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49

등록 2004.02.26 14:10수정 2004.02.26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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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후는 자기 부친이 얼마나 존경스러운 직책을 가졌으며 또한 얼마나 자랑스러운 사람인지 그 표현에 한계가 있어 안타깝다는 듯이 혀까지 차면서 말했다. 에인이도 그의 마음에 동감을 하며 다시 물어보았다.

"훌륭한 어버이를 갖는 것이 태어남에 있어 첫번째의 복이라고 했지요. 아무튼 그건 그렇고, 부친께서는 선비산에 대해 뭐라고 하셨는지요?"
"아버님 말씀이 초창기 딜문이 꼭 선비 산과 같았다고 하셨습니다. 각종의 과목이 정원을 이루었고, 토지가 비옥하여 물만 가두고 씨앗을 뿌리면 벼가 절로 자라났고 또 개간이 용이하여 그 자연 조건이 하나의 낙원과 같았다고…."


딜문은 낙원과 같았다, 그런데 그 낙원을 잃었다, 그래서 제후는 구원을 요청하려고 허둥지둥 모국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에인은 비로소 제후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제후가 계속했다.

"멀지 않은 곳엔 산이 있고 또 비옥한 들 앞에는 강이 흘렀으니 사람 살기엔 그렇게 맞춤한 곳도 없었겠지요."
"그랬겠군요."
"지금은 초창기처럼 영토가 그렇게 비옥하진 않습니다만, 그래도 주변에서는 텔이 아닌 평지 마을로선 조건이 가장 좋은 편이지요. 그래서인지 주변 부족들은 아직도 딜문을 낙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초창기라면 언제쯤인지요?"
"180년 전쯤이랍니다. 그땐 초목이 무성하고 새와 짐승이 번성했으며 과일 또한 지천이었다니, 먼길 여행자에겐 더없이 반가운 천혜의 보고였겠지요."
"그랬을 테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밥을 끓이지 않아도 먹을 것이 풍부했다면 길손들이 쉬기엔 더 이상 좋은 조건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

"그래서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웬일인지 날씨가 자꾸 변화를 했다고 합니다."
"날씨가 변하다니요?"
"해마다 추워지고 폭우와 바람도 잦아져 과실과 초원이 점점 줄어들었고…. 그래서 경작을 하기 시작했다고 내 아버님이 말씀하셨지요."
"그럼 제후님의 선조께서는 초창기에 여기에 오셨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선조는 30년 뒤에 이곳에 오셨답니다."
"대상으로 말입니까?"
"아니요, 선조는 구승전람을 전수받은 분으로 소호 국에서 이리로 파견을 했답디다."

"그럼 딜문에는 처음부터 소호 국 사람들만 왔습니까?"
"그렇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처음엔 각처에 있는 환족들이 다 모여들었다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어찌하여 소호 국이 모국이 되었습니까? 다른 곳 환족들도 많았다면 말입니다."
"소호 국 대상들이 가장 세력이 컸겠지요. 아무튼 소호 국 사람이 자치권을 잡고 또 첫 제후가 되면서부터 모국이 그리로 정해진 것이랍니다."
"그랬군요. 그러면 부친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십니까?"


그 말에 제후는 그만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리고 꺼져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요…."


제후는 다시 고개를 쳐들고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때가 되어 돌아가셨다면 제 가슴에 이토록 깊은 멍은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다면 어떻게…?"
"휴, 바로 그때…2년 전 변란 때…."

그래서 이 사람은 기필코 딜문을 찾고 싶어한 것이다. 아버지까지 변란에 잃었다면 아들로서 당연히 복수하고 싶을 것이다. 에인은 비로소 제후를 전적으로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런 사연을 가진 사람이라면 성격이 좀 이상하다고 거부감을 가질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했다. 에인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럼 제후께서는 얼마 동안이나 통치를 하셨는지요?"
"10년입니다. 겨우 십년 만에, 땅덩이는 물론 아버님까지 잃고 말았으니…."

제후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의 부친은 주민들을 피신시키다가 그렇게 당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대피시키려고 조랑말을 타고 마을을 돌며 외치다가 적들에게 잡혀 목이 베어졌다. 적장은 그 목을 토성 문에 걸어놓고 까마귀의 밥이 되게 했고, 해골이 될 때까지 치우지 않고 그렇게 걸어두었더라고 사람들은 전해주었다.

"그만 내려가시지요."

에인이 먼저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그리고 바위 틈서리를 잡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후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던 때문이었다. 그는 아직 중년 남자의 울음까지 지켜볼 능력이 없었고, 그래서 두려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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