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김 부친, 아들 육성 편지에도 의식 못찾아

후원회 병원 방문해 김상영 옹 쾌유 기원

등록 2004.02.10 19:18수정 2004.02.10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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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목소리에도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김상영 옹.
아들의 목소리에도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김상영 옹.김범태
꿈에라도 만났으면 하던 아들의 육성이 스피커를 타고 흘렀지만 노인은 말이 없었다. 의식마저 희미해진 입가는 이름이라도 불러보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역부족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여보, 얘기를 해 보세요. 눈을 떠봐요”라며 보채듯 흔들어 깨우는 부인의 손끝도 희미하게 떨린다. 힘없는 노인의 모습은 다만 그토록 불러보고 싶던 아들의 이름 ‘채곤’을 한스러이 가슴에 묻고, 영원히 눈을 감아야 할 날이 어느덧 생각보다 가까워지고 있음을 그렇게 감지하고 있는 듯 했다.

로버트 김 후원회는 병원을 찾아 김 옹의 쾌유를 기원했다.
로버트 김 후원회는 병원을 찾아 김 옹의 쾌유를 기원했다.김범태
지난 1996년 미국에서 스파이 혐의로 기소된 이후 9년째 복역 중인 로버트 김(64, 한국명 김채곤)의 국내 후원회(회장 이웅진) 회원들이 10일(화) 경기도 남양주시의 에덴요양병원(병원장 박종기)을 찾았다.

아들과의 재회를 학수고대하던 로버트 김의 부친 김상영(91) 옹이 생의 마지막 길을 힘겹게 걸으며 사경을 헤메고 있다는 <오마이뉴스>의 보도를 접한 이후 이들 노부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착잡한 마음으로 들어선 3평 남짓한 병실에는 부인 황태남(83) 여사가 간병인과 함께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김 옹을 간호하고 있었다. 후원회가 이들을 찾은 것은 지난해 8월 이후 처음이었다. 그간 김 노인은 몰라보게 수척해 있었다.

후원회는 이날 앨런우드 교도소에서 윈체스터 교도소로 이감되면서 로버트 김이 회원들과 나누었던 전화통화 내용이 담긴 CD를 김 옹의 귓가에 들려주었다. 이는 아들이 전한 가장 최근의 목소리였다.

후원회는 또 지난해 8월 방문 당시 그에게 들려주었던 육성 편지도 함께 준비했다. 당시 노인은 혼수상태에서도 아들이 보내온 이 목소리를 듣고 거짓말처럼 의식을 되찾는 끈질긴 부정(父情)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아들의 목소리라도 듣고 그때처럼 기력을 회복하길 간절히 바라는 이들의 실낱같은 기대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김 옹은 이날 만남이 끝날 때까지 의식을 찾지 못했다.

부인 황태남 여사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김 옹을 간호하고 있다.
부인 황태남 여사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김 옹을 간호하고 있다.김범태
후원회 이웅진(39, (주)선우 대표) 회장은 그런 김 옹의 두 손을 꼭 부여잡고 “잠시 지나면 꿈에 그리던 아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며 “힘을 내라”고 부탁했다. 이 회장은 “정부에서도 아들의 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여러 부처에서 실무자들이 신경을 쓰고 있는 만큼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며 노인이 기력을 되찾길 기원했다.


함께 찾은 담용 스님은 “그동안 잘 견뎌온 것처럼 용기를 잃지 말고 아들 상봉의 그날까지 굳건하게 몸과 마음을 지키라”며 쾌차를 빌었다. 한 가정 주부도 “로버트 김의 아버님이시니까 충분히 기다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며 힘을 내라고 손을 잡았다.

후원회 측은 이날 보다 많은 회원들이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평일인데다 김 옹의 건강상태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어서 소수회원들만 참석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부인 황태남 여사는 이들에게 “쉽지 않은 일을 위해 노력해 주셔서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며 “여러분께 너무 많은 빚을 졌다”고 고개를 숙였다.

현재 이들 부부를 치료하고 있는 박종기 병원장은 “회진할 때마다 의식이 없는 상태라서 안타깝지만 최선을 다해 진료하겠다”고 다짐했다.

약 20분간의 눈물 섞인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병실문을 나서는 회원들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해 줄 법도 하건만 야속한 노인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아들의 처절한 외침을 머리맡에 놓고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그 시간에도 사진 속의 부자는 어깨동무를 한 채 정겹게 웃고 있었다.

병상의 아버지께 보낸 로버트 김 육성 편지 전문
다시 만날 날 기약하며 지난해 8월 후원회로 보내 와

▲ 로버트 김(한국명 김채곤)의 모습
로버트 김은 지난해 8월 아버지 김상영 옹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후원회를 통해 부친의 쾌유를 비는 육성 편지를 보내왔다. 부모에 대한 가슴 아픈 사랑이 절절하게 담겨 있는 그의 편지를 옮겨본다.

아버지, 저 채곤입니다.

오랫동안 소식 못 전해드려서 죄송해요. 용서하세요. 아버지. 동생들을 통해서 아버지, 어머니의 근황을 듣고 있습니다. 지난달 아버지날에 카드를 보내 드렸는데, 받으신 줄 압니다. 그런데 두 분 모두 건강이 여의치 않으시다니 몹시 걱정이 됩니다.

이번에 며느리들을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가지셨죠? 그리고 미국에서 간 큰 며느리하고도 좋은 말씀 나누신 줄로 믿습니다. 제가 빨리 한국에 나가서 아버지, 어머니를 직접 뵈어야 할텐데, 이곳 사정이 여의치 않아 참 안타깝습니다.

곧 뵙도록 하겠습니다. 좀 더 참고 기다려 주십시오. 아버지가 평생을 올곧게 살아오신 교훈은 저를 항상 지켜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지당하신 교훈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정신 바짝 차리시고 저를 기다리시면서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고 굳게 믿고 사세요. 그러면 건강도 회복되시게 될 겁니다.

이제 건강이 회복되시면, 제가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우리가 안가본데도 함께 다니고, 못 먹어 보았던 것도 먹어 봤으면 합니다. 저도 한국음식 먹어본 지 꽤 오래 되었거든요. 이제 김치 맛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 김치에 들어가는 배추하고 매운 고추가 건강을 지키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한국에는 김치도 여러 가지가 아닙니까? 우리 만나서 이런 거 다 먹어보고, 또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여수 생선구이도 함께 먹어보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세요. 그리고 힘내세요.
우리 서로 만나는 날을 생각하면서 건강을 회복하세요.

꼭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말씀드리고, 두 분 모두 건강하시고 만수무강 하십시오.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김범태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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