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꽝' 없는 복권이에요"

[오클랜드 하늘에 뜨는 무지개-12] 딸아이 학교 위해 복권을 팔다

등록 2004.03.10 11:18수정 2004.03.11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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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내일 이거 몇 장만 팔아 주세요.”


어젯밤 서재로 쓰는 작은 방에서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딸아이 동윤이가 들어오면서 내게 던진 말이다. 그리고는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동윤이는 책상 위에 뭔가를 놓더니 얼른 꽁무니를 뺀다. 곁눈질로 보았더니, 내 짐작대로 복권이다.

욕심 내서 더 가져오더니 결국은 내 차례까지 오게 되는구나. 동윤이가 다니는 중학교에서 며칠 전부터 학교 재정 확보를 위한 복권 팔기 행사를 시작했는데, 그 불똥이 마침내 내게까지 튄 것이다.

한국의 대부분의 학교들처럼 뉴질랜드의 학교들도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예산에만 의존해서 학교 살림을 꾸려나가기에는 재정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매년 연례행사처럼 학교 재정 확충을 위한 다양한 모금 운동을 펼치게 된다.

초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손에 제과회사에서 협찬 받은 초콜릿을 들려 보내 가가호호 다니면서 팔게 하는 방법을 주로 많이 사용한다. 동윤이도 초등학교 5, 6학년 시절, 우리 동네의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초콜릿 행상(?)’을 제법 많이 해서, 이젠 물건 팔러 다니는 데는 이골이 났다.

아내와 나는 처음에는, 뭐 이런 일을 학생들에게 다 시키나 싶었다. 그러나 이곳 뉴질랜드에서는 이런 일이 워낙 흔하기 때문에 물건을 팔러 다니는 아이들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더라도 한두 개씩은 팔아주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인심이어서, 이 일이 그다지 힘든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먼저 방문한 집의 주인은 아무리 인심이 좋다고 해도 똑같은 물건을 또 사주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따라서 선수를 뺏기지 않도록 서둘러야 한다. 선수를 빼앗기게 되면 그 때는 친척들이나 엄마 아빠의 친지들에게 손을 뻗칠 수밖에 없다. 어떤 학생들은 아예 사람들로 붐비는 쇼핑센터에서 파는 경우도 있다.

동윤이가 중학생이 된 지난해에는 물건 파는 일로 학교 재정을 마련하는 이런 행사가 없기에, 이제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행상하는 일도 초등학교 졸업과 함께 끝났구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며칠 전, 동윤이는 학교에서 초콜릿 대신에 복권 스무 장을 받아 온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학교에서 복권을 받아 온 첫날, 동윤이는 같은 반 친구인 테라이와 함께 복권을 반 이상 팔았다. 그날 동윤이는 교외에서 살고 있는 테라이네 집에 놀러갔는데, 그 곳에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없어서, 동윤이와 테라이는 방문하는 집들마다 복권 한두 장씩을 쉽게 팔 수 있었던 것이다.

a 딸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재정 확충을 위해 판매하고 있는 즉석식 복권. 행운의 여신은 과연 미소를 지어 보낼 것인가?

딸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재정 확충을 위해 판매하고 있는 즉석식 복권. 행운의 여신은 과연 미소를 지어 보낼 것인가? ⓒ 정철용

“이거, ‘꽝’ 없는 복권이에요.”

집에 돌아온 동윤이는 아내와 내게도 복권을 내밀면서 말했다. 1장에 3달러씩(한국 돈으로 약 2400원)이라 제법 비싸기는 했지만, 우리는 동윤이가 팔다 남은 복권 중에서 각각 1장씩 2장을 사주었다.

긁어서 바로 경품을 확인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이 복권에는 호주 여행권이나 25인치 컬러 텔레비전 등 제법 값나가는 경품들도 있고, 보너스로 50달러에서 1000달러까지 현금으로 지급되는 상금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행운의 복권들은 아주 극소수일 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행운을 비껴가는 대부분의 복권들도 그냥 휴지조각으로 버릴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동윤이의 말대로 이 복권에는 ‘꽝’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작은 것이기는 하지만 이 복권에는 최소한 3달러 이상의 값어치가 나가는 경품들이 제공된다고 한다.

