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말로 몰랐던 아시아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를 읽고...

등록 2004.02.21 05:52수정 2004.02.21 12:39
0
원고료로 응원
멀리도 돌아간다

올 여름방학 때였다. 다음 뉴스 홈페이지에 '필리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속보가 올라왔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쌍수 들고 환영을 했던 필리핀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에 대한 반발로 군부가 반란을 일으켰나, 라는 의문을 품고 바로 학생회관 카페로 달려가 BBC와 CNN에 채널을 번갈아 맞추었다.


나도 영어 좀 한다고, 폼을 잡고 싶었지만 그렇지가 못해 화면과 자막에 시선을 집중해서 사태파악을 해보았다. 청년 장교들의 반란은 아로요 정권에 대한 전복이 아닌 단순히 군 내부의 반발이 원인이었다. 그제서야 다시 국내 언론사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더 자세한 정황을 읽어 내렸다.

컴퓨터실을 나오면서 문득 이런 나의 행동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냥 처음부터 국내 언론사 홈페이지에서 사실을 파악하지 않고, 왜 BBC나 CNN으로 다른나라 소식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까? 그렇게 영어를 잘하지도 못하면서 말야.

곽동운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를 읽는 내내 참 먼길을 돌아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같은 대륙에 살면서도 우리는 왜 그렇게 서로에 대해서 무관심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더불어 우리는 또 얼마나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대해서 아는가? 라는 의문도 이어졌다.

얼마 전 타계한 에드워즈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아시아를 보는 것도, 아시아가 우리를 보는 것도 철저히 서구식 사고에 입각한 패러다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서구 시각에서, 서구 언론에서 뿌려주는 정보를 읽어야만 직성이 풀린다. 우리는 인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 Time of India >를 보는 것이 아니라 CNN이나 뉴욕타임즈를 먼저 접해야만 자료의 신뢰도에 만족을 한다.


인도 사람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BBC나 인디펜던스지를 통해 얻은 정보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짜 맞추어 갈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지리적으로 가깝게 있으면서도 서로를 알기 위해 델리나 마닐라행 티켓을 직접 끊지 않고 뉴욕이나 런던을 거쳐서 가야 내심 안심을 했다.

서구 언론의 신뢰도와 풍부한 자료라는 말을 잊지 않고 하지만 그렇게 어렵게 길을 돌아가서 얻은 자료는 서구시각을 대변하는 것들이기에 ‘아시아를 알고 싶다’ 라는 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지 않은가?


CNN이나 BBC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균형을 잡자는 것이다. 서구를 통한 아시아 보기와 아시아 자체를 통한 아시아보기는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블랙호크 다운과 킬링필드

나는 밀리터리 매니아여서 그런지 전쟁영화를 유심히 살펴본다. 전투 장면을 재연할 때 제대로 장비들이 갖추어졌는지, 교전을 할 때 군인 배역을 맡은 배우들이 연기가 리얼한지 등등. 얼마 전 소말리아 내전을 다룬 블랙호크 다운을 다시 보게됐다.

<블랙호크 다운>은 밀리터리 관점에서 보자면 손색없는 영화다. 장비 재연이나 헬기 공중강습과 같은 미육군의 전술을 실감나게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현대식 무기로 중무장한 미군이 소말리아인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미군 19명이 사망을 했다는 내용은 철저히 미국식 애국주의로 그려졌다.

검은 얼굴을 한 소말리아인들이 죽을 때는 그냥 피 튀기는 식으로 장면처리가 됐지만, 미군 병사가 총을 맞았을 때는 장중한 배경음악이나 슬로우 처리로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마지막 자막에도 언급됐듯이 소말리아인들은 미군에 맞서다가 무려 1000명이라는 사망자를 냈다. 9.11테러와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있었던 터라 미국은 온통 애국주의가 휩쓸었다 해도 <델라와 루이스>, <글래디에이터>를 만든 리들리 스콧 감독의 손에서 <블랙호크 다운>이 나왔다는 건 좀 의아스러웠다.

아무리 지옥같은 전장이라도 부상당한 동료를 그냥 두고 갈 수 없다는 미군 병사들의 끈끈한 동료애와 인간미 앞에 어느덧 소말리아 사람들 천 명의 주검은 의미를 잃어갔다.

1980년대 중반에 개봉된 <킬링필드>는 <살인의 추억>처럼 안보면 ‘왕따’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는 꼭 봐야할 영화였다. 캄보디아에서 폴포트가 이끄는 크메르루즈가 자행한 대량학살을 그린 <킬링필드>를 나도 어렸을 적에 본 적이 있다.

< The Killing Fileds >, 영화 제목처럼 당시 캄보디아는 지옥이 따로 없었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정권을 잡은 크메르루즈는 무려 200만 명이라는 자국민을 대량 학살했다고 고발하는 게 영화의 큰 줄거리였다.

