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대문 봉제공장 '공순이'였다

추억속의 '수도고등공민학교'를 생각하며

등록 2004.02.10 16:41수정 2004.02.10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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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 나이 열다섯 살이었다. 아직 덜 익어 떫은 맛이 가시지 않아 풋사과 같은 연둣빛 나이. 아침에 일어나 버스 정거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행여 누가 나를 알아볼까봐 조바심치면서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붐비는 버스에 올라서서 한참을 가다보면 중고등학교가 있는 언저리쯤에서 교복을 입은 나와 같은 또래의 학생들이 우르르 내리곤 했다. 하얀 칼라, 찰랑거리는 단발머리, 끈 달린 파란색 운동화, 묵직하게 들고 다니는 책가방, 왼쪽 가슴에 붙어있는 빛나는 배지 등 학생신분을 드러내는 그들의 모든 것들이 나는 부러웠다. 그들이 버스에서 다 내리고 나면 같이 섞여 있을 때 몰랐던 또 다른 소외감이 두 어깨를 눌렀다. 내가 학생이 아니라는 것이 더욱 또렷하게 깨달아지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열다섯 살의 기억

나는 거의 날마다 학교에 다니는 꿈을 꾸었다. 한 교실에서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의 얼굴을 꿈속에서 만났다. 하지만 꿈속에서일 뿐이었다. 실제로 내가 날마다 가고 있는 곳은 남대문시장이 가까운 곳의 어느 봉제공장이었다. 공장에 다니는 '공순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중학교를 중퇴하고 다녔던 그 곳은 한달도 채 다니지 못했다.

낯선 일에 힘이 달리고 집에서 한 시간 정도 버스를 타다보니 멀미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오면 몸과 마음이 기진맥진해져서 다음날 다시 출근할 일이 아득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공장은 ‘70년대 노동자를 대표했던 전태일씨가 다녔던 공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 아주 열악한 곳이었다.

공장 안에 들어가면 먼지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았고, 점심시간과 오전 오후 화장실을 갔다 오는 십 분을 제외하면 하루 종일 귀가 멍하도록 미싱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어질 머리로 혼미해진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수도고등공민학교'라고 써 있는, 길게 세워진 간판이었다. 아침에 출근할 때나 저녁에 집으로 돌아올 때 차창으로 보이는 그 간판이 있는 곳은 용산구 갈월동과 동자동 중간쯤에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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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을 지나칠 때마나 나는 항상 궁금했다. 고등공민학교가 도대체 어떤 학교인지, 그리고 그곳은 누가 다니는 학교인지. 학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은 좁은 입구, 교실 비슷한 건 보이지도 않고 나무로 둘러쳐진 운동장은 더더욱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은 회색의 동네였다. 아침저녁으로 나는 그 '학교'라는 이름을 보면서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공부를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지의 싹을 키웠던 것 같다.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절실하게 찾았던 곳

뜻이 있으면 길도 있었다. 내가 벌어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다시 일을 찾았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영등포의 검정고시학원을 다녔다. 학교를 그만두면서 부모에 대한 원망이나 나만 당하는 것 같은 억울함으로 잠 못 이루었던 밤을 이제는 공부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몸은 피곤해도 즐거웠다. 의기소침했던 생활에 새로운 의욕이 용솟음 쳤다.

'수도고등공민학교'에 대해 궁금했던 점들은 학원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어쩌면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절실하게 찾았던 곳이 거기였다. 내가 학원에서 내 꿈을 향해 노력하듯이 그곳에서도 열심히 자기 미래를 위한 공부에 몰두하는 또 다른 내가 있는 곳이었다.

또래의 친구들보다 늦었지만 나는 검정고시를 합격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대학에 다니면서 나는 다시 '수도고등공민학교'의 변함없는 간판을 보게 되었다.

봉제공장을 오가며 열등감으로 내 모든 것이 부끄러움에 똘똘 뭉쳐있던 열다섯 살. 한 순간 버스창문으로 잠깐씩 보이는 '학교'의 간판에 홀로 마음이 설레고 그때마다 박하사탕이 내 몸 속으로 들어와 내 머리를 깨웠던 이름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어린시절의 나와 같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곳에 모여 공부한다는 사실에 그 시절을 먼저 극복한 입장에서 용기와 희망을 전해주고 싶었다.

마음뿐이었지만 내가 직접 그곳을 찾아가서 무슨 일을 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시절이 떠오르거나 간혹 느지막히 공부를 시작하는 어르신들의 기사를 읽게 되면 내겐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1950년대 문맹퇴치를 위해 국가가 장려해 만들었다는 수도고등공민학교. 이 학교가 이번 졸업식을 끝으로 문을 닫는다고 한다. 그 곳을 통해 공부했던 많은 분들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며, 그 분들이 행복한 삶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그 삶을 누리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흔 중반의 나이로 살면서 나는 지금도 학생이다. 학교공부를 한다는 생각에 앞서 인생살이 전체가 공부 아닌 것이 없다는 자세로 살려고 노력한다.

덧붙이는 글 | 디지털 '말'에도 송고합니다.

덧붙이는 글 디지털 '말'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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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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