우리가 고른 복권들도 마찬가지여서, 내가 산 복권에는 사교춤이나 로큰롤 댄스의 기초편 무료 수강권이 경품으로 들어 있었다. 그리고 아내가 고른 복권에는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커피숍에서 카푸치노나 커피 한 잔을 무료로 마실 수 있는 경품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그걸 보고, ‘야, 정말 이 나라는 재미있는 나라구나!’라고 감탄했다. 학교 재정을 마련하는데 복권이라는 다소 비교육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도 그랬지만, 그 복권의 경품으로 제공되는 것들이 이렇게 소박하고도 재미난 것들이라니!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니, 학교의 재정 확충을 돕기 위하여 이렇게 커피 한 잔, 사교춤 수강권 등 자신들이 내줄 수 있는 것들을 선뜻 경품으로 내놓은 지역사회 상인들의 소박하고도 인정 어린 마음이 너무나 정겹게 느껴졌다. ‘꽝’이 없는 이 복권에는 아이들의 학교를 돕기 위한 그들의 애정 어린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a 아내가 고른 복권의 경품은 커피 한잔. 아주 작은 것이지만 학교의 재정 지원을 위해서 협찬한 상인들의 마음이 아름답다.

아내가 고른 복권의 경품은 커피 한잔. 아주 작은 것이지만 학교의 재정 지원을 위해서 협찬한 상인들의 마음이 아름답다. ⓒ 정철용

동윤이는 팔다 남은 나머지 복권들을 옆집의 빌 할아버지에게 두 장 팔고, 자신의 피아노 선생님 내외분에게도 두 장을 팔아서 이틀만에 할당받은 스무 장의 복권을 모두 팔아 치웠다. 우리는 이제 다 되었구나 싶어 홀가분해 했다.

그런데 복권을 많이 판매한 학생에게는 학교에서 푸짐한 상을 준다면서, 그 다음날 동윤이는 스무 장의 복권을 더 받아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쉽지 않았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동윤이는 큰소리를 치면서 복권을 팔러 나갔지만, 결국은 한 장도 팔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미 우리 동네의 집들은 그 전날 학생들이 한 차례 쓸고 지나갔기에 아무도 사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의지할 사람은 이제 엄마와 아빠밖에 없다. 동윤이는 며칠을 궁리한 끝에 어젯밤에 내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내가 매주 한 차례씩 단편영화 출연을 위한 연기 연습을 하러 나가니까, 그 사람들에게 좀 팔아보라고 복권을 내게 내민 것이다.

남한테 아쉬운 소리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성격이라 조금 마음의 부담이 되었지만, 나는 딸아이가 맡긴 복권 뭉치를 영화대본과 함께 가방에 집어넣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연기 연습을 마치자마자 복권을 펼쳐 놓았다. 그리고는 감독과 내 상대역으로 나오는 한국인 아주머니에게 ‘꽝’이 없는 복권이라고 말하며 사정을 말했더니, 그들은 흔쾌히 복권 1장씩을 사주었다.

행운을 기대하면서 복권을 긁는 그들은 즐거워했다. 비록 행운은 빗나가고 복권에 쓰여져 있는 경품 내용도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었지만 그들은 몹시 즐거워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내가 괜히 마음에 부담을 느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재정 마련을 위해서 자신들의 물건과 서비스를 주저 없이 복권의 경품으로 내놓는 지역사회의 상인들도 그렇지만, 이렇게 기꺼운 마음으로 그 복권들을 사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모금 행사가 가능한 것임을 나는 다시금 깨달았다.

집에 돌아와서 복권과 함께 내가 오늘 판 복권 두 장 값을 동윤이에게 건넸더니 동윤이는 고맙다고 한다. 그리고 아직 팔지 못한 나머지 18장의 복권들은 친구 테라이와 함께 내일 쇼핑센터에서 팔기로 했다고 한다.

‘꽝’이 없는 복권이니, 아니 ‘꽝’ 대신에 지역사회 상인들의 소박한 마음이 담겨 있는 복권이니, 금방 다 팔릴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 복권을 산 사람 중에 행운의 주인공이 나온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그들은 모두 즐거워할 것이다. 복권 값으로 치르는 돈이 아이들의 학교 재정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그들은 다 알기 때문이다.

“복권 사세요. 이거 ‘꽝’ 없는 복권이에요.”

이렇게 외치며 내일 쇼핑센터를 누비며 복권을 팔러 다닐 동윤이와 테라이에게 행운이 있기를, 그리고 이들로부터 복권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행운이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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