영화에서처럼 자국민 200만 명을 죽인 폴포트와 크메르루즈라면 이건 시대의 살인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에서는 킬링필드가 1969년에서부터 시작됐다고 이야기한다.

미국에 의해서 1969년부터 1973년 사이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인해 베트남과 국경을 맞닿은 캄보디아는 무려 60만 명 이상이 죽음을 당한다. 당시 캄보디아는 중립을 선언했을 뿐더러, 미군은 네이팜탄 등과 같은 명백히 제네바 협정에 위배되는 폭탄으로 캄보디아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캄보디아 폭격 임무를 안고 날아갔으나 어디에도 군사 목표물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결혼식장을 공격 목표물로 삼았다.”

오죽했으면 당시 폭격임무를 수행한 B-52폭격기의 파일럿이 이런 증언을 했을까? 1968년 구정공세로 베트남 전쟁에서 예봉이 꺾인 미군은 월맹군이 캄보디아를 거쳐 남베트남으로 들어온다는 판단 하에 베트공 루트를 끊는다는 이유로 중립국 캄보디아를 폭격한 것이다. 베트남 전쟁을 다룬 황석영씨의 소설 <무기의 그늘>에서도 이 부분이 언급됐다.

영화 <킬링필드>만으로 캄보디아를 바라본다면 분명 폴포트와 크메르루즈는 극악한 살인집단이지만 킬링필드의 본질을 살펴보자면 미국도 분명 극악한 살인자 소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물론 1975∼1979년 사이 캄보디아에서 200만 명이라는 사망자가 나오기는 했지만 크메르루즈의 학살에 의한 숫자는 10만명이고, 나머지는 미국이나 유엔의 제재조치들에 의한 기아나 질병 때문이라고 한다. 그나마 200만 명이라는 숫자도 100만 명을 주장한 핀란드 정부 조사와 같은 보고서들에 의해 그 신빙성이 위협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고 보면 영화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 한국 사람들 대다수는 캄보디아 하면, 앙코르와트와 킬링필드를 연상하는데, 앙코르와트는 찬란한 문화유적이기에 기념사진이나 현지를 다녀온 여행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새롭게 다가온다. 그러나 킬링필드는 전적으로 영화 <킬링필드>에 의존하여 판단하기에 한국 사람들은 폴포트에게 몽땅 자신의 치부를 덮어씌운 미국의 킬링필드를 보지 못한다.

뒷면에 소갯글을 쓴 오지 여행전문가 한비야씨 마저도 킬링필드가 미국에 의해 먼저 일어났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실토하지 않는가.

아시아 언론인들에게 고함

어느 신문이든 들고 국제면을 보면 펼쳐 보라. 가장 많이 보이는 문구가‘X월 X일자 <뉴욕타임지>에 의하면’, ‘**라고 <월스트리트>는 전했다' 이런 것들이다. 그나마 독자적으로 작성된 기사들은 기사에 싣지 못한 칼럼 정도다. 조선일보야 원래 그런 신문이니깐 그렇다 쳐도 한겨레까지 이런 모습에 아주 익숙해있다.

이렇듯 우리는 중국과 일본 정도를 제외하고는, 다른 나라를 알기 위해서 관성적으로 미국행 티켓부터 끊었다.

“매우 중대한 사안이라고, AP 통신은 태국언론들의 말을 인용해 전하고 있다.”

해당 국에 직접가지 않고 서구 특히 미국을 거쳐가는 길이기에 비행기 값이 많이 들고, 사건이 흐려질 수도 있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냐!

아무런 배경 지식이 없는 우리가 다른 나라에 직접 가서 취재를 하느니 미국에 가서 탄탄하게 축적된 자료를 느긋하게 살펴보면, 못사는 나라에 가서 땀 뻘뻘 흘리며 얻은 내용보다 훨씬 많은데…. 그리고 아시아 다른 나라들도 그렇게 하잖아.

아시아 각국의 기자나 지식인들이 그렇게 손쉬운 방법으로 펜을 잡을 때 언론사의 돈과 비용은 절약될지 몰라도‘아시아를 알고 싶다’는 아시아 사람들의 소박한 열망은 점점 더 멀어져갈 뿐이다. 그런 의미로 풍부한 사진자료가 곁들어진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는 우리에게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한 셈이다.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

아시아네트워크 엮음,
한겨레출판, 2003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2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3. 3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4. 4 블랙리스트에 사상검증까지... 작가 한강에 가해진 정치적 탄압 블랙리스트에 사상검증까지... 작가 한강에 가해진 정치적 탄압
  5. 5 [이충재 칼럼] 농락당한 대통령 부부 [이충재 칼럼] 농락당한 대통령 부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