다. 곤명역 화장실은 앞 문 없이 대변 칸이 죽 늘어서 있는데, 대변기 아래는 서로 통해 있어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물이 흘러내리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볼일을 보다 보면 앞 칸에서 오물이 둥둥 떠내려 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불편은 어쩌면 우리와 다른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라나 민족마다 서로 다른 문화를 지니고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지요. 우리는 닫힌 공간을 가진 화장실 문화였다면, 중국은 열린 공간의 화장실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특별히 문제 삼을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여튼 그런 중국 화장실을 생각하고 남조 풍정도 옛 집의 화장실에 들어가면 깜짝 놀라게 됩니다. 온통 나무로 이루어진 화장실 안은 아주 넓고 거울도 깔끔합니다. 그러나 그 넓은 공간 바닥에는 달랑 변기 하나만 놓여 있습니다. 아니 변기가 아니라 그저 나무 바닥에 사선으로 비스듬히 구멍을 뚫어놓았습니다.
물을 내리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완전 재래식 화장실도 아닙니다. 용변을 보는 사람은 화장실 앞에의 제법 널찍하게 고여 있는 연못에서 물을 한 두레박 퍼들고 들어가면 됩니다. 볼일이 끝나면 그 두레박의 물을 변기에 부어주면 그만입니다. 안에 사람이 있는 지 노크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화장실 앞에 두레박이 없으면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일 테니까요.
그 깔끔하고 예술적(?)이기까지 한 화장실에서 나와 나는 아무도 없는 호숫가로 가 봅니다. 파도 소리는 밀려왔다 밀려가고, 하늘에는 달이 밝은데, 하늘은 온통 깊이 모를 푸르름입니다. 그 푸르름은 어둠과 어울려 아득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달 옆에는 별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습니다.
달이 밝으면 별빛이 죽는 법인데, 남조풍정도에서는 달빛과 별빛이 서로 어울려 빛나고 있습니다. 그 아득하고 또 아득한 푸르름, 깊고 검은 푸르름 속에서 나는 목이 아프도록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내 마음까지 아득한 푸르름으로 나직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